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화교사회의 형성과 정착과정"-
오늘도 뉴스에서는 서울 화상대회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었다. 이것은 화교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된다. 화교들은 지금 세계 경제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의 거대한 존재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화교, 중국과 화교들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이야기 일 것이다. 지금도 중국은 화교를 중국인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많은 화교들은 자신은 중국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에 화교가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넓은 분포지역을 가지고 있는 화교들. 그 중에서 화교가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인 동남아지역에 화교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처음에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수 있는 곳을 찾아서 진출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기 위함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해 나간 것 이였기에 열심히 일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으며 가부장적인 유교관습과 가난과 기근 때문에 배삯 마련도 힘들고 험한 항로과정의 위험도 감안하여 남자 중심의 이동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초기 화인사회는 주로 남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자나 가족단위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 이였다. 이주자의 일부는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척하였지만, 그것은 부유한 상인들의 경우이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쿨리라는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부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그들이 거대한 부의 상징은 아니였음은 앞에서 언급한 약간의 글로써 추측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거대한 부를 축척하게된 것일까?? 또, 그들이 중국을 떠나 동남아 각지에 정착하여 살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다른 민족과 문화 사이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 왔는지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Ⅱ. 화교의 역사와 형성과정
1. 화교의 정의
華僑(화교)란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 사회적, 법률적, 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이란 타이완(臺灣-대만)과 중국의 국적을 가진 자를 모두 포함하는데 주로 타이완 문화와 경제홯동에 연관을 가지는 한민족계(한민족계)를 가리킨다. 또 본국과 연관이라는 말은 개인으로서의 직접적인 연관에만 한계되는 것이 아니고 이주민의 가족이나 자손이 현지에서 동향단체를 통하여 연관성을 지속하고 있음을 뜻한다.
華人(화인)은 선대가 중국인이지만 거주지의 국적을 취득하여 거주지의 경제활동과 문화에 동화되어가면서 적응하고 있는 중국인 2세대 또는 3세대들. 이들은 중국 국적을 상실하였지만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혈연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華人(화인) 이라 불리움. 화인은 세계 100여개의 국가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에서 약 80% 정도가 아시아 지역의 특히, 동남아시아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도 중국대륙의 정세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華僑(화교)의 이주가 손쉬운 편이다.
엄밀히 말하면 華僑(화교)와 華人(화인)은 구별되지만. 우리는 이들을 모두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통칭하여 華僑(화교)라고 칭하고 있다.
2.화교진출의 역사
춘추전국시대의 군주들과 관료들은 재산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일반 상인들에게 뇌물이나 상납금을 바치도록 요구하였으며, 상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부를 추구했고, 관료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권력을 추구했다. 상인들의 과거의 황금빛 시절이 끝나면서 조정과 관료들은 뇌물을 준 상인들(또는 뇌물 바치기를 거부했던 상인들) 모두를 배신하여,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모두 양쯔 강 이남의 미개지로 유배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양쯔 강 이남의 월 나라 땅에서는 또 다른 중국이 태동하게 된다. 그리고 슬기롭고 현명한 이들 추방자들은 유배지에서 출발하여 해외로 나아가는 모험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화교가 탄생하게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진나라 때, 시황제는 자신이 정복한 강남지방, 즉 초 오 월나라 지역을 철저히 식민지화할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북방에 살고 있는 천민과 조수, 상인들을 그들의 가족과 함께 강남지방으로 대규모 강제이주 시키는 것 이였다. 특히 강북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차출하여 오늘날의 저장 성, 복건 성, 광동 성 지방으로 이주시켜 강북지방을 완전히 정화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저인망과도 같은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던 상인은 거의 없었다. 아래로부터는 소상인에서 위로는 거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인들이 검거되어 짐마차로 이송됐다. 오늘날 중국 남부 연해지방을 따라서 상업적 수완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은 시황제의 이러한 강제이주 정책의 결과이다. 이 지역이 해외거주 중국인, 즉 화교들의 본거지가 된 것도 이러한 이주정책의 영향이 크다.
9 13세기 당(唐)나라 말기에서 송(宋)나라에 걸친 북방민족 침입으로 화남(華南) 방면으로 이동해 간 한민족의 해외유출이 그 초기적 존재이다. 송 정부가 남양무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11세기 이후 본격적인 해외 유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송 원(元)시대 해외무역 발전과 원나라에서 명(明)나라 중기에 걸친 아시아원정으로 남방으로의 이주가 촉진되었으며, 16세기 명나라 말기 이후 제한적이었던 관허무역이 민간에게 개방되어 남양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동남아 일대로 이주가 확산되었다. 그 뒤 17세기에는 청(淸)나라의 압박으로 인한 명나라 관계자의 남천(南遷) 및 해외도항금지정책으로 인한 생활난과 무역 이윤을 위한 집단적 피난이 일어나 근대 이전 화교사회 형성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식민지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으로서 쿨리[苦力(고력)]무역에 의한 해외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는 청나라의 정치적 부패와 그에 따른 경제적 피폐,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강국의 동양진출, 아편전쟁을 전후한 열강의 중국침략 등이 계기가 되었다.
