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2] 태국 내 판금조치 : 태국의 왕위계승 (이코노미스트 20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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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2] 태국 내 판금조치 : 태국의 왕위계승 (이코노미스트 2010-3-18)

라조 1 2013

 

 

태국 레드셔츠들의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지는 3월 18일자로 발행된 기사를 통해, 태국의 왕위계승과 권력구도에 대한 민감한 분석기사를 내보냈다. 태국 정부는 준 논문 수준의 이 출판물에 대해 즉시로 태국 내 판매를 금지시켰다. 태국 내에서 <이코노미스트> 지의 판매금지 조치는 2008년 이래 벌써 2번째이다. "크메르의 세계"는 상당히 민감하고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기사 전체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공개한다. 이 기사의 원래 제목은 <태국의 계승권: 아버지는 노쇠하고, 자식들은 싸운다>(Thailand's succession : As father fades, his children fight)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모든 사진자료들은 <이코노미스트>의 원래 보도문에 포함된 것이다.

  

 

 

 

태국의 왕위계승 : 노쇠한 아버지와 싸우고 있는 자식들

 

Thailand's succession : As father fades, his children fight

 

 

 

태국의 정치적 소요 이면에는 왕위승계에 관한 뿌리깊은 두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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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과 버스, 그리고 선박들을 탄 시위 참가자들이 방콕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엘리트들에 대항한 '민중들'(people)의 싸움"이라 주장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3월 14일(일요일), 하나같이 붉은셔츠를 입고 자신감에 차 방콕 시내에 모여든 군중들은 10만명이 넘었다.

 

무대 위로 올라온 연설자들은 정부 및 왕당파와 군부 내에서 정부를 지원하는 세력들에 대한 성토에 여념이 없었다. 깃발들에는 "정의없이 평화도 없다"(No Justice, No Peace)란 구호가 적혀있었다. 오랜 기간 끌어온 태국 권력투쟁의 새로운 혈전이 시작되었고, 그 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주 중반이 될 때까지도 태국의 붉은셔츠(UDD: 레드셔츠) 시위대가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อภิสิทธิ์ เวชชาชีวะ) 현 총리의 내각을 사퇴시키고 새로운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목적은 좀처럼 성취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아피싯 총리의 배후를 받쳐주는 군부도 건재하게 존재한다. 아피싯 총리는 정계개편을 통해 총리가 된 후 15개월이나 버팀으로써, 방콕의 "[정치적으로] 근시안적이고 부유한 계층들"(myopic monied classes)과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노란셔츠(PAD) 회원들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1인1표제 민주주의 하에서, 결정적인 성공의 열쇠는 무산계급이 지니고 있다.

 

두 번이나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고, 현재 논란의 와중에 있는 인물인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ทักษิณ ชินวัตร) 전 태국총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2006년 쿠테타"로 실각한 이래로 줄곧 그는 침묵을 유지하길 거부했다. 지난 2월 26일 태국 대법원이 그의 재산 중 14억 달러를 몰수하기로 한 결정도, 그를 보다 분노하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탁신 전 총리의 막대한 재산과 특권적 생활양식에도 불구하고, 많은 붉은셔츠(UDD) 회원들은 탁신 전 총리가 태국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여기고 있고, 그와 함께 커먼코즈(common cause)(역주)를 결성했다.

 

(역주) 커먼코즈(common cause): "돈과 정치의 결탁을 철저히 막는다'는 취지로 미국의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던 존 가드너가 1970년에 만든 단체. 워싱턴의 정치인들간에는 '민간 중앙정보국'(Civil CIA)이라고 불린다. 커먼 코즈는 선거제도 개선, 선거자금 제한, 정치헌금 규제, 공직자윤리기준 강화 등에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정부나 노조, 기타 외부단체의 보조를 일절 사절한다는 행동강령을 정해 회원들의 헌금으로 모든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워싱턴에 본부가 있고 주별로도 지부가 있는데 회원은 무려 25만 명에 달한다." ---- [출전: 경제용어사전] *. 이 기사에서는 "정치적 결사체" 정도의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집권당 정치인들은 천박한(lowly) 레드셔츠들이 [탁신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고, 주류적 여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해댄다. 이들은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는 질서있는 선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총선실시 제안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집권층 대부분은 이러한 혼란의 배후에는 탁신이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태국의 정치적 풍경 속에는 또다른 중요한 한 인물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는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군주인 올해 82세의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국왕이다.

