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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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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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남아시아]란 명칭과 그 범위

오늘날 우리는 [동남아시아]란 명칭에 친숙해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지금의 동남아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1943년 실론 (현재의 스리랑카)에 연합군에 의한 [동남아시아사령부] (south-east asia command)가 설치되면서부터다. 이에 훨씬 앞서 1839년 미국인 목사가 쓴 여행기의 제목에 동남아시아(south-eastern asia)란 명칭이 사용되었지만, 당시의 동남아시아는 현재 동남아시아의 대륙부만을 의미하고 도서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남아시아란 명칭이 쓰이기 시작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 지역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웠는가? 유럽인들은 흔히 인도 저편의 지역이란 의미에서 영어로는 futher india, 프랑스어로는 l'inde ext rieure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아직 동남아시아를 전체로 파악하기보다는 자기 들의 식민통치지역에만 관심을 집중시켰고, 그 결과 [英領버마] [英領말라야] [프랑스領인도차이나] [네덜란드領인도] 등등의 명칭이 훨씬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중국인들은 이 지역을 [南洋]이라고 불렀다. 宋代까지는 南海라는 이름이 일반적이었으나, 元代부터 淸 중기까지는 동남아시아를 두지역으로 나누어 필리핀과 보르네오 등은 東洋, 베트남을 비롯한 그 서쪽 지역은 西洋이라고 하였다. 18세기 중반에는 상기한 東洋을 東南洋, 西洋을 南洋이라고 하다가, 일본인들이 명치유신 이후 아시아를 東洋, 유럽을 西洋으로 호칭함에 따라 南洋은 동남아시아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범위에는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부르나이, 필리핀 등 10개국이 열거되고 있다. 이는 동남아시 아사령부의 작전관할지역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령부의 작전관할지역에는 실론이 포함된 대신 필리핀과 베트남 북부지역은 제외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상기 10개국이 동남아시아로 통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대전이 끝나고도 한참 후인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 사이 문제가 되었던 지역은 필리핀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여타 국가들이 인도 및 중국과 접촉하면서 역사를 전개시켰던데 비해, 필리핀은 16세기까지 외부세계와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 스페인이 등장하면서 그 식민지로 전락되고 그 때문에 필리핀은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는 오히려 멕시코쪽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동남아시아사 연구의 거장인 故 홀(d. g. e. hall)교수가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동남아시아史} 초판(1955년)에서 필리핀을 제외시켰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4년의 개정판에서는 필리핀을 포함시키고 있듯이, 이 시기에 이르면 동남아시아의 지역범위는 거의 지금과 같은 정착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인류학자들 사이에는 동남아시아의 범위설정에 정치적 경계가 중심이 되는데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국경이 아니라 문화적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스리랑카, 인도의 아쌈지방, 안다만 열도, 중국의 운남성, 대만 등도 동남아시아와 문화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동남아시아의 연장선 상에서 이들 지역에 관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2. 민족과 언어

동남아시아는 흔히 [인종의 도가니]니 [인류학자들의 천국]이니 하는 식으로 불리우듯이 수많은 인종이 뒤섞여 사는 다인종사회다. 이런 다인종사회가 갖는 여러가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인 문제들은, 어려서부터 단일민족이란 말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동남아시아 각국에는 한 나라 안에 잡다한 인종이 공존할 뿐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여 동일한 종족이 각지에 산재하여 있기도 하다. 예컨대, 타이족은 타이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이름을 달리하며 버마 북부(shan族), 라오스(lao族), 중국의 운남성 (壯族) 등지에 퍼져 있다.

동남아시아의 인종은 크게 오스트로네시아族과 오스트로아시아族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말레이시아를 포함)에 압도적으로 많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남부 산간지대에 살고 있는 참족(chams)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오스트로네시아族이라고 하더라도 분파가 많아 인도네시아에서만도 자바인, 순다인, 아쩨인 등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인도네시아가 [다양성 속의 통일]을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스트로아시아族은 대륙부에 거주하고 있는데, 주요 종족으로는 몬-크메르인, 티베토-버마인, 타이계의 여러 민족을 들 수 있다. 베트남인은 몬-크메르系로 분류된다. 이들 인종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해 들어오는 시기는 각각 다른데, 오스트로네시아族은 기원 수세기 전에 중국의 남부로부터 온 것으로 믿어진다. 오스트로아시아族은 기원을 전후하여 중국의 서남부로부터 남하하기 시작하지만, 타이系의 등장은 가장 뒤늦은 기원 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들 인종 외에 특별히 언급되어야 할 종족으로는 중국인과 인도인 이주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처음 서구식민지배시기에 농업노동자, 광산노동자 등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점차 상업과 고리대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오늘날은 동남아시아의 대도시에 거주하면서 각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이 동남아시아에 혼재함으로써 域內 국가들 간의 분쟁은 물론, 동일한 국가 내에서도 종족적, 이념적, 경제적, 지역적 갈등을 초래하여 정치의 불안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대표적 예를 들면, 버마의 경우 소수민족인 카렌族과 카친族이 각각 버마族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어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태국과 필리핀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이들이 종교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중앙권력에 대항하며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예를 본다. 냉전체제의 붕괴로 인해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이전에 이들 소수민족 중의 상당수는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이를 무기로 한 때문에 중앙정부를 적지않이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각국 내에서의 다수종족과 소수종족 간의 갈등은 앞으로도 쉽사리 종식되리 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3. 역사의 전개과정

각기 다른 정도의 전개과정을 거친 동남아시아 각국의 역사를 일괄하여 체계있게 서술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연구자들은 상이한 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도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시대구분하고 있다. 첫단계는 기원 전후로부터 13세기까지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흔히 고전시대로 불리운다. 둘째 시기는 14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로 전통시대라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마지막 셋째 단계는 19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로 근현대라고 일컫어진다.