3.동남아 화교사회의 형성
오늘날 동남아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고있는 화교의 역사는 남중국해로 연결되어 있는 중국과 동남아 간의 접촉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중국인 들이 배를 타고 동남아 지역으로 들어온 것은 늦어도 기원전 3세기에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북부 베트남의 통킹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고, 다른 동남아 지역에서의 활동은 상당히 늦게 나타나는데, 8세기에서 10세기까지 아랍 및 페르시아 상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국과 동남아간의 무역에서도 중국 상인들은 소극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동남아 진출은 송(宋)나라가 남양(南洋)무역을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던 시기로 11세기 정도로 추측된다. 송(宋)왕조의 무역정책은 남양(南洋)무역을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중요시 하고 있던 원(元)정부에 의하여 답습되었고, 13세기 이후 중국의 동남아 무역이 번성함에 따라 동남아로 진출하는 중국 상인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다.
중국인들이 동남아에 많이 정착하게 된 계기는 14세기 중엽 명(明)왕조가 동남아와의 무역관계를 조공무역에만 국한시키고 일체의 사무역을 금하는 해금(海禁)정책을 취하면서, 동남아에서 활동하던 중국인들이 중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동남아에 정착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명(明)정부의 해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16세기 중엽까지 중국과 동남아 간의 접촉이 극도로 줄었다. 중국인 유입이 없던 이 기간동안 동남아에서 활동하던 화상(華商)들의 대부분이 토착사회로 동화되었다.
16세기말 명 정부가 중국의 해외무역을 부활시켜 국가 수입을 증대시키고자 하였고, 이로인해 중국 상인들의 남양(南洋) 진출이 크게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인들의 동남아 진출에 따른 새로운 변화에 부응한 것이라 여겨진다.
17세기초 동남아 시장에 뛰어든 유럽인들은 중개인으로써 중국인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중국인의 숫자가 더욱 증가하였다. 그 후 중국의 혼란으로 동남아 지역으로 피난오거나 망명하는 중국인이 증대되었고, 동남아로 이주하는 중국인의 수는 계속하여 증가하였다.
Ⅲ.동남아 각국의 화교 사회
1.싱가포르
싱가포르는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화인이 다수민(싱가포르 인구의 77%)인 동시에 300만 명의 화인이 한 도시에 밀집해 거주하는 사회이다. 화인이 싱가포르 자본시장의 81%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남아 화인으로는 유일하게 주도적인 입장에서 정치적 권력도 행사한다. 영국이 식민전초지로 선택한 한 작은 섬에 다양한 민족이 이주하여 형성한 사회인 싱가포르는 이 지역의 토착민인 말레이와 이민 집단(특히 화인)으로 구성된 사회를 영국이 통치하는 독특한 정치구조 하에 놓여 있었으며, 다양한 종족집단의 정체성과 지위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싱가포르섬과 54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최남단에 남중국해와 인도양의 연결 지점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자체가 화인, 말레이인, 인도인의 집합지로 부상하기에 적합했다. 싱가포르가 영국령이된 1819년부터 20세기 초엽까지 화인의 인구비율은 계속하여 증가 하였고 각 종족별 구성비는 20세기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1842년 체결된 남경조약으로 중국문호가 개방되었고 중국인의 해외이주도 법적으로 가능하여졌다. 1848년-1865년간 태평천국의 난은 남중국 지역에 경제적인 궁핍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여 중국인의 해외이주를 촉발하였고 이로 인한 중국인의 대규모 이주는 싱가포르 인구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러나 싱가포르 화인 사회도 다른 동남아 국가의 화교 사회와 마찬가지로 남녀의 성비가 매우 불균형하였다. 이러한 성비 불균형은 1933년 외국인 법이 제정되어 화인 남성 이민자의 월별 입국 할당량이 규정되는 한편, 화인 여성 이민자의 수는 제한하지 않는 등의 식민정부의 노력으로 성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성비 변화로 싱가포르 화인사회에서 가족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이는 자연증가에 의한 화인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1947년 화인인구의 56%가 현지 출생이였고, 1965년까지 증가된 인구의 85.5%가 자연증가에 의한 것 이였고, 나머지 14.5%만이 이민에 의해 증가한 것 이였다.
1965년 싱가포르 독립정부의 다문화정책은 화인과 말레이인 그리고 인도인의 고유문화 보존을 가능하게 하였고, 싱가포르 화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다양한 조직- 방회, 동향회, 종친회, 상회, 학교, 종교단체 등- 을 통하여 보존하여 왔다. 이러한 교유문화 보존은 화인으로서의 종족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싱가포르 인이라는 통합적인 국민적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작은 어촌 마을이였던 싱가포르는 1819년 동인도회사의 관료였던 래플즈가 조호르의 술탄 압둘 라만에게 매년 5000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영국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이 협상이 체결된 이후에도 싱가포르를 장악하는데 5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영국은 싱가포르를 차지하며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증진과 동남아의 '자유무역'을 위한 중계무역항을 설치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목적을 모두 달성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가 영국의 공산품과 동남아 산물의 집하장이 되면서 중국인들의 생산자와 중개자로서의 역할이 증대하였다.
