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공채 8기로 입사한 정준양 회장(포스코)
경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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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12:58
"놀 줄 알아야 일도 잘합니다"
CEO·직원 '通'하려면… "커뮤니케이션 오차를 5% 내로 줄여라"
지난 23일 오전 서울 대치동의 포스코(POSCO) 본사 빌딩. 철과 유리를 주재료로 지어진 건물 4층에 올라가자 복도 한복판에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왕관을 들며 "유레카(eureka)!"를 외치는 장면이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복도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이번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여성 직원 2명이 양팔을 쭉쭉 뻗으며 컴퓨터 복싱 게임을 벌이자 옆에 있던 동료 직원들이 편을 나눠 박수 치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포스코가 지난 9월 직원들의 창의력 향상을 위해 문을 연 직원 놀이방 '포레카(POREKA)'이다. 포스코라는 사명(社名)과 뭔가 깨달은 것을 뜻하는 '유레카'의 합성어이다.
본사 직원 1200여명 중 하루에 300명 정도가 이곳을 찾는다. 휴식시간은 물론 근무시간 중에도 팀 회의를 갖거나 담소를 나눈다. 딱딱함과 권위주의의 대명사 같던 포스코가 올 1월 정준양 회장 취임 이후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지휘와 복종의 군대식 문화 대신 대화와 소통을 바탕으로 한 '창의 경영'이 회사 곳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75년 공채 8기로 입사한 정준양 회장은 2002년 상무 자리에 오른 뒤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중간 간부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남들이 보통 3~4년이면 승진하는 차장 자리를 7년 만에 얻었다. 또 1999년부터 2003년까지 4년간 EU사무소에 근무한 것을 빼고는 직장 생활 대부분을 생산 현장에서 보냈다.
오랜 기간 현장에서 동료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한 이력 탓인지 그는 앞에서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이끌기보다 실무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면서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 나아가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Weekly BIZ는 이런 정 회장만의 독특한 '창의 경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세계경영연구원(IGM)이 마련한 중소기업인을 위한 경영 멘토링 프로그램에 정 회장이 강연자로 나선 것. 그가 말하는 '창의 경영'이 무엇인지 7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1. 좋아하고 즐겨라
그는 "포스코에서 가장 바꾸고 싶은 문화는 '놀 줄 모르는 문화'"라고 말했다. 그 자신 30년간 일하면서 휴가를 가 본 적이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것. 하지만 충분히 쉬면서 업무를 좋아하고 즐겨야 자연스럽게 창의(創意)가 나온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노자(老子)'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즉,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즐길 줄 아는 게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좋아하는 것도 힘든데 즐기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어요? 그래서 직원들이 일을 즐길 수 있도록 먼저 회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창의성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화사한 청록색 넥타이를 매고 강연장에 들어선 정준양<사진> 회장은 강의가 진행될수록 외모에서 느껴지는 '인심 좋은 아저씨' 인상을 더욱 짙게 풍겼다. 구수한 입담에, "허허허" 웃는가 하면 장난기 섞인 농담도 곁들였다.
2. 비틀어 보기, 거꾸로 보기
그는 "창의는 통찰(洞察)에서 나오고 통찰은 관찰에서 나오는데, 관찰은 비틀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남과 똑같은 프레임 안에서 보면 다른 사고(思考)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응용력이 없는 사람한테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직원들로 하여금 응용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그래서 창의 놀이방을 만들었고, 미술 작품 관람을 권장한다.
최근엔 본사 2층 미술관에서 직원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로 한지 공예와 은세공 등을 직접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을 가졌다.
3. 통(通)하기 위해서는? '5% 룰'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최고경영자(CEO)의 철학이나 경영 방침이 현장 직원들과 제대로 소통되느냐에 있다. CEO가 하는 말은 보통 6~7개 단계를 거쳐 현장에 전달된다. 그런데, 각 과정에서 부하 직원이 받아들이는 각도가 5도씩만 벗어나더라도 30도 이상 달라지게 된다고 정 회장은 지적했다.
정 회장은 CEO와 현장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오차가 5% 이내에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소통(疏通)이라고 말했다.
그가 내린 소통의 또 다른 정의 한 가지는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 남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이어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고 이견은 남겨둔다)'라는 말을 소개했다.