 

붉은셔츠들의 시위현장에서도 푸미폰 국왕의 거대한 초상화가 평안한 모습으로 군중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국 왕당파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국왕은 "국가의 아버지"(國父)이고, 거리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걱정거리이다. 일부 태국인들은 태국의 정치적 소요사태가 작년(2009년) 9월 이래 호흡기질환으로 입원생활을 하고 있는 국왕의 건강회복에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태국사태의 이유는 "아버지"가 "자식들의 싸움"에서 길을 잘못 잡아 발생한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한 군주의 죽음은 항상 국가적 드라마이자 그 국가의 자기성찰의 계기가 된다. 태국인들은 바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1946년 등극하면서 현대적 세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던 이 제도적 장치에 몸을 담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그 이전 어떤 왕들보다도 더 대중적인 국왕이 되었다. 군사정권이 약간의 민주주의를 허용하면서, 왕실은 존격받는 권력중개자로 기능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합법성은 푸미폰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와 왕실관련 인사들의 밀실적 활동에 근거한 것이었다.

 

태국 궁내청(왕실)은 국왕이 현재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고 활발한 건강상태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이미 왕위계승의 불안정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특히 투자자들이 불안해하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은 <왕실모독처벌법>(lèse-majesté laws)을 두려워하여 그 부분에 대해 솔직한 발언도 하지 못하고 있다. 태국의 한 대형 중개업관련 기관이 2010년도 정치적 위험요소에 관해 펀드매니저들을 상대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42%의 응답자들이 이 조사기관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변화"(=국왕의 서거)라고 한 항목을 선택했다. 지난 10월에 푸미폰 국왕의 서거 관련 소문이 나가자 대규모 매도현상이 이틀 연속 발생했고, 이에 화가 난 정부는 소문 유포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태국은 이미 4년 동안이나 정치적 소요 속에 빠져있었다. 현재까지는 사망자수도 별로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2009) 4월에 고삐풀린 분노는 붉은셔츠들이 방콕 시내에서 군대와 투석전을 펼치게 만들었고, 이는 이러한 열기가 얼마나 뿌리깊은 데서 출발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군부 자체 내의 분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전면적 내전에 대한 두려움은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향후 수년간의 정치적 대립과 기능마비 상태에 대한 예측은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왕위 자체는 자연스레 계승되야만 한다. 현재 남성 후계자로서 승인되어 있는 인물은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 57세, 1952년생) 왕세자이다. 또한 그의 계승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도 그다지 많다고 할 수도 없다.

 

아마도 [푸미폰 국왕이 서거할 경우] 국장기간은 6개월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이 될 것이고, 그 사이에 정치적 난타전도 휴전을 하게 될 것이다. 일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찾아 들어가 타협을 추구하게 될 수도 있다. 푸미폰 국왕의 서거는 또한 태국에 있어서 세대교체를 의미하게 될 것이고,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이야말로 대체하기 어려운 최고의 장애물로 남을 수도 있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이미 광범위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왕위계승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 학자는 "[푸미폰 국왕의] 이번 재위가 끝나면,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다(=끝이다)"라고 말했다.

 

차기 왕위계승자는 인격적 숭배 속에서 푸미폰 국왕이 얻었던 축복을 주는 아이콘이란 위상을 다시금 채워나가야 할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 직위에 머무르며 대중적 검증을 거친 왕세자의 역할공간이란 어디를 둘러봐도 만만치가 않다. 태국에서 그러한 일(왕세자가 등극 후 제대로 위상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한 쪽으로 가고 있다. 한 서방 외교관은 "물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라고 힐문했다.

 

 

 

 

왕세자에 대한 회의적 시각

 

사실 이러한 난점은 이미 익숙한 종류의 것이다. 라마 6세인 워치라웃(Vajiravudh, วชิราวุธ: 1881-1925) 국왕은 1910년 즉위했는데, 그는 준엄한 근대주의자였던 자신의 부왕 쭐라롱꼰(Chulalongkorn, จุฬาลงกรณ์: 1853-1910, 라마 5세)의 그늘 속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은 인물이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University of Wisconsin)의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꾼(Thongchai Winichakul) 교수는, 워치라웃 국왕이 즉위 전부터 공공연하게 나쁜 행실을 보여 왕실관련 가십으로 오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워치라웃 국왕은 "환상적인 시인이자 극작가"였지만, 칭송받는 전임자(쭐라롱꼰 대왕)의 그늘에 가려진 열외적 군주이기도 했다. 통차이 교수는 최근의 대중적 세미나에 참석해 "[현재] 왕당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발등에 총을 쏘아대고 있는 꼴"이라 말했다.