화인의 싱가포르로의 이주는 중국 본토로 뿐만 아니라. 동남아의 리아우(Riau),말라까, 빼낭, 방콕, 마닐라, 바타비아 등의 지역에 이미 정착해 잇던 상인, 농부, 광부들이 재이주하는 경우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선호하는 화인들에게 싱가포르는 지리적으로 불편하고 관세 및 규제가 많은 빼낭보다 유리한 지역으로 인식되었고, 말레이 여인과 결혼하여 정착해 온 중국계 바바들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싱가포르 화인은 복건인, 조주인, 광동인, 객가인의 4개 방언집단에 속하는 화인 이민자와 해협식민지 출생의 화인, 즉 해협화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부터 그 수가 월등히 많았던 복건인은 상업 분야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다음으로 큰 집단에 속하는 조주인이 농업과 농업관련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새로 이주온 화인 집단과 구별되는 말라까 바바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오래전부터 말라까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말라이어를 구사할 수 있고, 말레이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 지역 토착민과 유럽 상인간의 거래를 중개하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자유무역항으로서 싱가포르를 상업 중심지로 만드는데 화인의 역할을 중요시 여긴 래플즈는 화인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그들의 거주지를 상업지구 근처로 배정하였다. 이러한 화인 우호정책은 싱가포르 화인 인구의 증가에 기여했으며, 싱가포르는 화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1826년 공식적인 까삐딴 제도가 사라지고, 1877년 화인호민관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식민정부와 화인사회를 잇는 공식통로가 없어진 상태에서 비밀결사는 중요한 조직으로 기능했다. 유통성이 매우 높은 화인 이민자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이들의 몫으로 남았다. 싱가포르 화인들은 가족의 유대가 없었기 때문에 낯설고 새로운 사회에서 그들간의 사회적 유대를 효과적으로 맺기 위한 사회조직이 필요했고 특히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외부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혼례와 장례를 치러주고, 이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대신 조직에 해단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고, 회원간에는 의형제와 같은 의리를 강조 하였다.
1851년 발생한 폭동은 조주인 비밀결사와 객가인 천주교도간의 싸움으로 500여명이 사망하였는데 이와 같은 비밀결사와 식민정부의 갈등이 연이어 표출되면서 이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러 반란을 겪으면서 비밀결사에 대한 화인 지도자들과 식민정부의 태도가 점차 바뀌었는데, 해협식민지 정부는 화인 사회의 위험한 비밀결사를 규제하기 위하여 이들의 등록을 요구하는 법령을 1869년 통과 시켰지만, 비밀결사가 쿨리들을 강제로 수마트라 델리지역의 담배농장으로 배돌리고 심지어는 여행비를 부탐하고 온 사람까지 납치하여 오지로 보내는 사례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화인 지도자들과 상인들이 1871년 과 1873년 두차례에 걸쳐 식민정부에 비밀결사를 통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1873년 10월 9일에는 드디어 이민법령이 입법부에서 통과되었고, 1877년 화인 호민관 제도가 도입되었다.
1867년 해협식민지가 왕실식민지로 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이 영국동인도회사로부터 영국 정부로 이양되었으며 화인사회에 대한 식민정책도 변화하였다. 식민정부는 점차 비밀결사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는데, 1888년 화인의 행상을 금지시켰으며 비밀결사가 싱가포르의 유럽인에게 하인을 공급하던 사업 권한 조차 박탈하였고, 1887년 피커링이 의복회(義福會)의 사주를 받은 사람에 의하여 공격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비밀결사에 대한 규제가 더운 강화되었다. 1889년 위험한 비밀결사를 금지시키고, 무해한 친목단체의 등록만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일부 해협화인들은 모금과 지원병 모집을 통해 영국을 지원하였고, 중국에서의 신해혁명과 민족주의 운동의 여파로 싱가포르 화인사회의 일부는 정치적으로 재무장되어서 고국에 대한 애착과 중국 민족주의에 동조하면서 식민정부에 해한 태도가 변화하였다. 1906년 설립된 싱가포르 화인상공회의소는 다양한 방언, 친족, 직업집단의 화인 재력가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는데 이들은 중국 내의 정치, 화교학교, 자선사업 등에 관심을 쏟았고 화인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싱가포르에서 상업에 종사하여 재력을 확보한 사람들이었다.
아직 교육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싱가포르 사회에 중국 내의 정치적 변화에 따른 애국심으로 무장되어 있던 화인들이 중국어 학교를 세워 화인 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싱가포르에는 44개 중국어 학교가 있었다. 이 중국어 학교에서는 주로 방언으로 가르쳤고, 전통적인 유교개념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였다. 남양의 화인교육을 휘한 모금도 중국 영사관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어 복건성에 집미 학교촌과 하문대학을 세웠다 이들 말라까 화인출신 개혁파들에 의하여 1910년 이후에는 화인들이 변발과 아편 습성을 버리고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중국어 학교의 영향으로 중국 민족주의적 성향이 확산되자 1902년 교육법을 선포하여 20년간의 교육정책을 세뤘고 영어를 가르치는 초등학교를 정부가 만들고 1903년 래플즈 학교를 정부가 인수하여 중등학교로 개편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어 학교에 대한 규제를 자제하였으나, 점차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20년 교육령이 통과되면서 모든학교, 교사 및 이사진의 등록이 필수화 되었고, 학교의 모든 행위에 정부가 제제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27년 손문(孫文)의 추모식에서 공산당에 대한 비방 발언으로 해남 학생들이 항의 행진을 하며 방화로 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정부는 중국어 학교를 폐쇄시키고 중국어 교육과 중국어 교과서 사용을 금하며서 공산당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식민정부의 감시와 학교폐쇄, 교사의 측츨 등의 와중에서도 중국어 학교는 교사와 교과서를 중국으로부터 들여왔고, 학생들에게 중국 정체서을 키워주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1946년 영국 식민정부가 다시 들어오면서 말라까와 빼낭은 말라야 연합으로 흡수 되었고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로 남게 되었다. 같은 해에 싱가포르 시정부가 수립되고 1955년 선거이후 영국과 헌법에 대한 협상결과, 영국 정부가 싱가포르의 국방과 외교를 담당하고 그 외의 영역은 자치권을 부여하는데 합의하였다.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가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로 분리되었다.