고전시대의 특징은 외래의 중국문화와 인도문화가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기원 전 2세기 말 漢의 무력침략으로 시작된 중국의 베트남지배는 기원 후 10세기까지 천년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의 관리, 군대, 피난온 학자, 불승, 이주민 등에 의해 중국문화는 베트남에 지극히 완만하지만 지속적으로 흘러들어 왔다. 베트남이 독립한 이후에도 베트남 지배계층의 통치상 필요성에 의해 중국문화의 유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문화의 영향은 중국이 무력으로 지배하는 베트남에만 한정되고 여타 지역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필리핀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은 평화적으로 침투해 오는 인도문화를 받아들였다. 인도문화의 영향은 인도-동남아시아, 또는 인도-동남아시아-중국을 연결하는 해상무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중남부에서 인도문화를 수용하며 부남(扶南, funan)왕국이 등장하는 것은 초기 해상로가 말레이반도의 크라地峽(kra isthmus)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중부의 참파(占婆, champa)왕국이 인도문화의 영향하에 발전하는 것 역시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로의 중간에 위치한 결과였다.

5세기에 들어서면 동서항로는 조선기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말라카와 순다의 두 해협이 중요하게 되고, 그 결과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인 스리비자야가 등장하여 11세기까지 번영하였다. 한편 자바에서는 보로부두르 불교사원을 건조한 것으로 유명한 사일렌드라왕조가 8세기 중반부터 100년 간 강성하였으나 곧 힌두교系의 마타람에 의해 멸망되었다.

동서해상무역로로부터 소외된 캄보디아는 한 때 사일렌드라의 침입을 받아 쇠퇴의 길을 걷다가 9세기 초 농업을 기반으로 한 앙코르왕조가 다시 등장하면서 번영이 극에 달하였다. 이 때에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등의 위대한 건축물들이 만들어졌다.

13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시아역사는 전환기를 맞는다. 그 원인의 일부는 건축물의 지나친 건조로 인한 앙코르왕조의 쇠퇴 및 몽고의 침입에 있다. 몽고의 원정은 자바에 새로운 마자파히트왕조의 등장을 도와주었는가 하면, 버마에서는 이제까지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파간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버마의 재분열과 앙코르왕조의 쇠약은 타이족의 세력을 강성케 하여 이들은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 핵심세력을 이루고 오늘날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몽고의 침입을 받은 베트남의 경우 정권의 교체는 없었으나, 유교문화를 수용한 관료계층의 세력을 점진적으로 강화시켜 15세기 이후에는 유교가 베트남왕조들의 지배이념으로 되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캄보디아, 버마, 타이에서는 이제까지 지배계층 위주의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에 의해 대치되면서 새로운 종교는 피지배계층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갔다. 소승불교는 지금도 이들 국가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편 도서지방에서는 이보다 조금 늦게 이슬람교가 힌두교와 불교를 대신하여 각지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의 전파는 당시 동서무역의 중심지였던 말라카의 개종에 힘입은 바 크다. 말라카가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하면서 여기에 모여드는 말레이세계 곳곳의 상인들은 이슬람을 쉽사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동남아시아세계는 즉각적이지는 않았지만, 후일의 역사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에 접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유럽인들의 도래다. 향신료무역을 위해 등장한 이들 유럽인의 첨병은 포르투칼과 스페인이었다. 포르투칼은 1511년 말라카를 점령하고 유럽의 동방무역을 독점하면서 이후 100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스페인은 향신료무역에는 실패하였지만 필리핀을 식민화하고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600년대의 시작과 함계 네덜란드와 영국도 각각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동방무역에 뛰어들었다. 이중 네덜란드는 포르투칼과 영국을 배제하고 향신료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서구세력은 영토점령보다는 무역에 관심이 컸었기 때문에 그 거점확보에만 치중하여 18세기 말까지 그들의 영향은, 인도네시아의 일부지역과 필리핀을 제외하곤, 몇몇 항구도시와 그 주변지역에 국한되었었다. 만약 거점지역 외에 영토의 소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지 소국들의 왕위계승분쟁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개입하여 얻어진 것이었다. 이 경우에도 유럽인들은 지배계층을 통해 자기네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간접적으로 거둬 들이는 데서 그쳤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사회에 대한 그들의 영향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제한적이었던 서구의 영향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경쟁적으로 동남아시아 각지에 대한 영토분할이 진행되자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쟁탈전이 벌어지는 한가지 이유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값싼 원료의 구입과 생산된 제품의 판매를 위해 해외식민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각국이 식민지획득에 열을 올리자 이를 얻지 못하는 나라는 열강대열에서 뒤쳐진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영국은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프랑스는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를, 그리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각각 손에 넣었다. 미국은 미서전쟁의 결과로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이러한 분할에서 제외된 나라는 타이뿐이었다. 타이는 영국과 프랑스에 상당한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도 독립만은 유지하였다.

