푸힌 롱끄라 국립공원 - 핏싸눌록

홈 > 여행기/사진 > 여행사진
여행사진

푸힌 롱끄라 국립공원 - 핏싸눌록

펀낙뺀바우 6 2549


아름다운 모습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곳인 피싸눌록의

푸힌롱끄라 국립공원입니다.



1991071028_97b363ba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313.jpg
핏싸눌록과 펫차분 주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푸힌롱끄라 국립공원입니다.





1991071028_f86e5d28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312.jpg
1976년 10월6일 태국 군부가 탐마삿 대학교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죄 없는 젊은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대학살을 감행한 후 학생들과 활동가들이 핏싸눌록과 펫차분의 밀림으로 들어가 무장을하고 군부와 맞서 약 6년간 게릴라 전을 수행하면서 만들어졌던 본부가 이 곳에 있습니다.
사진은 그 당시 전투에 사용 되었던 무기들의 잔해입니다.



 

1991071028_8cb96057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311.jpg
그 당시 이 곳에 주둔했던 학생들과 활동가들의 사진들입니다.





1991071028_2df65372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309.jpg
마히돈 의대 출신 병사들이 주축이 되어 자체 병원을 운영했다는 내용과
의료기기들입니다.





1991071028_daa5000c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84.jpg
정부군의 공습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관총까지 설치했었던 모습





1991071028_3275b137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89.jpg
1만명 이상이 주둔했던 지역이라 자체적으로 규율을 만들고 또 그 규율을 어기면 이렇게 옥에 가뒀다는군요.




1991071028_c117247a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01.jpg
곳곳에 서늘함이 느껴지는 곳이지만 주변엔 이렇게 기암괴석들이 있어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1991071028_327b64a6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33.jpg
푸힌롱끄라




1991071028_420eb3b8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53.jpg
푸힌롱끄라




1991071028_f9e85897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49.jpg
푸힌롱끄라




1991071028_46b269d0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79.jpg
이 곳에 올라서면 약간 미칠수도 있습니다.




1991071028_4bfc8917_C6F7B8CBBAAFC8AF_2011%2B4BFF9BACEC5CD%2B5BFF9B1EEC1F6%2B1486.jpg
정부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천연 반공호입니다.




*아래 사진과 설명은 혹시나 이 곳에 방문하실 분들을 위해서 남겨봅니다.

1991071028_036d2de9_10061976.jpg

1973년 중반 경에 접어들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군부 민주화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 해 6월 한 대학 신문 사설에서 싸릿의 뒤를 이은 타넘과 쁘라팟을 야수로 표현한 것을 문제 삼아 군사정부가 대학 측에 압력을 넣어 관련 학생들을 퇴학 처분하도록 하였다.

전국대학생총연합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과 대학교수들은 퇴학 조치의 철회와 헌정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학생들은 군사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자 분노하였다.

결국 ‘공권력’과 대중매체를 동원한 군사정부의 억압과 통제에도 시위대의 규모가 일파만파로 확대되자 군사정부를 이끌었던 타넘과 쁘라팟은 국왕의 권유에 따라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시민사회의 힘에 의한 민주화의 역사적 전기가 처음 마련되었다.

1976년 10월 6일 이른 아침, 탐마삿 대학 내에서 망명하였던 군 수뇌 인사의 복귀를 규탄하고 있던 학생들을 향해 총격이 가해졌다. 순식간에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총격 직후에는 우익 폭력배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 무지막지한 테러를 가하였다. 당시 쿠데타의 명분은 ‘탐마삿 대학에 모인 공산주의자들이 왕세자를 모욕하고 국가전복을 기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태국 역사상 최대의 유혈사태로 기록된 1976년 10월 6일을 계기로 사회운동 조직들은 심대한 물리적 타격을 받았다.

지도부에 속한 활동가들이 태국공산당에 합류하기 위해 속속 입산하였다.

전(前) 전국대학생총연합 의장, 전 마하돈 의과대학 자치위원장, 사회당 위원장, 노동·농민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탐마삿 대학에서의 살육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된 ‘빨갱이사냥’을 피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태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삼림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는 2천명에서 3천명에 이르렀다. 태국공산당 지하 방송인 ‘인민의 소리’는 군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거듭 역설하였다.

1979년 태국공산당은 1만여 명의 무장요원을 갖게 되었다. 태국공산당이 참여한 ‘민주애국통일전선’도 결성되었다.

이들은 1976년 대학살 이전까지 태국 정치문화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왕에 대한 비판을 삼가 하던 태도를 바꿔 푸미폰 국왕과 입헌군주제를 ‘구 봉건질서’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공산 무장세력의 공세도 활발해져 정부군과의 무력 충돌 횟수도 급속히 늘어났다.이렇듯 공산반군의 규모가 확대일로의 양상을 보이자 군부는 유화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양원제를 도입하고 검열제도,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약했던 많은 법적 조항들을 철폐하였다. 또한 공산반군에 가담한 자들뿐만 아니라 1976년 쿠데타 때 체포된 민주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실시하였다.

특히 공산반군 진영으로부터 이탈한 공산주의자들의 전력을 불문에 부친 훈령은 공산반군의 규모를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와서 사실상 공산반군의 영향력은 전무하게 되었다.
 

**사진 및 인용 서적
*Labour Against Dictatorship』 (Somsak Kosaisuk, Friedrich Ebert Stiftung),
*The Politics of despotic paternalism, - 開發民主主義(岩波新書)

6 Comments
열혈쵸코 2011.07.06 22:53  
이번에 올려주신 정보도 즐겁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돌이 늘어선 모습도 신기하고, 약간 미칠듯한 풍경도 멋집니다.
펀낙뺀바우 2011.07.07 13:09  
감사합니다.^^

'엉클 분미'라는 태국 영화에서 빨간 눈동자의 원숭이 인간으로 묘사되었던 분미 아저씨의 동생이 사라진 곳이 여기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죨리™ 2011.07.07 17:52  
새로운 태국의 모습 그리고 역사 몰랐던 모습에 상세히 설명까지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동쪽마녀 2011.07.07 19:30  
자꾸 이렇게 좋은 정보와 사진들 올려주시면,
내년 이싼 몇 곳만 돌아보겠다는 저의 결심이 마구 흔들리잖습니까요.ㅠㅠ 
귀한 글 정말 고맙습니다, 펀낙뻔바우님!!
포맨 2011.07.08 11:35  
지금의 흥청대는 카오산...예전에 민주화를 열망하던 타마삿학생들이 죽어가던 곳이라는 아는 분이 거의 없을겁니다.

말레이반도에서의 공산활동은 세계적 냉전종식분위기와 비슷하게 80년정도에 종식됩니다. 말레이공산당은 말레이 북부에서 타이공산당과의 연합도 제대로 못하고 소멸되었습니다.

타이에서는
비단 학생운동만 볼수도 없는게 고산족들의 공산운동도 펫차분등 타지역에서 격렬하게 있었고 중국국민당 잔여군의 모양만 다른 개입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입헌왕국이라는 특수성과 여러가지 부조리때문에 씨줄날줄로 얽힌 상황이라 전반적인 얼개잡는데만 몇개월이 걸립니다.
그중에 학생운동의 태사랑에서 보기드문 포스팅...
참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닭백숙 2011.07.08 22:47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

태국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아픔을 공유하기 때문 이었나요
포토 제목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