싱가포르는 다른 동남아 국가와는 달리 기존 토착민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토착민과 화인간의 심각한 갈등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화인사회가 주류집단이면서도 소수집단의 동화를 요구하니 않는 독특한 사회이다.
2.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연방의 전체 인구 중 화인의 비율은 약 27.8%로 싱가포르를 제외한 동남아 국가 중 화인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말레이시아에서 화인은 소수민족이라기보다는 말레이와 함께 나라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종족집단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말레이시아 화인은 다른 동남아 국가의 화인과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가졌는데,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을 뚜렷하게 유지하고 있고 공식적인 정치영역에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화인사회의 상인, 장인, 노동자가 주를 이루던 형성기 계급구조를 상당한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남중국의 광동성과 복건성 출신이 다양한 방언집단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배 이전의 화인사회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말라까의 화인이지만, 15세기 이전에도 말레이반도 지역과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던 고대 역사서의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인도간의 해상무역이 발전했으며 , 이러한 해상무역의 주요한 교역로인 말라까 해협에 위치한 말레이 반도에 중국의 상인, 관리, 불교순례자들이 방문 하였음을 보여준다.
『明史』(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말라까의 왕은 중국의 황제로부터 왕위를 부여받은 속국의 왕"으로 기술되어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지배하의 말라까 화인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 묘사가 된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네덜란드의 화인 정착 장려정책에 의해 말라까의 화인 인구는 증가하였지만 18세기 그 숫자는 2000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기 말라까의 화인들은 대부분 복건성 출신의 상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들 이민자들이 대부분 남자였기 때문에 화인과 원주민인 말레이 여성의 혼인으로 뻐라니깐 화인 또는바바라고 불리 우는 혼혈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을 말라까 바바라고 부르는데, 말라야에 가장 일찍 정착한 화인집단이며, 중국문화와 말레이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바바문화를 만들었다. 이는 초기 화인정착자들이 말레이 문화에 어느 정도 동화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18세기 말엽부터 말레이반도 지역에 영국이 새로운 식민지세력으로 진출하면서 그 이전까지 거의 정체상태였던 화인의 이주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해협식민지는 동남아의 가장 중요한 중계무역항이 되었고, 번창하는 상인들의 도시로 발전했다. 해협식민지의 형성초기부터 상인들의 사회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로 구성된 다종족 이민사회로 발전되었다. 비록 영국의 식민지 이 기간 '백인의 정착사회'가 되지 않았으며 인구 구성에서 화인이 중요한 종족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해협식민지의 독특한 조세구조를 통해 현실화 되었는데 자유무역항으로 무역에 대한 관세는 부가하지 않았으며 소득세를 징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협식민지의 정부재정은거의 전적으로 소비세에 의존했는데 특히 아편과 주류에 대한 세입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아편과 주류의 소비자는 주로 화인이기 때문에 화인 인구의 증가는 곧 세입의 증대를 의미했다. 아편과 주류에 대한 세금의 징수는 가장 높은 입찰액을 제시한 화상에게 도급되며, 이들은 아편과 주류의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게 된다. 영국은 과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같이 화인 지도층에서 까삐딴 차이나를 임명하여 이들에게 식민정부와 화인사회의 중개자 역할을 부여하고 화교사회를 그들의 자율에 맡기는 '간접통치'의 방식을 취하였다. 빼낭은 1807년 사법권이 부여되고 지방법원이 설립되면서 까삐딴 차이나가 폐지되었으며, 싱가포르도 1826년에 사법권이 부여되면서 까삐딴 차이나 제도가 폐지되었다. 1880년까지 화교 지도자를 비공식적인 까삐딴 차이나로 임명하여 정부와 화인사회를 중개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1871년 해협식민지의 전체인구 중에서 화인은 34%를 차지하여 말레이에 이어 가장 중요한 집단이 되었고, 19세기 중엽부터 말레이 반도내의 화인 거주지는 확산되어 나갔다.
18세기까지 말라까의 화인은 주로 복건인이었지만, 해협식민지 시기에는 새로운 화인 이민자의 출신 지역별, 방언 집단별 구성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복건인은 해협식민지에서 광동인과 객가인은 해협식민지와 말레이 반도의 광산지역에서 조주인은 싱가포르와 조호르와 빼낭 인근의 프로빈스 웨슬리의 상업적 농업지역에서 해남인은 싱가포르에 주로 거주하는 양상을 보였다.
