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전명운
경기랑
0
1464
2012.05.12 07:28
일본이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공언하더니 끝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약탈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없애려 하였고 자유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가지고 대한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는데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천조하며 우리의 조국을 배반하는 일을 했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했다.
-선생이 미국 법정에서 밝힌 의거의 변(辯) 중에서
어려서 부모 잃고 어렵게 자랐으나 스무 살에 홀로 돈을 모아 미국 유학에 나서
전명운(田明雲, 1884.6.25~1947.11.18) 선생은 1884년 6월 25일 서울 종현(鐘峴,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아버지 전성근(田聖根)과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의 13남매 가운데 7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죽암(竹嵒)이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선생은 조실부모하여 맏형인 명선(明善)의 밑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용감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고 한다. 특히 종로 부근의 형님 댁 점포 일을 돌봐주던 선생은, 1898년 10월 종로 네거리에서 개최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참관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와 근대적 민권 확대를 위해 정부 대신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 민중대회를 보면서, 선생은 신학문 수용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은 관립 한성학교(漢城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 두 해의 수업 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선생은 의거 직후 법정에서, “미국에서 학업을 닦아 가지고 조국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고 밝혔듯이 선진 강대국의 신문물
을 수용하여 조국의 자주화와 근대화에 기여하려고 도미 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3년 1월 도미 유학 길에 올라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같은 해 9월 18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4년 9월 23일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SanFrancisco : 桑港)로 이주하였다.
학비 벌려고 공사장과 어장에서 막노동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
미국 본토에 와서도 선생은 학비와 자립자금을 모으려고 학업을 잠시 미루고 철도 공사장과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남달리 애국심과 동포애가 깊었던 선생은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5년 4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청년회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조국이 준(準)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선생은 각종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면서 강력한 국권회복운동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21일,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 한국인명 須知分(순지분)]가 일제의 밀령에 따라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스티븐스는 1873년 대학 은사인 빙햄(Bingham)이 주일 공사로 부임할 때, 그를 따라 도일하여 10년 동안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친일파가 된 자였다. 이 시기 스티븐스는 주재국 일본정부에 유리하도록 외교 사무를 처리하여 일제 고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 결과 스티븐스는 1882년 주미 일본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에서 일본의 국익을 실현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스티븐스는 1884년 10월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사후 처리 문제로 일본 외무경(日本外務卿) 정상형(井上馨)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그를 따라 방한하여 정치․군사적 강경책을 행사하도록 사주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램 스티븐스. 한국 식민지화에 기여하여 여섯 번 일본 훈장을 받은 사람
특히 러일전쟁 중인 1904년 8월 22일 일제가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자행하게 되자, 스티븐스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외교고문(外交顧問)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과 1907년 7월 ‘정미7조약’ 등 한국 식민지화 조약을 체결케 하는데 공헌하는 등 일본인보다 더 일제의 침략 정책을 잘 수행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욱일장(旭日章) 등 여섯 차례에 걸친 훈장과 표창을 수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보상금도 제공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1906년부터 일본인 노동자 배척, 일본인 학생의 공립학교 취학 거부 등 반일운동이 점증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양국 관계는 미일전쟁설(美日戰爭說)이 유럽까지 유포될 정도의 악화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에서는 1907년 11월 <일본인 이민 금지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에서는 미국내 반일감정을 무마시키고, 나아가 일본인 이민 금지법안의 통과를 무산시킬 목적의 일환으로 스티븐스를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그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통감정치를 선전케 하는 한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가던 재미 한인동포들의 항일 민족운동을 저지․방해케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특히 그 이면(裏面)에는 일본이 만주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러시아와의 비밀협약을 추진하면서, 스티븐스를 통해 미국의 사전 양해를 구하려는 극비 임무도 있었다.
스티븐스 “한국 농민과 백성은 예전 정부에서처럼 학대를 받지 않으므로 일인들을 환영한다.”
이 같은 목적을 갖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francisco Chronicles)> 등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망언을 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예전 정부의 학대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인들을 환영한다.”
스티븐스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등박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큰 행복.”