서구열강의 침략은 동남아시아에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커다란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라는 별개의 국가의 성립을 들 수 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 지역을 분할점령하기 전에 두 나라는 하나의 말레이세계였을 뿐이었는데 이제 별개의 국가가 된 것이다. 라오스도 지도상에 없던 나라였는데 프랑스가 세개의 小國을 합쳐 하나의 국가로 성립시킨 결과 생겨났다. 타이는 지역마다 강력한 분권세력이 존재했던 전근대적 국가에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변모하였다.

두번째 영향은 농촌사회의 변화다.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는가 하면, 새로 도입된 수출작물인 커피·사탕수수·차·담배 등을 강제로 재배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가 하면 상당수의 농민은 농업노동자로 변모하여 쌀·고무·코프라 등을 재배하는 외국인 경영의 대농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착취를 당하였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남아시아경제가 세계경제 속으로 편입되면서 1930년의 세계대공황기에는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식민당국은 신교육을 도입하고 신식관료를 훈련시켰는가 하면, 도로건설, 철도부설, 항만건설, 위생시설의 개선 등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동남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억압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식민지배에 저항하였다.맨처음 저항에 나선 이들은 전통적 교육을 받은 식자층이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하는 신식교육을 받은 새로운 지식층은 서구의 사상을 도입하여, 일부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또다른 일부는 공산주의의 이념으로 무장하고 식민통치에 항거하였다. 여하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으로 보였던 식민세력은 일본군에 의해 힘없이 무너졌다. 대전이 끝나자 식민세력은 재기를 시도하지만 동남아시아 각국은 이를 물리치고 차례차례 독립을 획득하였다. 독립한 각국은 잠시 전후의 냉전체제에 휩싸여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이제는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문화구조

동남아시아사회는 전술한 바와 같이, 언어와 습관을 달리하는 수많은 종족이 혼재하여 있는 데다, 지역과 국가에 따라 역사적 전개과정도 다양하기 때문에 그 문화적 양상도 대단히 복잡하다. 그러한 복잡성 속에서 거시적으로 보아 몇가지 공통적인 측면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은 4가지 문화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동남아시아사회가 중국과 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존재했던 기층문화다. 평야지대에서 수도경작을 하던 산간지방에서 화전경작을 하던 대다수 종족의 공통되는 현상은 농경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모계 내지 쌍계적 성격이 강하며, 종교면에서는 정령숭배의 전통이 뿌리 깊히 박혀 있다.

두번째는 외래문화, 다시 말해 중국문화와 인도문화의 요소다. 베트남에서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유교사상, 관료제도, 한자 등이 사회 각 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가 하면 여타 지역에서는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 왕권개념, 산스크리트 문자, 문학, 예술을 받아들였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뒷날 이슬람교가 들어와 이곳 사람들의 생활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래문화가 기층문화를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중국과 인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강한 가부장권은 동남아시아사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아울러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동남아시아사회에서는 중국이나 인도에서와는 달리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를 배척하지 않고 이를 같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힌두교가 자리잡자 불교는 인도에서 㠹겨났지만동남아시아 사회에서는 양자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유학자들은 중국에서 처럼 불교를 배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의식에 참가하는 예가 많았다.

세번째 들 수 있는 것은 식민지배하에서의 서구문화다. 영국지배하의 버마와 말레이시아에는 영국문화가, 프랑스지배하의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에는 프랑스문화가, 그리고 네덜란드지배하의 인도네시아에는 네덜란드문화가 각각 도입되었다. 필리핀은 처음 스페인지배하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되고, 미국지배하에서는 다시금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식민통치를 면한 타이에서도 서구문화의 요소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필리핀 인구의 80% 이상이 카톨릭교도인가 하면 싱가포르의 공용어가 영어이고, 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문자가 로마字化된 것 등은 이러한 식민문화의 유산이라고 하겠다.

끝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은 이른바 국민문화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독립한 이후 제각끔 상기한 여러가지 문화적 요소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시아어, 필리핀에서 타갈로그어의 장려가 국민문화의 창출을 위한 노력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가 교도민주주의를 주창한 것이라든가 버마의 정치지도자들이 불교사회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부인 것이다. 베트남이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민족주의적 요소를 부각시키려 애쓰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더우기 최근 싱가포르와 미국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笞刑에 대해, 싱가포르정부가 우리는 우리식의 법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태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것도 바로 동남아시아 국민문화의 일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다양한 문화는 서로 조화를 잘 이루면 국가와 지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오히려 상호 불신과 갈등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동남아시아 각국이 앞으로 이를 어떻게 지혜롭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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