해엽 식민지 시기의 화인 이민자 사회는 매우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열악한 노동과 주거환경으로 화인 사망률이 매우 높았으며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불균형한 성비를 이루었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는데, 그이유로는 이시기 이민의 목적이 말라야에 정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시적인 이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시기에 부유한 화인 상인들은 말레이 여성과 결혼하는 경향이 있었고, 일부 성공한 신객들은 이들의 자녀인 바바여성과 결환을 하엿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난한 화인 남성들은 혼인이 어려웠으며, 이는 화인 여성의 인신매미를 통한 매춘업의 성행을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해협 식민지시기에 화인 사회는 이곳에서 태어난 화인과 새로 이민온 신객으로 나뉠수 있는데 여기서 현지출생의 의미는 단지 출생의 공간적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말레이 여성과의 혼인, 말레이 문화로의 동화를 함께 나타내고잇다. 그러나 이들 뻐라나깐 화인 또는 바바는 자신들을 화인으로 인식하였으며, 그들의 자녀도 화인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이들은 바바 말레이어를 사용했지만 자신의 방언집단과 출신지역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지역회관, 종친회, 비밀결사의 설립과 운영에도 관여하였다.
영국령 말라야 시기의 식민정부는 화인사회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증대시켰는데, 그 중요한 정책을 살펴보면, 천지회에 대한 규제와 금지를 규정한 법령을 제정하였고, 화인문제를 담당하는 특별 행정기구를 마련하였다. 이런 화인문제를 전담하는 식민관료로 화인호민관제가 신설되었는데 최초의 호민관으로는 피커링(w. Pickering)이 임명되었다. 호민관은 화인 이민자의 보호와 비밀결사에 대한 규제와 관련된 것으로, 화인들 사이에서 대인이란 칭호를 받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화인 호민관은 해협 식민지시대뿐만 아니라, 연방말레이국에도 임명되었으며, 1899년에는 화인 담당장관의 직책이 신설되어 화인과 관련된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가 식민정부내에 별개의 조직으로 존재하였다. 화인들이 이와같이 말레이정부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외국인법의 속지주의 원칙에따라 말라야에 오래 거주한 이민자도 외국인 범중에 포함되어 거주증서를 발급받아야 했으며, 재입국시 이민자 할당 규정에 적용에서 면제되어 자유로이 입국할 수 있었지만 노동자나 빈곤층은 정치적 불안요소가 되기 쉽다는 이유로 거주증서의 발급이 제한되었다.
19세기 중엽이후 중국에서의 잦은 반란으로 정치적 불안정, 수공업의 몰락과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피폐, 청 정부의 이민제한정책의 완화 등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말라야로의 화인 이민이 급증하였다. 영국령 말라야는 식민체제의 수립으로 정치적 안정을 얻었고 주석과 고무 생산을 중심으로 하여 경제 발전이 본격화 되었으며, 대공항 이전까지 자유이민정책을 취함으로 화인에게 매력적인 이주지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해협화인은 말라야의 화인사회에서 소수 화인집단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친영국적인 정체성을 강화하여 식민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였다.
식민체제 해체기 동안 말라야의 화인사회는 많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말레야가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한후, 화인들과 말레이인들은 그들을 대변한 단체를 성립하게 되었다. 1950년 중국의 공산화로 말라야와 대만간의 단교로 화인들은 말라야를 자신들의 영구 정착지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시민권 획득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MCA(화인 엘리트집단)는 UMNO(통일말레이국민전선)와의 협상을 통해 화인사회의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받게되었다. 독립헌법의 시민권 조항을 화인사회가 요구하던 속지주의를 기본원칙으로 채택하고 말라야에서 출생한 비말레이의 경우는 말라야에 계속해서 5년이상 거주하고 간단한 말레이어나 영어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규정하였다.
1957년 싱가포르르 제외한 말레이반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말라야연방이라는 새로운 독립국가가 출범하였고, 1963년 말라야 연방에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가 참여하여 말레이시아연방을 구성했는데, 1965년 싱가포르가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며 지금의 말레이시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말레이시아 화인의 정체성은 화인의 정체성의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것임을 나타냈다. 영국 식민시기의 화인 사회는 "일시적 체류자"의 성격이였고, 이들 이민자들이 말라야에 정착하는 경향이 나타나긴 했지만, 영구적인 정착지로 인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이 거의 중단되었고 중국과의 관계도 단절됨에 따라 말라야 화인사회는 현지지향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3.태국
중국인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오늘날 태국 지역을 방문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38년경 수코타이 왕국이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태국만 연안의 여러 시장과 항구들에서 중국 상인인 화상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근거는 19세기 초에 청나라의 서송(徐松)이 편찬한『송회요고』(宋會要稿)에 드러나는데, 기록에 따르면, 12세기말에서 13세기초 사이에 중국상선들이 오늘날 펫부리(Phetburi) 일대에 있었다고 추측되는 전리푸(眞里富)란 성읍국가에 와서 중국산 견사(絹紗)와 도자기를 팔았다고 한다. 중국무역의 이익을 알고 있었을 전리푸의 국왕은 1200~1205년 사이에는 조공무역 관계를 맺기 위해 여러차례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에 중국과 태국만 일대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중국해 무역을 하기에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태국은 남중국해 무역의 다양한 상품의 수요지 이자 공급지였으며, 여러 중계무역항을 제공하였고, 남송(南宋)시기부터 활발히 나타난 중국의 동남아 무역에 대한 무역적 관심의 결과가 태국만 일대에서 중국 상인들이 무역활동을 하는데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19세기 중엽까지 태국의 화인 사회 형성에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송사』(宋史) 의 열전(列傳)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송(南宋)의 좌승상(左丞相)이었던 천이종(陳宜中)은 1277년경 元의 공격이 임박하자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오늘날 남부 베트남 지역에 있었던 잔청(占城) 즉 참파(Champa)로 피했다. 그는 그후 1282-83년경 참파로 파송된 원(元)군대의 계속적인 압박으로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이것을 통해 13세기 말 일단의 중국인들이 태국에 화서 정착한 첫 구체적인 증거를 보게 되었다.
