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이란?,,,,,,,,1,,,,,,,
이러한 것은 옛부터 국왕이 절대적 권한을 갖는 전제군주국이었고, 따라서 국왕을 정점으로한 사회내의 위계적 신분질서가 근래 태국사회에로 계속 이어져 온 것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국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은 태국사회내에서 집단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고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성향을 갖도록 했으며, 한편 태국인과 태국사회의 정신적인 면을 지배해 온 불교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생활철학'으로써 태국인의 가치관을 형성해 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1. 농경사회
태국에는 타이족을 주축으로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라오스인, 베트남인, 몬인, 크메르인, 서양인과 또한 이들간의 혼혈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으며, 이들이 태국인을 구성하고 있다. 타이족의 "타이"라는 단어는 "자유"를 의미한다. 엄격한 형식이나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선호한다. 타이족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하한 이유 중의 하나도 중국인의 지배를 거부하고 타이족 방식대로 자유롭게 살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국인들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자유스럽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고 있다. 태국은 지리적으로 아열대기후에 속해 있으므로 일년내내 더워 벼농사에 적합한 나라이다. 옛부터 천혜의 자원속에서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짜오프라야 강유역의 비옥한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를 지었으며, 이외에 야자, 고무, 옥수수, 각종 과일, 목축과 어업에 종사하였다. "진짜 태국인은 농민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태국인은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전인구의 약 80% 이상이 농업, 수산업, 목축업, 삼림업에 종사하고 있다.
땅을 줌심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농사를 중심한 공동체적인 모임이나 행사, 축제가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온 동네 사람들은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어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낙천적이다. 땅이 생활의 원천인 이들은 별로 이사를 하지 않고 사회적 신분의 변화도 거의 없다. 대신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가족을 중심한 응집력이 강하며, 전통적으로 가족중심의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 소비자와 생산자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 농민들은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어서 인습이나 관습에 집착하며 변화에 스스로 적응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도시인보다 느리고 소극적이다.
따라서 태국인들은 깊은 사고를 하거나 창조적 고통을 기피하고, 무슨 일이든 빨리 끝내기를 바라며 일의 결과가 좋던 나쁘던 상관하려 하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영국인들이 연구하는데 재미를 느끼고 미국인들이 일을 행하는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면, 태국인들은 일을 보는 것 그 자체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개인의 감정, 느낌, 관습에 의존하는 성향이 비교적 강하며, 원칙이나 이념보다는 자유를 선호하고 개인간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부모에게 효도함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의식이나 체면을 중시하여 출가, 결혼, 장례식, 각종 잔치, 보시 등의 일상생활상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낭비도 서슴치 않는다.
2. 권위사회 , 신분사회
건국이래 태국은 왕을 정점으로 한 통치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13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여 수코타이 왕국을 건립한 이래 1932년에 입헌혁명에 의해 민주주의제도가 들어올 때까지 태국은 전제군주인 왕을 최고의 통치자로 한 절대왕국이었다. 수코타이 왕국에서 아유타야 왕국, 통부리 왕국, 그리고 랏따나꼬신 왕국(현 짝끄리 왕조)에 이르면서 왕의 성격은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즉 탐마라차(Thammaracha, Dhammaraja, 정의로운 왕, 법왕)의 성격곽 신왕(Thevaraja), 생명의 주인(Lord of Life), 그리고 전영토의 주인(Lord of Land)의 성격을 지닌 카리스마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왕의 무제한적인 권한은 불교에 의해 견제되었고 왕의 행위와 자격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제한도 불교에 의해 정해졌다. 왕은 대내적으로 만백성의 안전과 안위,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국제무역과 외세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므로 태국인들은 국가의 모든 권력과 권위는 왕(왕족, 왕실)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은 민주주의제도하에서도 크게 변하지 못하였다.
1452년에 버롬뜨라이롬까낫 왕이 제정한 싹디나 제도는 토지를 수단으로 태국인 개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한정한 제도인데, 이 제도로 인해 태국사회는 왕과 왕족사회, 관료사회, 평민사회, 그리고 노예사회로 나뉘어졌다. 이 계층화된 사회는 물론 인도의 카스트 제도하의 사회와 달리 신분의 수직적인 변화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가능하였지만 원칙적으로 하극상의 현상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수코타이 시대의 람캄행 왕 때에는 왕이 직접 백성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가르치면서 국사를 의논하였으나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영토가 방대해지면서, 더군다나 크메르식의 신권사상이 도입되면서 왕은 수도를 중심한 지역만을 다스리고 그외의 지역은 믿을 만한 왕족이나 관료를 보내 통치했으며, 변방지역이나 속방들에 대하여는 외교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에서 거의 자치를 인정하고 조공을 약 3년에 한번씩 바치게 하였다. 세워링 흐르면서 관료는 왕을 대신한 인물로 백성에게 부각되었으며, 왕은 관료를 통해 자신의 명을 하달하고 간접적으로 백성을 통치하면서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관료나 왕족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싹디나 제도로 백성들은 신분에 따라 5라이(1라이는 약 1600㎡)에서 10만라이의 토지를 분배받아 경작 관리하며 생활하다가 사망하면 왕에게 반납하였다. 반면, 왕은 이 제도를 통해 백성을 자쥬자재로 관리하고 통솔하고 또 동원하였다. 평화시에 왕은 국가의 일에는 자신을 대신하는 관료를, 농사 등등의 경제적 생산활동에는 평민을 부렸고, 전쟁이 나면 전국의 평민 남자, 즉 만 18세 이상, 신장이 약 150㎝ 이상의 건장한 남자를 도우언하여 전쟁에 임했다.