이러한 친일 망언이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보도되자,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는 곧바로 공립협회 회관인 공립관(共立館)에서 양회 합동으로 공동회(共同會)를 개최하였다. 이 공동회에서는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항의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공립협회의 최정익(崔正益)․정재관(鄭在寬), 대동보국회의 문양목(文讓穆)․이학현(李學鉉) 등 4인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페어몬트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신문에 보도된 망언에 대한 해명과 정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부하고 “한국에 이완용(李完用)같은 충신과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오 동양에 대행(大幸)이라”고 하면서, “태황제(太皇帝 : 高宗)는 실덕(失德)이 태심(太甚)하고 수구당은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백성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즉 일본에게 강탈하지 아니하면 러시아에게 빼앗겼을 것”이라고까지 극언하였다. 이에 격분한 항의 대표단은 스티븐스를 집단 구타한 뒤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공동회에 보고하자, 재미 한인동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던 전명운, 장인환 같은 시간에 스티븐스를 총격
전명운 선생은 이 때 개인적으로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항의하고자 하였으나 면회를 거절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이 공동회에 참석하였다. 선생 또한 민족적 모욕감과 울분을 삭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한국 민족이 일제의 통감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작정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드디어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선생은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 루즈벨트를 만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려고 오클랜드 부두 페리(Ferry) 정거장에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小池張造)와 함께 나타난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불발되었으므로 선생은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권총으로 그를 내리치며 격투를 벌였다. 이 때 스티븐스를 저격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동보국회 회원인 장인환(張仁煥)이 세 발의 총탄을 관통하였고, 다른 한 발은 선생의 어깨를 관통함에 따라 두 사람은 동시에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스티븐스는 결국 총탄 세례를 받은 지 이틀 후인 3월 25일 사망하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선생은 병상에 누워서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 같은 선생과 장인환의 의거 사실이 알려지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는 그날 밤 제2차 공동회를 개최하여 양(兩) 의사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재미 한인동포들은 이를 중심으로 후원경비 조달․변호사 선임․통역선발 등 재판 지원 활동을 펴는 한편, 양 의사의 법정투쟁을 통해 일제 침략의 실상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공립협회는 스티븐스를 ‘공리(公理)의 적’, 일본을 ‘자유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장․전 양씨가 스티븐스를 포격함은 곧 자유전쟁이라”고 하여 양 의사의 의거를 민족의 자유 쟁취를 위한 전쟁, 즉 ‘독립전쟁’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공립협회는 스티븐스 처단 사건의 재판 과정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공립협회는 두 의사의 구원에 총력을 경주하여 갔다. “한국 독립은 곧 금일이오. 한국의 자유는 곧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오, 우리의 억울한 것을 재판하는 날이니 우리가 각각 정성을 기울여 독립을 위하여 재판하기를 힘써야 될지니 이 재판은 세계에 공개 재판이오, 이 재판은 우리의 독립 재판이니 우리가 이 재판을 이겨야 우리 이천만의 독립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신문들 양심적으로 보도.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적((公敵).’ 대다수 미국인들도 반일에 공감
한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를 비롯한 미국의 신문들도 일제히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적(公敵)이라’는 제목 아래 선생과 장인환의 친일 미국인의 처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인류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대다수 미국인들도 이 사건에 동정을 표하였으며, 미국 본토와 하와이는 물론 멕시코․중국․일본ㆍ노령의 동포들로부터도 많은 성원이 답지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대한매일신보’가 1908년 3월 25일부터 4월 17일까지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두 의사의 옥중 인터뷰까지 게재하여 국방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기에 노력하였다.
일제, 선생에게 사형 선고 내려지기를 공작했으나 미국 법정은 무죄 석방시켜
1908년 4월 3일 선생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처음으로 법정에 출두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의거의 소신을 밝혔다.
일본이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공언하더니 끝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약탈하였다. 부녀자들을 강간하며 재정을 말리우고 고관직을 차지했고 헌병과 순검이 경향에 가득하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없애려 하였고 자유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가지고 대한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는데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찬조하며 우리의 조국을 배반하는 일을 했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탐지한즉, 오늘 상항(桑港)을 떠난다고 하기에 육혈포와 그 놈의 사진을 가지고 선창에서 기다렸다. 마침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나가지 않으므로 턱 밑을 냅다 때리고 상황이 급박하여 도망을 가려고 한 것이다. 그 때 뒤에서 총소리가 났으며 나는 전에는 장인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탐지한즉, 오늘 상항(桑港)을 떠난다고 하기에 육혈포와 그 놈의 사진을 가지고 선창에서 기다렸다. 마침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나가지 않으므로 턱 밑을 냅다 때리고 상황이 급박하여 도망을 가려고 한 것이다. 그 때 뒤에서 총소리가 났으며 나는 전에는 장인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선생의 이와 같은 애국심에 불타는 당당한 의거의 변(辯)은 배심원들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일제가 선생을 사형 또는 무기 징역을 받도록 책동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08년 6월 28일 사건발생 97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안중근 의사, 전명운 선생과 연해주에서 만난 후 반년쯤 뒤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후 선생은 재미 일본인들에 의한 위해(危害) 가능성을 고려하여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한 뒤, “장인환 의사의 재판이 진행 중에 미국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1908년 12월 노령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장인환 의사는 재판 결과 노역 없는 25년 금고형을 선고 받았으나 수감 중 애국심 등을 인정 받아 10년 만에 출감했다.) 연해주에서 전명운 선생은 1909년 봄 안중근(安重根)과 만나 국권회복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후, 의기 상통하여 그가 조직한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따라서 같은 해 10월 26일에 결행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도 선생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909년 7월 연해주에서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선생은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대한인국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3․1운동 직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1927년 7월 부인 조(趙) 여사가 병사하자, 선생은 이듬해 슬하의 1남 2녀를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선생은 생계가 어려워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민족운동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조국 독립의 저변을 넓혀 갔다. 특히 매년 3․1절이 되면 선생은 재미 동포 사회에서 개최하는 강연회의 초청 강사로 참석하여 항일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등 민족 독립운동의 열정을 불태웠다.
1945년 8월 15일 선생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귀국하지 못하고 1947년 11월 18일 이국의 땅 미국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의 캘버리(Calvary) 천주교 묘지에 묻혀 있다가 1994년 4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