1279년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곧 이어 동남아로의 세력팽창을 위해 노력한 몽골제국은 1293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코타이 왕국을 원(元)에게 복속시키고자 하였고 제국의 강대함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원(元)의 동남아에 대한 적극적 진출의 결과였으며, 원(元)의 계속되는 사신파견의 결과 양국간에 조공관계가 발전하여, 1295년부터 1323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수코타이 정부는 베이징(北京)으로 조공사신을 보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남중국해에서의 무역적 이해관계로부터 비롯된 수코타이-몽골 조공관계의 진전은 한편 또 다른 중국인 무리가 태국으로 이주, 정착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유타야 시대(1351~1767) 태국 화인 사회의 발전은 아유타야 정부의 중국 무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유타야 왕국은 1371년부터 1447년까지 중국에 63차례나 조공사신을 보냈다. 동남아와의 조공무역 관계를 중시한 명(明)정부의 대외 정책과 중국무역으로 부터의 이익과 중국문화의 수입에 대한 아유타야 정부의 관심은 아유타야 왕조 초기 중국과의 활발한 조공무역 관계의 발전을 가져왔다.
중국 사료들이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타이 정부는 태국에서 활동하는 화인들을 중국에 조공사신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태국에 와서 활동하던 화상들 중에는 해외무역상의 능력을 기반으로 아유타야의 관료사회에까지 진출한 사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관료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료화상이란, 타이 정부의 필요에 따라 아유타야 왕국의 '쿤낭'(Khun nang)이 되었으나, 자신의 본업인 무역을 계속하는 화인을 일컫는데, 이들은 신분과 관직을 이용하여 더 많은 무역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아유타야 시대 관료화상들의 역할이 크게 확대된 것은 17세기 말로써, 1688년의 왕실 쿠데타를 통해 친(親)프랑스 친(親)영국적이었던 나라이(Narai, 재위 1656∼1688)왕의 정부가 무너지고, 펫타라차(Phetthaeacha, 재위 1688∼1703)왕이 등위했으며, 이를 통하여 네덜란드를 제외한 유럽의 다른 무역상등은 모두 태국으로부터 철수하였다.
15세기 정화(鄭和)의 원정(1405~1433)이후 남중국해의 항해와 무역이 점차 중국인들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그와 함께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화인들의 숫자도 점점 증가하였다. '스키너'라는 학자의 가설에 따르면,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 태국의 대(對)중국 조공무역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인데 사적인 무역은 계속 증가하여 당시 태국으로의 중국인 이주가 중국 당국의 엄밀한 통제대상이었던 조공선보다는 양국간의 사무역을 장악하던 화상들의 정크(junk)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16세기 말 화인들이 수적으로 증가하였으며 타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는데,중국인들의 태국 진출을 촉진시킨 원인은 전후(戰後)국가건설아라는 태국의정치 경제적 요인외에 1567년 명(明)정부의 해금(海禁)정책 폐지를 통해 중국 사무역 상인들의 해외활동이 합법화되었고,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 유럽인들이 동남아로의 무역적 진출의 확대로 남중국해에서의 무역량이 증가되었으며, 유럽인등이 주로 중국인을 통해서 동남아에서의 무역을 했으므로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화인들의 숫자가 늘었다.
태국-중국간의 무역에서는 하문(厦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복건성(福建省)상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1720년대 식량부족이 심했던 복건지방으로부터 시암(태국)으로의 이주가 급증하였다.
화인사회 역할이 다양화 되고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는 톤부리-방콕 시대(1767-1910년)로 이 시대는 지배 왕조에 따라 세단계로 나뉘는데, 바로 딱신시대와 라마1세에서 라마3세까지 그리고 라마4세에서 라마 5세까지 이렇게 세단계로 나뉜다.
먼저 딱신시대(1767-1782)는 중국인 시대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이 왕조는 중국계 타이인인 딱신에 의해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딱신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들의 해외무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스스로도 왕실의 독점 무역을 추진하였다. 태국과 중국간의 번성하는 무역과 새로운 왕조의 건설 그리고 딱신의 친중국적인 기본 자세는 중국인들의 태국으로의 이주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두 번째 라마 1세에서 3세까지(1782-1851)는 전통과 근대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딱신이 이룩한 국가의 재통일을 바탕으로 1782년 방콕을 수도로 하여 새롭게 왕조를 세운 라마 1세(재위1782-1809)는 딱신과 달리 태국적인 정치를 추구하였다.
라마1세는 재위 초부터 수도 방콕의 건설과 계속되는 버마와의 전쟁을 위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종래의 타이왕들이 행했던 것처럼 해외무역 특히 중국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타이 사회에서 해외무역을 비롯한 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기존의 화인 사회에 의존하였다.