 

워치라웃 국왕의 후임자인 라마 7세 빠차티뽁(Prajadhipok, ประชาธิปก: 1893-1941) 국왕은 상황이 더욱 안 좋았다. 1932년 무혈쿠테타(입헌혁명)를 통해 절대왕정이 종식되었고, 태국 국왕이란 직위는 가장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빠차티뽁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1935년 왕위를 버리고 퇴위하면서 사태를 더욱 표류하게 만들었다.

 

빠차티뽁 국왕은 현재의 푸미폰 국왕의 형인 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 อานันทมหิดล: 1925-1946) 국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아난타 국왕은 의문의 총상을 입고 1946년 사망했다. 바로 그날 푸미폰 국왕이 차기 국왕으로 선포됐고,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신속하게 스위스로 돌아갔다.

 

1926년 빠차티뽁 국왕은 왕조의 통치 결점에 대해 솔직한 고백을 적었다. 당시 그는 한 서한에서, 새로운 시대적 흐름과 상속적 왕권의 충돌에 대해 씨름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러한 충돌이 현재의 태국 사회로까지 이어지고 있는듯하다. 당시 대중적 여론이 절대적 통치에 대해 반항하는 쪽으로 변하면서, 국왕의 통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빠차티뽁 국왕은 후계자가 될 이에 대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현명하지 못한 왕이 나오지 않도록 일정한 보장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흘렀지만, 그가 말한 보장조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태국인들은 그대신 와치라롱꼰 왕세자라는 전망과 함께 하고 있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군용기 조종사이기도 하며 상당한 군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이미 푸미폰 국왕을 대리하여 여러 의전행사들을 집전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 그는 유럽에서 휴식을 가졌지만, 현재는 태국으로 돌아와 대중들의 시야 속에 들어와 있다. 전조는 시끌벅적하고도 명료한 것이다. 푸미폰 국왕의 탄생기념 연설이 있은지 2주 후에, <방콕포스트>(Bangkok Post)는 엄숙하고 존경어린 느낌의 왕세자 약력사항을 헤드라인으로 내보내면서 "기다림 속의 국왕"(King in Waiting)이란 제호를 달았다.

 

일부일처제의 준수, 불교적 경건함, 전통적인 근검절약과 같은 푸미폰 현 국왕의 덕목들에 익숙한 태국인들에게 있어서, 와치라롱콘 왕세자는 상당히 빈약한 대체자로 여겨진다. 그의 호색한적 사생활은 태국인들의 일상적 가십거리가 되고 있다. 2007년에 광범위하게 유포됐던 동영상은 "왕실애첩"(royal consort)이라 알려졌던, 현재 그의 3번째 아내가 된 여성과 왕세자가, 평상복(나체?) 차림으로 한껏 흥을 돋운 분위기에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외교관들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예측불가능한 기벽들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령 그의 애견 푸들인 푸푸(Fu Fu)에 대한 과도한 애정 같은 것이 그것이다. 푸푸는 군대의 계급도 갖고 있고, 만찬회 석상에서 내빈들 사이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비록 그가 한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실을 부인하긴 했지만, 1980년대에는 그가 지하 범죄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로 인해 왕세자는 "시아오"(Sia O)라는 조폭 스타일의 별명도 얻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의 여동생 마하 짜끄리 시린톤(Sirindhorn, สิรินธร: 1955년생) 공주는 자비로운 보호자로서 성자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많은 태국인들은 마지막 기회로서 그녀가 왕위를 계승하길 바라고 있다. 군부 및 왕실의 일부에서도 그녀가 다음 군주가 되었으면 하고 말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에는 또다른 대안으로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자녀들에게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왕세자의 막내자녀인 티빵꼰(Tipangkara, ทีปังกร: 2005년생)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고 시린톤 공주가 섭정이 되는 방안도 회자되는 분위기이다.

 

동영상 누설은 왕세자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가중시켰고, 새로운 옵션들에 대한 고려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현재까지 푸미폰 국왕의 의중은 와치라롱콩 왕세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쪽으로 결심을 굳힌듯이 보인다.

