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파스텔풍 건물중세 유럽 분위기 만끽
여행이란 참 매력적이다. 적지 않는 대가를 요구하지만 언제나 끝난 후엔 여운이 오래 남는다. 그 여운이 다할 즈음 또 재발하는 이놈의 병명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론리 플래닛, 큐리어스, 인터넷, 100배 등 미친 듯이 정보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나의 병명을 쉽게 찾아낸다. 여행 중독증. 끊을 수 없는 심각한 병이 이제 나를 북동유럽의 발트3국 중 하나인 조그마한 나라 라트비아에 데려다 놓았다.
라트비아 여행 전에 계획을 세우면서 미리 정보를 찾아 보니, 현지 여행객들 중 동양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면 당연히 한국 음식점은 없을 테고(막상 가보니 한 군데 있었다) 이번 여행은 기간도 길고 해서, 현지에 철저히 적응한다는 나의 여행 철학을 깨고 라면 몇 봉지를 배낭 깊숙이 넣었다. 부산서 출발한 루프트한자 항공기는 13시간이 지나 어스름한 저녁에 유럽의 관문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라트비아로 출발하는 스케줄이라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공항서 3.7유로 전철 티켓을 사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까지 10여분 남짓 걸려 도착해 우선 민박집을 구한 다음, 중앙역 바로 앞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정통 독일 생맥주를 마시면서 소시지를 안주 삼아 내일의 설렘을 달래 본다.
다음날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 정도 지나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에 도착했다. 공항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깔끔했다. 발트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는 해양성 기후이며 산이 거의 없는 평평한 나라로 우리나라와는 시차가 7시간, 인구 약 230만명의 조그만 나라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우스갯소리로 길거리 지나가는 아무 여자를 봐도 탤런트 김태희보다 더 예쁘다는 말이 나올 만큼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이곳 여성들은 대부분 금발이어서 많은 여성들이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염색하는 것이 한때 유행했다고 한다.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무조건 구시가지로 향했다. 사실 국내에서 라트비아 정보를 구하는데 한계를 느낀 나는 특유의 무대포 정신으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작정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택시비를 비롯한 높은 물가에 앞으로의 일정이 사뭇 걱정스러웠다.
구시가지를 시작하는 광장 한가운데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별 세개를 들고 서 있는 파란색 여인의 동상인데, 손에 들려 있는 3개의 별은 라트비아의 지역을 상징한다고 한다. 매시 정각 그 동상 앞에서 군인 교대식이 있다. 동상 바로 앞에는 시계탑이 있고. 리가 시민들이 주로 만나는 약속 장소라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기를 마주보고 대로를 가로질러 쭉 나있는 거리를 따라 걸으면 구시가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구시가지는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2, 3층으로 이어진 파스텔풍의 유럽식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면 지나가는 현대식 자동차만 없다면, 내가 마치 중세도시 한가운데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느낌을 받는다.
구시가지 중간쯤에 위치한 유명한 리도 레스토랑(부페) 바로 옆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허름했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따뜻했다.
구시가지의 가장 중심이 되는 돔대성당은 독일인들이 이땅에 와서 최초로 지은 성당이라고 한다. 발트에 있는 성당 중에는 가장 규모가 크고 성당 안에 있는 오르간은 유럽 최대를 자랑한다. 수많은 보수공사 때문에 한 건물 안에 여러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돔대성당 주위에 있는 광장은 리가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여느 여행자들처럼 나도 노천카페에 들어가서 잠시 피곤한 발을 쉬며,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인 알다리스에 빠져 본다.
성피터교회는 구시가지에서 돔대성당과 함께 가장 인상적인 건물 중 하나로 1209년에 건설된 후 시대에 따라 가톨릭, 루터교, 박물관 등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해 현재의 모습은 1941년에 보수를 마친 것인데, 123m 높이에 있는 교회첨탑 전망대에 올라가면 리가 시내가 다 보인다. 웅장한 규모와 높이로 인해 돔대성당과 성피터교회는 구시가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특이한 이름에 걸맞지 않은 화려한 건축 양식의 검은머리 전당 건물, 나란히 붙어 있지만 서로 다른 건축양식으로 지은 삼형제 건물,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과거 실제 화약을 보관했다는 둥그런 모양의 붉은색 벽돌로 된 화약탑 건물.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그림이라 모두 정성스레 카메라에 담았다.
여행 막바지 즈음에 비가 청승맞게 추적추적 내리고 스멀스멀하게 뼛속까지 추워온다. 상점에서 술 한병 사서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미리 준비해 간 라면을 안주 삼아 한잔 할 준비를 한다. 여행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으로 가서 냄비에 물을 올리고, 뭐 넣어 놓은 것도 없으면서 바로 옆에 있는 냉장고 문을 습관적으로 열어 보니, 다른 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계란 한개에 시선이 멈추는 게 아닌가. ‘조거 하나 탁 깨서 넣으면 라면 맛에 날개를 다는데.’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주위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계란을 꺼내 깨어 넣고 껍질은 휴지로 돌돌 말아 휴지통 깊숙이 묻었다. 가슴은 콩닥콩닥거리는데 이놈의 라면은 금방 넣은 계란 때문에 끓을 기미가 안 보인다.
대충 끓이는 둥 마는 둥 냄비를 들고, 내방에 와서 와인과 라면을 번갈아 맛보면서 잠시 그리운 한국의 맛과 라트비아의 맛을 같이 음미하고 나니, 계란 생각 때문에 영 마음이 편하지 않다. 궁리 끝에 메모지에 ‘내가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계란을 먹어서 대단히 미안하니, 대신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리아 라면 한봉지를 대신한다’고 정중하게 써서 라면봉지에 붙여서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 다음날 아침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라면은 없고 ‘누들(라면) 감사하다’라는 쪽지가 보였다. 마지막 날 게스트하우스를 나올 때 냉장고에 계란 한판(8개)을 넣어 놓았다. ‘한국의 한 여행객이 여행객들을 위해 선사한다’라는 문구를 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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