라마1세는 1782-1800년간 11차례나 중국에 조공사절을 파견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도 활발히 진행된 대(對)중국 쌀 수출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는 양국간의 쌀무역을 해오던 많은 징해 상인들이 시암으로 이주해옴으로써 이시대의 화인 숫적인 증가에 기여했다. 이 쌀 수출은 라마 2세(재위1809-1824)와 라마3세(1824-1851)기간에도 계속 할발히 진행되었다.
라마1세에서 3세 시대 중 18세기-19세기 전환기에 중국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였는데 이는 조수인들의 기여가 컸는데, 이들은 딱신 시대이후로 정크건조 사업을 해왔으며, 상업활동 외에 사탕수수와 후추 플랜테이션을 경영하였다. 조주인들 중 특히 징해 상인들은 라마1세 재위초기에 현 방콕의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요지에 정착하여 오늘날 방콕의 상업중심지를 형성하였다. 또한, 라마3세 시기에 징세도급제도가 확대 시행되었는데 이는 많은 대외전쟁과 대규모 토목공사, 왕실무역선 건조 등의 정부 사업을 충당하기 위한 것 이였다.
세 번째로 라마4세에서 5세까지의 시기(1851-1910)로 이를 통해 근대화 시기의 화인 사회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855년 태국 정부는 영국과 체결한 소위 '보우링조약'을 통해 상업적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였고, 그 이듬해부터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라마4세 정부가 조약체결을 한 이유는 아편전쟁과 일본의 강요된 개항 그리고 제2차 영국-버마전쟁(1852-1853)에서 보여준 서양의 우월한 무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 체결된 '보우링조약'은 화인사회에 대해 다각도의 영향을 미쳤다. 우선 타이정부의 독점적인 무역관행을 금지하고 태국에서 서양상인들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하며 수입관세를 수입품의 종가 3%로 확정시킨 이 조약으로 태국 왕실과 관료사회가 중심이 된 후견주의적, 독점적 무역체제가 종식되었다. 화인들은 조약 이후 해외무역에 있어서의 많은 기득권을 상실하였으나 그 대신 광범위한 징세도급권을 획득하여 타이 사회에서의 경제적 중요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 '보우링조약'체결이후 서양 자본 유입의 확대와 태국경제의 전반적인 팽창 그리고 태국 사회의 근대화에 편승하여 태국 화인들이 직업활동은 더욱 다양해졌다. 화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활동영역 상업이나 징세도급업을 장악하였고, 수련된 장인(匠人)과 막노동 분야에서도 불가결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특히 운하, 도로, 철도, 교량의 건설에서 중국인 쿨리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화인사회 내부에서의 민족주의적 흐름은 1910년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08년 손문(孫文)이 직접 방콕을 방문했을 때, 수백명의 화인들이 중화회관에 모여 그들을 환영하였고, 정미업자들고 쌀무역 상인들을 중심으로 모은 자본으로 방콕에 Chino-Siam Bank라는 은행을 설립한 것도 혁명적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있다. 1909년 3월에 청(淸) 정부가 중국인 국적법을 공포하여 부계혈통의 모든 중국인은 그들의 출생지와는 상관없이 중국 국민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하였다. 혈통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이 법은 구체적으로는 중국인 아버지를 둔 중국인은 외국에 살고 있는 경우 그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있지만, 일단 중국으로 돌아오면 중국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는 해외중국인들에게 정치적 보호를 청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킴으로써 그들에게 귀속의식을 심어 놓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태국 사회에서도 20세기 초에 민족주의적 정서가 발전되었는데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태국의 엘리트 사회는 태국 내의 가장 큰 소수종족 집단인 화인들의 존재뿐 아니라 화인들이 태국 사회에서 갖는 경제적, 정치적 위치를 인식하게 하였다.
태국 정부는 1909년 3년마다 한번씩 내던 기존의 중국인 인두세를 태국인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같은 매년 내는 것으로 변경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화인사회에서 대규모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화인들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태국사회에 가시화 되었으며 화인들의 조직적 단결력이 태국 경제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태국인들에게 인식시켜주었다. 이러한 비밀 결사들은 1910년 이후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합법적인 상호부조적 협회로 재조직 되었고 그 구성원이 동일한 방언집단일 경우 합법적 방언단체로 발전했다.
이러한 화교단체들은 활동이 다양해진 태국 사회에서 화인들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새로운 이주자에게 정착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직업을 알선하기도 하였고, 회원들을 위한 병원, 사원, 공동묘지를 설립하였고 자녀들이 중국 문화와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화교의 조직적 활동은 20세기 태국 화인들의 중국적 정체성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3년 제정된 태국 국적법은 한 타이인 부모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출생지가 어디이든 태국국민이라 규정하였다. 이 그것은 1909년 청정부의 중국인 국적법에 대한 대응조치로 화인들을 태국 사회로의 동화를 촉진시키려는 것으로 보이다. 또한 1933년 3월에 공포된 국민교육정책은 모든 학교에서 주당 28시간의 교육시간 중 21시간은 타이어로 수업할 것을 의무화하는 의무교육법을 방콕 지역에 적용시켰고 규정 준시를 엄격히 심사하였다. 이 또한 그들을 태국 사회로 동화시키려는 노력중 하나이다.