 

푸미폰 국왕의 전기를 출판했다 태국에서 금서로 지정당한 바 있는 저자 폴 핸들리(Paul Handley)는, 푸미폰 국왕이 와치라롱꼰 왕세자로부터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절차에는 문서화된 국왕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돈 혹은 견제를 받길 원치않는 왕세자에게는 유럽에서의 망명생활도 적절했을 것이다.

 

불가피하게도 어떻게 하면 왕세자를 왕위계승권에서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또다른 유혈적 예보들도 있다. 아마도 그가 참석할 때 그의 개인 경호원들이 총을 휴대할 수 없도록 한 것도 이러한 예보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군부 내에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한 불신이 생겨난 것은, 그가 2006년 쿠테타로 실각한 탁신 전 총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통신 재벌에서 대중 정치인으로 전환했던 탁신 전 총리는 와치라롱콘 왕세자에게 상당한 돈을 통크게 지원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따라서 이 일이 2006년 쿠테타 발생의 실제적 이유였을 수도 있고, 푸미폰 국왕의 최측근인 뻼 딘술라논(Prem Tinsulanonda, เปรม ติณสูลานนท์) 추밀원(국왕자문기구) 의장도 이 쿠테타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바이에 거주중인 탁신 전 총리가 여전히 와치라롱콘 왕세자와 접촉을 취한다는 것은 그러한 왕당파들에게는 심각한 골칫거리이다. 탁신 전 총리는 최근 영국의 한 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왕위계승권자(=왕세자)를 칭찬한 바 있다.

 

와치라롱콘 왕세자가 어떤 형태의 군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랜 기간 태국 왕실에 대한 관찰자이자 사회운동가이도 한 술락 시와락(Sulak Sivaraksa, สุลักษณ์ ศิวรักษ์) 씨는, 왕세자가 3번째로 결혼하면서 상당히 성숙해졌고 과거보다는 타인을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다른 이들은 왕실법도를 존중하며 사는 시린톤 공주와 달리, 와치라롱콘 왕세자가 여전히 왕실법도에 쉽사리 염증을 느끼곤 한다고 말했다.

 

태국 왕실에 관한 전문가들은 왕세자가 무엇보다도 향후의 정치적 함정들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 능력있는 측근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향후 추밀원 위원들을 자신의 측근 인사들로 교체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오랜 기간 푸미폰 국왕을 보좌해온 왕실의 고위급 인사들은, 그렇기에 왕세자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빠져나갈 곳이 있다면 환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외국 학자는 말하기를, 새로운 인사들이 최근 발생했던 쿠테타와는 "완전히 무관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 말했다.

 

 

 

 

강하지만 서툰

 

작년(2009)에 아피싯 총리가 정치세력을 재편해 개각을 하고자 했을 때 이러한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가 선택한 경찰청장 후보가 자신의 내부 팀 안에서 반대에 부딪친 것이다. 그의 팀 내부에는 와치라롱콘 왕세자의 측근이기도 한 니뽄 뽐빤(Nipon Prompan)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니뽄 뽐빤은 또다른 이를 경찰총장 후보로 밀었다. 이전에 탁신 전 총리 내각에서 국가정보당국 수장을 지낸 이 두번째 후보를 밀어부친 사람은 "힘있고 강력한"(powerful and mighty) 후원자라고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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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이미 개입하고 있다.

 

니뽄 의원은 후에 내각에서 사퇴했다. 아피싯 총리는 현재 서리(대행)로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신의 측근을 신임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파동은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서투른 개입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내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건은 또한 푸미폰 극왕의 측근 인사들 사이에서도 경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관계자는 왕실 측근인사들이 와치라롱콘 왕세자에 대해 평가하기를,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아무일도 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게 됐다고 한다.

 

실제로 군대 및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 관료들에게 왕실은 오랜 기간 보호자 역할을 해왔고, 이것이 태국에서 권력이 운용되는 한 방식이었다. 탁신 전 총리가 왕실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권력통제력 발휘를 제한하려 한 것이었다.