"서로 입장이 다른 얘기만 하면 의견 일치를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화는 의견이 같은 부분부터 시작하고, 의견이 다른 것은 나중에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첫 대화에서는 서로의 공통 분모인 70%에 대해서만 먼저 의견 일치를 보고, 그다음에 나머지 30%에서 같은 부분을 다시 찾는 식으로 계속 반복하다 보면 결국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소통의 기본은 '같은 것 찾기'"라고 말했다.
4. 업무를 훤히 보이게 하라
포스코 직원들은 매일 아침 9시면 실(室) 또는 그룹별로 이른바 'VP(visual planning·비주얼 플래닝) 보드(board)' 앞으로 모인다. 크게는 회사 목표에서부터 작게는 팀이나 개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직원 개개인이 처리해야 할 업무를 연간·분기·월간·주간 단위로 나눠 빼곡히 기록해 두고 누구나 볼 수 있게 만든 업무 현황판이다.
"일본의 자동차기업 토요타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가 VP입니다. 모든 업무를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이죠. 마라톤 선수는 42.195㎞를 본인이 원하는 시간 내에 달리기 위해 5㎞ 단위로 목표를 설정하고 관리한다고 합니다. 구간별로 체크하기 때문에 문제점과 해결책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죠.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와 진행 과정이 눈에 보이면 코칭과 피드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정 회장은 "VP를 통해 정상적인 업무와 돌발 업무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달 동안 직원의 업무 중에 갑자기 발생한 게 많았다면 임원이나 팀장 등 리더가 돌발 지시를 많이 해 업무가 정형화되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게 된다.
5. 믿고 맡겨라
포항제철소 내 스테인리스(stainless) 2제강 공장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에 정 회장이 현장에 가서 공장장에게 그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답은 간단했다고 한다. 혁신의 필요성, 목표와 방향에 대해 직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한 뒤 일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것이다.
그 공장장도 처음엔 결과 관리에만 신경 썼는데, 의외로 성과가 안 나왔다. 그러나 관리 방식을 '시작'에 초점을 맞추고, 직원들에게 명령과 지시를 하기보다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고 일을 믿고 맡겼더니 원가가 절감되고 품질도 더 나아졌다. 정 회장은 "나중에는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혁신에 앞장서고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공장장이 할 게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하면서 "허허허!"하고 웃었다.
6. 목표를 높게 잡아라
"포스코는 그동안 실패를 모르는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은 성공에 대한 부담감에 '여기까지 하면 되겠지'란 생각으로 애초부터 목표를 낮게 잡았습니다. 그러고 나선 목표의 110%를 달성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목표를 현 수준보다 30% 더 높게 잡아야 합니다. 만약 이 목표치의 95%만 달성해도 이전 목표치를 110% 달성한 것보다 높으니까요. 대신 구체적인 로드맵을 만들고, 작은 것부터 성공하는 모델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쌓아주어야 합니다. 혁신도 성공해본 사람이 할 수 있거든요."
7. '궁즉통(窮則通)'
질의 응답 시간에 한 수강생이 "회장이 되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광양제철소 제강공장장으로 있을 때 화재가 발생해 공장 전체가 멈춰 서는 위기에 빠졌던 일을 꼽았다.
쇳물을 만들 때 들어가는 원료를 공급하는 컨베이어 벨트가 불에 타버린 것이다. 바로 그때 현장에 있던 직원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원료를 덤프트럭으로 운반하고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는 방법으로 컨베이어 벨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그를 비롯한 현장에 있는 직원들은 '왜 지금까지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며 놀라워했다. 정 회장은 "'궁즉통(窮則通)'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어떤 위기나 한계 상황에 닥쳤을 때 관습의 틀을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올해 회사 설립 후 처음으로 생산량을 27% 줄였는데도 3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그 비결 역시 '궁즉통'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 4년 전부터 매년 1조원씩 원가 절감을 해왔고 올해는 원가를 전년보다 1조4000억원 아꼈다.
정 회장은 마지막으로 "리더는 VIP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전(Vision)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통찰력(Insight)과 함께 철학(Philosophy)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보고 경영과 기술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우리는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질 것인가를 설정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그는 좀 힘들지 모르지만 CEO의 꿈과 비전, 구성원의 꿈과 비전이 일치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리더는 자기 희생과 솔선수범을 바탕으로 직원들과 소통하고 결과를 되짚어 봐야 합니다."
3시간 40분(휴식시간 40분 포함)에 걸친 강의가 오후 9시 10분에야 끝났다. 예상보다 10분 늦게 끝난 데 대해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약 40명의 수강생들 사이에서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