오늘날 태국 화인들이 대부분 태국 국적을 취득하고 현지사회로 귀화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동화의 시각을 강화할 것이다. 화인들의 대부분은 타이어를 말하고 타이 학교를 다니며 타이인 조직에 가담하고 태국의 명절과 종교적 축제를 기린다. 스스로를 타이인으로 간주하고 태국의 국기와 태국의 왕실에 대해 중성을 맹세할 것이며 태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태국국민의 일원으로서 주권의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4.그 외의 동남아 화교국가
앞에서 언급한 국가이외에 또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화교국가들이 있다.
필리핀은 중국과의 상호 교류 역사는 1000년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당대(唐 代618-906)대에 개시된 중국과 필리핀의 교역은 조공형식의 관방 무역을 통하여 송대(宋代960-1276), 원대(元代1278-1368), 명대(明代1368-1644)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필리핀에 대한 중국인의 이주는 외국기록에는 7세기까지 언급되고 있지만 중구 기록에는 16세기 전반까지도 발견되지 않는다. 화인사회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학살과 차별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화인사회의 대응은 토착사회에 대한 동화의 거부로 나타난다. 탈 식민지화 이후 필리핀으 효과적인 국가형성을 위해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화인문제는 바로 분할 지배전략을 바탕으로 화인사회에 대한 포섭정책과 배제정책을 반복하는 지극히 이중적이며 감정적인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가 초래한 역사적 유산이다. 중국귀속적 '화교사회'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의 탈 식민지화와 중국의 공산혁명을 계기로 현지지향적 '화인사회'로 전환되었고, 1975년 마르꼬스의 귀화 조치이후 점차 현지귀속적 '국민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화인들은 총인구의 3%정도에 불가하며 토착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시민 및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크게 제약 당하면서도 주요 경제적부문에서 독점적 위치를 구축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접촉 시점은 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축되며 한(漢)대로 오면 많은 중국인들이 보르네오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상업을 벌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와 인도네시아의 교류는 불교승려를 통한 것 이었다면, 송나라에서는 상인들이 앞장을 섰다. 이것을 통해서도 중국 상인들의 적극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 당, 송, 원, 명에 이르는 왕조들의 변천과정에서 동남아와의 첩촉과 교섭이 다양한 수준과 규모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동남아는 중국의 외교에 있어서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고 북방민족들의 군사적 위협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이고, 동남아 주민들을 "남양의 야만인들" 즉 남만(南蠻)으로 보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외교정책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161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 시키고 바타비아를 건설하고 바타비아의 초대 총독인 쿤이 화이들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하여 화인 인구유입을 권장하였고 이러한 우호정책으로 바타비아의 화인 인구는 10년 사이 5배정도로 급증하였다. 19세기 말 급증한 새로운 중국인들의 대규모 유입은 인도네시아 화인들의 수를 급증 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인사회를 내부적으로 이질화, 분화시켰다. 그것은 이전에는 중국인의 해외이주는 남자들에게만 제한된 까닭으로 중국인과 토착여성의 통혼으로 독특한 토생화인 사회가 형성되었으나,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들이 여성과 가족을 동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객화인사회가 출현하게 되고, 이 두 집단사이에 이질화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공항과 일제점령등의 수난시대를 잘 이겨내고 오늘날 소상인에서 대 자본가로서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직도 화인정책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요인들을 하나씩 해소해 나가야 할 것이다.
Ⅴ. 맺는말
위에서 본 내용과 같이 동남아 각지에 있는 화교들은 당(唐)나라 때부터 그 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본격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남중국이 개발되기 시작한 송(宋)나라 때부터이다. 특히 남송 시대에 북부 중국에서 남부 중국으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고, 연해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져, 화교 해외 이주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12세기 남송 시대부터 16세기 명 왕조의 해금(海禁) 개방 이전까지 대략 10만여 명의 화교들이 동남아시아에 이민을 갔다고 한다. 16세기 명 왕조의 해금 개방 이후에는 당연히 그 숫자가 더욱더 증가하였고, 화교들이 동남아 각국에서 더욱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 때를 이용하여 약 100만 이상의 화교들이 해외에 진출했다. 이는 송(宋)정부가 남양 무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해외 유출이 시작된 것이며, 남양 무역이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여기어 지면서 중국의 동남아 무역이 번성하여 지고 이에 따라 동남아로 진출하는 중국 상인의 수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14세기 명(明)왕조가 동남아와 무역을 조공무역에만 국한시키는 '해금(海禁)정책'을 취하면서 동남아에 정착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졌다. 1840년 아편 전쟁 이후에는 반식민지, 반봉건의 움직임 속에 해외 진출 화교들이 서서히 자기들의 민족의식을 인식하고 자각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활동 범위가 미주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의 화교의 수는 1000만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화교들은 자신들이 이 땅(자신들이 정착한 곳)에서 정착하여 살아야 한다고 느끼고 그 사회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이유로는 그전 식민국가들과 조약 체결을 맺을 의 국가는 지금 정권을 잡은 공산당이 아니라 대만의 국민당이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돌아갈 곳이 없어졌음을 느끼게 된 것 이다. 지금도 태국과 필리핀을 제외한 동남아 국가에서는 토착세력과 화교사회의 갈등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아직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문제인 화교는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경제적 거상으로 동경의 대상으로써 비쳐지고 있다.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좀더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