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글에,
'죽어서도 벗을 수 없는 신발' 그것이 '팔자'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팔자'라면
자신의 '팔자'가 기박(奇薄)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꿈을 이룰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러니, 되는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저절로'의 생각으로는,
죽어서까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팔자'이니
그런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일생을 살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지만
'저절로'나 그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일제 점령기에 태어나 6.25 한국동란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와 배고픔을 겪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청소년들 중
이런 어려움과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또, 우리들 한국인(韓國人)들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빈국(貧國)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슬픔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껌 한 통 사고 내는 500원의 적은 돈이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는
일주일(一週日)분의 식량을 살 수 있는 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실감하며 살고 있는가요?
그러니, 사람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팔자'가 없다고는 못하겠지요?
그러하지만 어제의 글에서처럼,
좋은 가죽신을 신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라도;
그 신발의 편안함만을 믿고 남의 짚신이나 나막신을 깔보고
조심성 없이 겅중거리고 경솔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험한 산길을 지나면서도 조심하지 않아
발을 헛디뎌 벼랑에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비록 맨발로 달리기를 하면서도
더디기는 할지라도, 자신의 앞길을 잘 살펴 조심하며
끝까지 견디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니;
삶이라는 경주를 어떤 태도로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따라
'벗어 버릴 수 없는 신발'이 비록 좋지 않더라도
후회 없는 경주(競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의 '벗어 버릴 수 없는 신발'이
어떤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그리고 어떤 태도로 경주(競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맨발로 뒤처져 마음껏 달려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삶이라는 달음박질(競走)에 최선의 끈기와 조심성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여러분이기를 빕니다.
- * 저 절 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