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의 황금시대가 있엇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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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무

자유무역의 황금시대가 있엇는가

나라라 0 910

1929년의 대붕괴와 1930년대의 공황의 원인으로서의 보호주의라는 신화는 우리를 상업 정책에 대한 장기적 역사에 관한 더욱 일반적이고 더욱 중요한 신화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이 오류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는 거의 도그마이고 다음과 같은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자유 무역이 대세이고 보호 무역은 예외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보호무역이 결별한 자유무역의 황금시대에 대해 얼마나 자주 얘기를 들었던가? 나는 “자유 무역의 사원”인 GATT에서 거의 3년간을 보낸 결과 이 신화에 대해 민감하게 되었다. 사실은 역사적으로 자유 무역은 예외이고 보호 무역이 대세이다. 이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교역 정책의 역사를 살펴보자.

1815: 몇 개의 자유(무역) 섬들을 둘러싼 보호무역이라는 대양

19세기를 역사적으로 조망해보자.16세기와 17세기는 중상주의의 황금시대였다. 귀금속이 국부와 국력에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금광이나 은광이 없는 국가는 수입보다 수출을 더 많이 하기 위해 무역을 규제했다. 더구나 식민지는 수출을 위한 보호된 시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사실상 , 유명한 중상주의자인 Thomas Mun의 책의 제목이 이 광범위하게 퍼진 이론을 잘 요약해준다: 외국 무역에 의한 영국의 보물(1664).

18세기는 일반적으로 이행의 시대로 보고 있다. 18세기의 전반기의 무역 정책은 여전히 중상주의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1760년 이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중농주의 학파들, 다음으로 아담 스미스의 이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1786년의 영불 무역 협정과 함께 자유방임 경제학의 필수요소인 상업 자유주의가 유럽 전역에서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두 강국사이의 무역에서 확립되었다. 그러나 1786년의 협정에 대한 희망이 현실화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전쟁 때문에 18세기는 보호무역주의로 회귀로 끝났다.

1790-1815 사이의 전쟁들 그리고 특히 1806년에 시작된 영국에 의한 프랑스의 봉쇄가 유럽 정부들의 상업정책에 있어서 보호무역주의 추세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경제 사상에 관한한 자유주의는 전진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제4권은 본질적으로 국제적 수준에서의 자유무역의 옹호이다. 1776년에 출간된 아담 스미스의 책은 18세기 말에 경제학의 지도적 저작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1800년 이전에 8판이 나왔고, 1796년 이전에 거의 모든 유럽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직간접적 후계자들은 , 사실상 이것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게는 근대 경제학의 기초자들(founding fathers)들을 의미한다, 국제 무역에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이런 유럽에서의 자유주의적 경제사상의 우위가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주의를 제거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보호무역주의가 나타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보호무역주의는 19세기 초의 점증하는 민족주의에 관계가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혁명에서 나오는 경제발전의 과정과 영국 산업의 전진에 대한 깨우침의 결과였다. Friedrich List의 유명한 책 , 정치 경제의 국가 체제는 1841년에야 나왔는데, 그러나 그 이전에 미국인 Alexander Hamilton(1791), 독일인 Adam Miller(1809), 프랑스인 Jean-Antoine Chaptal(1819)와 Charles Dupin(1827)의 친 보호주의 저작들이 나왔다. 그러나 List는 1810년대에 이미 독일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보호무역 이론의 주요한 국제적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List에 있어서 (그리고 보호무역주의 학파의 주류에 있어서) 보호무역주의는 그 자체에 있어서 목표가 아니라, 나라가 산업화를 통한 강한 경제를 건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일시적 정책이다. 그래서 다음의 주요 논점이 나온다.: 이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다른 성숙한 외국 산업들과의 경쟁에 의해 압도되지 않고 산업화를 해야 된다. 그러므로 각 나라의 특수한 사정이 고려되어야 하고 특히 발전정도가 고려되어야 한다. 비록 이 보호적 단계가 부정적 결과들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산업화 학습 비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나중에 “유아 산업(infant industries)” 논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List에 있어서 일단 산업들이 국제 경쟁에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하면 자유 무역이 대세가 되어야 한다. 그는 더군다나 산업화는 온대지역에서만 가능하고 열대지역 나라들은 그들이 자연 독점을 하고 있는 1차 재화에 집중해야 된다고 확신했다.

유럽에서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무역 자유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반대는 보호무역주의 이론들에서가 아니라 ,광범위한 경제의 상이한 부문들의 대표들에게서 나왔는데, 그들은 무역 자유화가 자신들에게 해롭다고 생각했다.

1815-46:영국은 자유주의로 , 그러나 1842전까지는 아니고 다른 지역은 한데가 없다.