 

아시아 국가의 한 고위급 외교관에 따르면,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군대의 고위인사를 새롭게 재편하는 정례적 추계 인사이동에도 개입하고 싶어 안달했고, 그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성공적이냐 하는 요소가 그가 얼마나 장수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또다른 가능성으로는 탁신 전 총리에 대한 국왕사면령을 들 수 있다. 만일 탁신 전 총리가 사면을 받게 된다면, 그는 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국왕을 위해 국정을 관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레드셔츠들이 반기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방콕의 엘리트들에게는 소름끼치는 일이고, 동시에 군부도 분열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왕실의 공적 지지기반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은 별로 이뤄질 것 같지가 않다. 왕세자의 정치적 지인 한 사람은, 왕세자 역시 자신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태국 군주제가 이전의 규모로 후퇴하는 것도 현재의 곤경에서 빠져나가는 한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공화주의적 함의를 지닌 아래로부터의 압력보다는, "위로부터의"(top-down) 개혁이 태국적 구미에 더 잘 들어맞을 수도 있다.

 

푸미폰 국왕 치세에서 태국 왕실의 권위는 이미 1992년 5월에 그 정점을 찍었다. 당시 푸미폰 국왕은 군사 지도자에게 사임하라고 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푸미폰 국왕의 권력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2008년 푸미폰 국왕은 노란셔츠(PAD)가 자신의 이름하에 혼돈을 일으키는 것을 중지시키지 못했다. 한 고위급 궁정 인사는 "우리가 국왕에게 너무 많을 것을 기대한다"며 탄식했다.

 

태국은 지금 명백하게 새로운 평형상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약해진 왕권을 틈타 군부가 그 권력공백을 차지하는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는 벌써 왕궁의 황금빛 찬란한 외벽 속에 강철처럼 박혀있다. 하지만 2006년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장성들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서투른 모습을 보였고, 결국 15개월 뒤에 민간정부로 권력을 이양했다.

 

재계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고 있고,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이 국사를 돌보길 원하고 있다. 2012년 총선에서는 정당 운영과 관련해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여러 국회의원들이 새롭게 정계로 복귀할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법칙이 재편되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푸미폰 국왕이 태국의 민주주의가 확고한 제도적 기반으로 정착하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공유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폴 핸들리는, 푸미폰 국왕이 "소수의 좋은 사람들"과 군부가 국가를 조종토록 함으로써 태국을 곤경에 빠뜨렸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은 푸미폰 국왕에게는 슬픈 황혼이다. 분명하게 억압적 정치상황을 지닌 역내 국가들 사이에서, 태국이 자유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정치적 상황으로 관료들이 확고한 복지부동과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급속하던 경제성장의 호흡을 끊어버렸다. 서방의 인권운동가들은 1990년대에 태국 시민사회가 가진 역동성이 이웃국가들로도 전파되길 희망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램과는 반대로, 일부에서는 태국을 종기난 민주주의의 경계할만한 전설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다소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 태국의 라이벌 정파인 레드셔츠(UDD)와 노란셔츠(PAD)는 민주주의에 관해 의견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양쪽 모두 공정한 시스템은 바라고 있다.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아시아재단"(Asia Foundation)은 작년도(2009년)에 태국인들의 정치적 관용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여론조사에서 79%의 응답자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친숙하지 않는 정당들이 활동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라 답했다. 반면 친구가 이념이 다른 정당에 가입할 경우 만나지 않을 것이라 답한 사람들은 6%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태국이 보다 건강한 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특정한 조건 하에서라면 권위주의 통치를 인정할 것이라 답한 사람들도 30%에 달하긴 하지만, 거의 모든 이들이 민주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정부 형태라는 데 동의했다.

 

태국은 아직까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말썽많은 정치에는 왕위에 관한 사항 역시 지분을 가졌다고 포함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태국인들이 믿고 있듯이, 푸미폰 국왕의 서거를 입에 담는 일은 역겹고도 불길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왕권이 차지하는 지분율이 너무 높다. 또한 존경심과 공포심의 결합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는 뚜껑을 덮어놓고 있다. 태국사태 속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은 기존의 <왕실모독처벌법> 및 새롭게 제정되어 마찬가지로 구역질나는 악법인 <컴퓨터범죄 방지법>에 따라 구속된다. 한 호주인은 왕세자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가 국왕 사면령에 따라 풀려나기 전까지 감옥에 갇혀있었고,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이 푸미폰 국왕과 왕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참조☞: "왕실모독처벌법")

 

