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동남아와의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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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무

조선시대에 동남아와의 무역

나라라 0 1244
조선시대의 무역

우리나라에는 화폐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금화가 기본이고 단위가 금 1냥 입니다. 은도 화폐구실을 했고 엽전도 유통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부자라고 하면 최소 금화 1,000냥은 있어야 했고 1,000냥을 한 궤짝에 넣어서 1,000냥 상자라고 했습니다. 큰 장사꾼 창고에는 이런 1,000냥 상자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금화와 은 또는 엽전간의 교환비율이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들 화폐를 교환해주는 재벌급 환전상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은행이지요. 그래서 마르코 폴로가 일본을 황금의 나라라고 칭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은화나 금화가 없었습니다. 은화나 금화가 있으면 상주국인 중국에 빼앗기게 되니, 아예 만들 생각을 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엽전만 있게 된 것입니다. 엽전이란 보조화폐입니다. 물물교환을 주로 하면서 우수리 돈을 계산할 때나 쓰여지는 정도였지요. 현대 사회에서 동전밖에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리고 사실상 큰 상거래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보조화폐를 만드는 것조차 힘에 벅찬 일이었습니다. 조선 태종(太宗) 때 비로소 조선통보라는 엽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상거래는 주로 물물교환이었고 일부만 중국에서 수입한 엽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만들어낸 것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동이 부족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범죄자들로 하여금 동을 바치게 하고 죄를 면해주었습니다. 무당의 세금으로도 동을 바치게 했습니다.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불상, 불구(촛대 등)를 녹여 동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의 국내생산을 적극 장려했으나 광산들은 이미 폐광한 후였습니다. 창원지방이 제일 큰 산지였는데, 매년 100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세종 10년(1408)에 동 2만 8천 근을 수입하고 면포 2,800필과 바꾼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 동 수입은 계속 증가하여 조선 말기에는 매년 10만근 이상이 수입되었습니다. 주로 면포와 바꾸었는데, 면포 한 필에 동 상품은 2근 반, 하품은 5근까지 받았습니다. 은도 일본에서 수입했습니다. 중종 37년(1542)에는 은 8만 냥을 면포와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20세기초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는 농업을 제외하고는 광업이나 공업, 상업, 넓게는 경제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던 상태였다는 결론입니다.그러니 조선조의 무역이 크게 성행하지 못한것 입니다.



유구국과의 무역
유구국은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현)에 속해 있지만 고대에는 독립 국가로서 인근 국가와 선린 교류, 통상 무역을 주도한 해상 왕국이었다. 유구국은 14세기 후반부터 중국과 외교 통상에 이어서 우리나라와도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고려 창왕 2년(1389)에 유구 국왕의 사신인 옥지가 한반도에 오면서 정식 교류가 오가기 시작했다. 조선조에는 정식 외교 사절과 통상, 표류인의 송환 등 50여 차례의 사절단이 있을 정도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조선조 전기에는 독자적인 외교 통상 교류 위주로 이루어졌고, 후기에 들어와서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접촉 방식에 변화를 가져 왔다. 광해군 1년(慶長 14년; 1609)에 유구국은 일본 薩摩(사츠마)藩의 침략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정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또 인조 16년(1638) 이후에 소위 '私交의 예가 없다(無私交之禮)'라는 청조의 억제 정책에 의하여 조선과 유구국 사이에 직접적인 외교 접촉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조선과 유구국은 연경(북경)을 중심으로 한 간접적인 외교 접촉과 표류인을 통한 민간인 접촉을 통하여 여전히 끈끈한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고, 선린 관계도 조선조 전기에 못지 않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고종 19년(明治 12년 ; 1879)에 이르러 일본 明治(메이지) 정부가 유구국을 공식 합병시키자, 그간 양국 사이에 이루어졌던 모든 교류가 중단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옛 유구국이 일본의 한 지방 정부로 속해져 있어 한반도와 유구 사이에는 주로 민간 교류만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조선조와 유구국 사이에 오갔던 교류는 한 마디로 선린 우호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매번 사신들의 직 간접 통교는 말할 것도 없고, 표류해 온 민간인에 대해서도 서로 후대를 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조에 변방 신하가 제주도에 표류해 온 유구인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아, 자치 잘못했으면 양국 외교사의 유래 없는 최악의 사건으로 전개될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 조야에 유구인이 원수를 갚으러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또 훗날에 이 사건은 조선 사대부들에 의해 기사화되어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일본과의 침향수입.
우리나라 곳곳의 사찰이나 특정한 장소에 묻혀있는 향목은, 일본의 <금속 사기>를 보면 그위치가 자세히 적혀 있는데, 때로는 물속에 가라앉는다는 침향(枕香)목의 특성 때문인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묻기도 한다. 최근에 김제에 있는 한 사찰에서는 매향 풍습을 답습하기 위해 절의 신도들이 향목을 이고 민물과 바닷물이 접하는 곳에 향나무를 묻는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뿐이다.