싹디나 제도에 따르면 태국인들은, 특히 평민은 누구나 상전을 섬기게 되어 있다. 평민은 왕이나 왕족, 또는 관료를 상전으로 모시고, 매년 일정기간씩(처음에는 6개월이었으나 아유타야 왕국 말기에는 4개월, 짝끄리 왕조 초기에는 3개월로 단축됨) 상전을 위하여 경작하고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등 봉사하고 부역을 하여야 했다. 상전들은 사법권이 없는 평민을 대신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러한 상전과 평민관의 관계를 흔히 후견인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라고 하고 있다. 이 후견인 관계는 태국인의 의식속에 자리잡아 아직도 인간 관계를 비롯한 생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사회는 1932년 6월 24일에 입헌혁명이 일어나가 전까지 잘 유지되어, 공적인 면에서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엄격히 강조되는 사회였지만 사적인 인간 관계는 극히 개인적이며 자유롭고 평화롭고도 낙천적이었다. 왕실 및 고위 관료사회를 중심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도입되고 독립유지를 위한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평민의 부역제가 폐지되고 노예도 해방되었으며, 대신 서양식 신식 군대가 창설되었다.
태국사회에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이미 100년에 이르고 있으나 약 700년간 지속되면서 태국인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태국인의 속성-매사에 겸손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아는 것, ㅈ부모에게 효도하고 은인에게 보답하는 것, 늘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관료 및 윗사람에 대한 순종,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관대함과 온후함-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며, 비록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인 왕에 대한 존경과 신뢰도는 변함이 없다. 왕을 중심으로 태국인은 단겨로디어 있다.
3. 불교사회
1990년도 태국교육부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전 태국 국민의 약 95.4%가 상좌부불교(Theravada Budhism, 남방불교, 소승불교)를 신봉하며,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3.7%)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태국인들은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종교-크게 불교나 이슬람교-와 분리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태국인의 불교는 생활불교이다. 불교도인 태국인들은 절에 가서 정기적으로 공양을 바치고 참배하기보다는 집집마다 불단을 만들어 두고 조석으로 기도하고, 새벽마다 탁발나온 승려가 들고 있는 바루에 승려 일인당 한 끼니분의 음식을 보시한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은 무슬림대로 자신의 종교의식을 행하며 종교생활을 한다.
13세기 말 람캄행 왕에 의해 도입되고 비호받으며 전파된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는 태국인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뿌리와 같은 존재로 약 700여 년간 태국인으로 하여금 태국적인 생활, 생각,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태국인의 의식은 윤회와 업보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낳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낳는다"라는 의식을 굳게 믿는다. 특히 학과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당사자가 아니면 후손이 받는다고 믿어 공덕쌓는 일에 정성을 다 한다. 아침마다 탁발나온 승려에게 음식을 바치거나 절의 사업, 예를 들어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원을 수리하거나 승려의 여행, 승려에게 일용품을 지원하는 일 등등은 "탐분(meke merit)"의 일환에서 이루어지고 행해진다.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이나 동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자비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여긴다.
람캄행 왕 때부터 태국인들은 올바른 불자로서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리와 수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훈련받았다. 그러므로 어려운 교리를 이해하고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승려의 일이며, 국민들은 살생을 가려 행하고, 탐심없는 마음으로 선을 쌓으며, 부정한 행위를 삼가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이나 마약 등 정신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하라는 5계를 기본적으로 지키도록 교육받는다.
옛부터 사원은 태국인에게 있어 생활의 중심지이며, 승려는 생활의 스승이자 안내자였다. 그러므로 사원은 학교, 병원, 재판소, 오락장, 놀이터, 여행객을 위한 여관, 복지관, 집회장, 박물관, 양로원, 고아원, 창고, 장례식장 등의 기능을 하며, 승려는 종교적인 역할외에 스승, 상담자, 신문물 전달자, 재판관, 의료인, 정부와 국민과의 가교 역할 등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은 시골일수록 강하다. 한마디로 불교와 사원, 승려는 태국 사회의 보수성과 일체감의 상징이며, 정신적 총체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