실제에 있어서, 1815-25년대의 유럽제국의 무역 정책은 몇 개의 자유무역의 섬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무역의 대양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영국에서, 자유무역의 지지자들과 보호무역 찬성자들의 정치적 투쟁은 다소간 1815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날 때에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국내 농업을 외국 곡물의 수입에 대하여 보호하려는 목적인 새로운 곡물법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였다. 곡물법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관세 역사에 있어서 거의 항상적인 양상이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들은 국내농업을 보호하는 동시에 빵 값이 너무 가파르게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취하려고 하였다. 영국에서 이런 종류의 최초의 국가법은 143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의 곡물법은 밀의 가격이 국내 시장에서 1 쿼터 당 80실링 오를 때 까지 밀의 수입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음식물 가격이 따라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조업자들은 반겨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저임금과 기계화(특히 방적기)의 결합을 통해서 수출을 더욱 더 확장하려고 했다. 이 법이 경제 생황에서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농업의 이익과 경제 활동에서 주요 부문이 되어 가고 있는 제조업의 이익과의 갈등의 시작을 나타내었다.19세기에 이 두 부문 사이의 힘의 균형과 그들의 이익이 수렴하는 정도가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의 관세 정책의 변화를 결정하게 되었다. 곡물법은 1846년이 되서야 폐지되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자유주의가 약간의 진전을 이루었다.1825년에는 외국과의 경쟁을 두려워해서 제정된 1719년 이래로 금지되었던 숙련 노동자들의 이민을 의회가 허가했다. 다른 한편, 기계류의 수출 금지를 제거하려는 몇몇 기술자들의 노력은 비성공적이었다. 1833년에는 수입 관세가 몇 개 인하되었다.

이 기간동안에는 영국 산업은 라이벌 산업들에 대한 주도권을 증가시키고 있었는데, 기존의 주도권이 이미 상당했었다. 유럽 인구의 8=10%를 차지하는 영국이 1800년에 유럽의 모든 선철의 29%였는데 1830년에 45%까지 올랐다. 더욱 중요한 것은 1830년에는 1인당 산업 생산 수준이 나머지 모든 유럽과 비교해서 250%나 초과했다는 것이다. 1800년에는 110%

초과했었다. 이것들로부터 산업가들과 그 지지자들이 좀더 효과적인 자유무역 체제를 확립하려고 한 노력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자유 무역에 대한 장애는 여전히 농업에 대한 상당한 보호였다. 이것이 높은 식료품 가격과 따라서 낮은 실질 임금으로 귀결되므로 제조업자들 특히 면 산업 제조업자들은 노동자들의 빈곤을 써서 곡물법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자유 무역 론 자들은 또한 농산물 잉여인 나라에서 농산물 수입을 축소함으로써 곡물법은 영국의 제조품을 그들 나라에 수출하는 기회를 감소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

1842년에 중요한 조치가 취해졌다. robert Peel 수상이 수입관세를 상당히 축소한 자유적 관세 개혁안을 도입했고, 더 중요한 것은 ,1774년부터 시행 되어 오던 기계류에 대한 수출 금지를 완전히 철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곡물관세에 대한 약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곡물법에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다. 한 마디로, 완전한 자유 무역 체제에 대한 주요 장애는 약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1845년 여름과 가을의 긴 우기와 아일랜드 고구마 파동 때문에 1846년 5월 15일에 곡물법이 폐지되었다. Morley가 Cobden의 생애에서 썼듯이 “곡물법을 씻어 간 것은 비였다.” 1846,5,15는 정당하게도 자유 무역의 시작을 긋는 날로서 생각되고 있는데 , 역사적 우연의 일치로서 그 해에 병들고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한 보호 무역주의의 사도인 F.List가 자살한 해이다(11월).

날씨가 곡물법의 폐지의 즉각적인 원인이었지만 어차피 불가피한 추세를 가속화 했을 뿐이다. 1810년경에 영국에서 농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두 번째 부문보다 70%나 많았지만 1840년경에는 제조업이 농업을 60%나 앞질렀다. 그러나 1846년은 산업 혁명이 시작된 지 1세기 반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동시에 영국은 자신이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부터 자유 무역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은 자신의 경제적 후진성을 의식하게 되었고 공격적이기 보다는 방어적인 새로운 형태의 중상주의- 한마디로 1840년 이후로 보호무역주의라고 불린 것- 를 통해 따라잡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전체 부의 가장 큰 몫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 빨리 도달해야 될 발전 수준-케이크의 큰 부분이 아니라 더 큰 케이크-이라는 용어로 논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1846-60:영국 자유주의가 대륙에 미친 이론적 영향

자유주의가 영국에서 더 강고해지고 있었지만, 대륙에서는 자유 무역 프로퍼갠다에도 불구하고 보호무역주의가 유지되고 있었다. 영국이 경제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유 무역 지지자들에게는 커다란 이점이었다 : 가장 발전한 나라가 가장 자유주의적이 되었는데 , 이는 경제적 성공을 자유 무역 체제와 동일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인과관계는 그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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