그러나 잠겨진 문 뒤편에서는 푸미폰 국왕 서거 후의 군주제의 운명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짜끄리왕조(Chakri dynasty)에 관한 오래된 예언 중에는, 이 왕조가 오직 제9대까지만 이어질 것이란 내용도 들어 있다. 푸미폰 국왕이 바로 라마 9세이다. 태국의 순종적인 언론들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공화주의자들의 목소리도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작년 12월 푸미폰 국왕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방콕포스트>는 국왕의 탄생에 대한 찬사 속에서 전형적인 자부심조의 논조와 위협을 가하며, "태국인들이 국왕 폐하를 사랑하는 것은 국가적 정신 속에서 너무도 뿌리깊게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와 달리 말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왕실(궁내청)에서는 이미 변화가 현실화될 시기를 준비하고 있다. 고위급 왕당파 인사들은 푸미폰 국왕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이 쉽사리 타인에게 이전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태국 왕실이 처해 있는 난점의 핵심이다. 술락 시와락 씨는 그 점에 관해서 푸미폰 국왕 자신이 잘 알고 있고, 국왕이 "자신의 후계가 피를 흘리지 않고 승계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술락 씨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이 최근 가장 신뢰하는 3인의 측근들에게 제도개혁에 관한 의중을 밝힌 바 있다고 한다. 그 중 한 측근이 바로 술락 씨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 측근은 제시된 해법은 국왕에게만 보일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따라서 술락 씨는 350억 달러에 이르는 "왕실재산관리국"(Crown Property Bureau) 자산을 비롯하여 회계와 관련한 투명성이 확보돼야만 할 것이라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군부와 결별하고 대중적 비판에 대해 길을 열어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술락 씨는 오직 유럽식의 명목적 군주가 되는 길만이 장차 군주제가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고목의 보존

 

술락 씨는 종종 <왕실모독처벌법>을 위반했다고 비판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골수 왕당파라고 주장한다. 그는 "나무를 잘라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술락 씨는 자신이 주장한 내용들이 짜끄리왕조를 구해낼 것이라 했다.

 

하지만 보다 급진적인 생각들은 그 가능성을 허용치 않는다. 불안정한 통치자에 대해 반대파들이 공격하는 일은 급속도로 고조될 수도 있다. 푸미폰 국왕 치세에서 반대파들의 침묵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이들이 존경심에서 비롯된 그 일들에 대해 관용적이다. 하지만 와치라롱콘 왕세자에게 그러한 관용이 베풀어질 여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보다 약화된 군주제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인가? 태국은 아직도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스페인의 경우 왕실의 1년 예산은 1,200만 달러 정도이고, 정부가 감사를 한다. 노르웨이에서는 왕실 예산에 관한 사항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 하지만 제트기를 운용하는 태국 왕실의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하기란 불가능하다.

 

태국 왕실에게는 왕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언론들이 그 문제에 침묵하는 일본의 사례가 오히려 더 나은 모델일 수도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미국이 점령하면서 일본 천왕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그 외의 왕실들의 경우, 강력한 의회가 재정규모를 삭감시키는 사례도 존재한다. 태국에서도 1932년에 바로 이러한 일이 발생했지만, 푸미폰 국왕 치세에서 다시 원상복구되었다. 태국에서 군주의 역할을 축소시키기 위한 어떤 헌법적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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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태국에서의 권력은 국왕으로부터 출발하는 보호 네트워크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 선출된 태국의 장관들이, 끊임없이 왕궁에서 나오는 신호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들의 경력을 관리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피싯 총리의 경우 수많은 왕실 관련 행사에 참석해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는데, 한 고위급 서방 외교관은 아피싯 총리가 바쁜 일정 속에서 어떻게 그런 행사들을 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왕실관련 검열제도로 인해, 이에 관한 논의들 대부분은 감춰지고 만다. 그것은 실로 유감스런 일이다. 2005년도에 푸미폰 국왕이, 자신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와선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을 실제적으로 실험할 준비는 별로 되어 있지 않다. 비록 인터넷에서는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여전히 이 타부(taboo: 금기사항)는 건재하다. 또한 태국이 단 한번도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한 바가 없기 때문에, 이제 그 국민들은 장차 다가올 험난한 길에서 스스로를 준비할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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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목록] 태국사태 2010년 3-4월 정국 : 붉은셔츠레드셔츠 100만인 행진"

 

 

 

1 Comments
미쾀쑥 2010.04.22 19:15  
개인적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들을 태사랑에 와서 알게 되네요. 결론은 물론 제 자신이 내리겠지만 이렇게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께 우선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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