침향은 향 중의 향으로 진품의 가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곳곳에 침향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기에 주로 일본을 통해 사들이고, 중요한 행사나 고급 약재를 만드는데 사용하였고, 몹시 아끼고소중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침향은 인도의 동부, 아샘 지방, 베트남, 보르네오,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열대 지역에서 나는 아퀴라리아(Aquilaria)에 속한 식물로, 썩거나 병들어 수지가 흘러 나와 향이 된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를 채취하는데 먼저 몇 년이 지난 오래된 나무를 잘라 두고 시간이 흐르면, 그 외피가 먼저 부패되나, 나무의 속과 가시마디는 단단하고 검게 되고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무의 성질은 허유(虛柔)로, 향이 있는 것은 백개 중 몇 개 되지 않으며, 나무가 물을 머금으면 수지가 생기게된다. 다시 말하면, 침향수가 잘리거나 벌레 먹는다든지 속에 묻혀 흙의 압력을 받으면 수지가 나와, 남의 나무의 조직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 재질 중에 검은 수지가 침착한 부분을 채집한 것을 침향이라고 하며, 물에 가라앉은 부분을 가장 상품으로 친다. 이러한 침향의 특성으로 인해 고급 약재로서 예로부터 귀하게 취급되었는데,

조선에서는 침향으로 말미암은 재미나는 일화가 있다.
세조임인(壬寅)년에 전라도 관찰사와 순천 부사에게, 순천(順天)부(府)에 있는 침향을 살피게 한 일이 있었다.
"듣건대 순천부의 해농창(海農倉) 가까운 땅에 침향이 있는데, 나무와 비슷하다고 하고, 또한 돌산도에도 많이 있다고 하니, 경(卿) 등이 자세히 살펴서 아뢰어라. 또 많은 사람들이 베어 가는 것을 금지하라."

이는 우리 선조들이 침향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던 까닭이고, 또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오류를 범하였음을 잘 나타내 준다.세종 때 의주(義州) 야일포(夜日浦) 남쪽 장성(長成) 아래 바위에 새겨진 글에 이르기를, '경인년 11월 22일에 최순(崔淳)이 이 돌에서 내려가 님쪽으로 60척을 나가 향을 묻었다'고 우참찬 이숙지가 평안도 관찰사에게 아뢰자 그 곳을 파 보라고 일렀다. 그래서 파보자 '향목이 아니고 소나무(松木)와 참나무(眞木)이니, 아직 향이 되지 못한 까닭으로 다시 이를 묻었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관찰사에게 명하여 표를 세워 후일 빙고(憑考)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향목이나 향을 아무리 오래 묻어놓아도 침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우매함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니 통곡할 만한 일이다. 일본은 일찍이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으로 침향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조선에 비싼 값으로 판 사실이 실록 여기저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관리들은 대체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싸게 사들이면서도 한 번도 산지에 직접 가서 구해볼 생각은 안 해보았다는 말인지... 현재 일본은 세계 침향 산지의 대부분을 확보하고 있다.

침향은 동양향 제조나 한방 제조에는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도 조선 때처럼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일찍부터 침향의 재배 단지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들의 상술에 그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침향의 약용 가치로는 기의 순환을 돕고, 혈을 뚫으며, 양기를 강화하고 풍을 제거한다고 한다. 이것은 <동의보감>(한국) <중약대사전>(중국), <원설한방의약대사전>(일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침향의 품질은 수지 함유량을 최우선으로 하여 침수, 반침수, 부유에 따라 정한다. 또한 색채, 향기, 중량, 크기 순으로 등급을 정하는데, 녹·자색이 흑색보다 상품이고,태울 때 향기가 진하고 부드러우며 오미(五味)가 풍부할수록 상품에 속한다. 침향의 가격은 1그램에 1,000원 정도에서 10만원까지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는데, 명향이라고 하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비싸다.침향은 침향일 뿐, 향나무나 다른 나무는 땅속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침향으로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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