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폭탄 테러와 탁신의 귀국을 연결하는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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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폭탄 테러와 탁신의 귀국을 연결하는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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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어에 "차친"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의미는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또는 "(익숙해서) 마비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차(마시는)"의 "차"와 "익숙한" 또는 "친한" 이라는 의미를 가진 "친"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직역하면 "익숙한 차" 또는"항상 매일 마시는 차"라는 것이 본래의 의미일 것이다.

태국 남부 (남부 국경 3개 짱왓)의 치안 악화에 대하여 방콕을 중심으로 하는 태국 중앙의 대응, 내지는 태도를 여실히 설명하는 말은, 이 "차친"이 제격일 것이다. 2004년 이후 남부지역의 치안이 악화되고 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 그 수는 5,000명 이상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나 정부를 비롯한 관계자는 테러와 사건에 이미 익숙해진 상태라 그런지, 거의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일이고,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는 감각이 되어 버린듯한, 약간의 참사가 일어나도 "차친"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히 남부 문제는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기본적인 요인이, 민족(종교) 문제이며, 동시에 태국이라고 하는 근대 국가의 기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4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빠타니에서는 교역을 기반으로 한 이슬람 왕국이 번창하였으나, 1785년에 방콕 왕조에 정복되어 조공국이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20 세기 초에 걸쳐, 태국이 서구 식민지 주의 국가와 영토 문제 협상을 하는 가운데, 이슬람系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남부도 태국의 영토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가 탄생했을 때도, 인근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근대적인 국경 확정으로 태국령에 속해 있던 남부 이슬람은 방치되었다.
따라서 그 후 70년대 무렵부터 빠타니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꿈을 가진 남부 이슬람系 주민의 본격적인 분리 독립 운동이 발생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태국의 역대 정부는 軍과 경찰, 또 행정을 총동원하여, 남부의 융화와 민생 안정을 위해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 왔다. 특히 쁘렘 정권 (1980~1988)에서는, 남부 국경 짱왓 행정센터 (SBPAC)를 설치하고, 지역 부흥을 지원하기도 하여, 과격한 운동은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2004년부터 급격히 치안이 악화하고, 테러가 계속 발생했다.

탁신 정권이 실시한 2001년 치안 유지 권한이 軍에서 경찰에 이양되고, 2002년 행정센터 폐지, 2003년 마약과의 전쟁 등 태국 정부의 일련의 정책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 후 쑤라윳 정권이 행정센터를 부활시키는 등 정책의 변화가 있었지만, 테러 활동은 종식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만성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월 31일 발생한 짱왓 쏭클라 핫야이市의 리가든 플라자 호텔 지하 주차장 및 짱왓 얄라의 얄라市 동시 폭탄 테러는, 일반적으로 떠돌고 있던 "차친" 현상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폭발 장소가 핫야이의 상징이라해도 좋을 리가든 플라자 호텔이었던 것도 있지만, 잉락 총리​​가 사건 발생 즉시 피해자들을 문병하러 현지로 날라간 것 등, 태국 정부가 종래와는 미묘하게 다른 대응을 보여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이번 폭탄 테러의 배경에 탁신이 연관된 것으로 밝혀져, 큰 화제가 되고있다. 사실 탁신은, 원격 조작으로, 지난해 10월 서로 속마음을 알고 있는 타위 쏫쏜 법무부 차관보를 행정센터 사무장에 보내어, 비밀리에 분리 독립운동 그룹과 평화 협상을 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협상이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고 판단한 탁신은, 2월 18일에는 말레이시아의 태국 국경 부근까지 나가 스스로 협상에 임했다. 또한, 잉락 총리​​도 3월 17일에 은밀히 협상 테이블에 참여했다는 뉴스가 나돌았던 것이다.

남부 문제에 관한 직접 당사자인 軍이 이러한 머리 너머로의 비밀 협상에 화가 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상대가 되는 그룹이 수가 많고 그 그룹 간에도 평화에 대한 태도가 현저히 달라, 협상 방법을 옆에 두고있는 軍으로는 탁신의 이 작전은 용서할 수 없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왜 탁신은 이러한 작전을 실행하였던 것일까? 귀국을 실현하기 위한 기사 회생책이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결국, 태국에 있어 국가적으로 눈앞의 가시인 남부 문제가 해결된다면, 일약 영웅이 될 것이며, 태국 국민이 모두 자신의 귀국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엄청난 사람, 물건, 돈, 정보가 오가는 태국과 말레이시아 국경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여러가지 국경 이권에 개입하면 막대한 이익이 굴러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주로 남부에서 테러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무장 세력, 빠타니 말레이지아 민족 혁명 전선 (BRN)과 협상을 하였으나, 탁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결과는 대실패였다.
BRN같이 탁신이 제공한 조건 (특별 자치구案?)을 수락, 평화에 응하겠다는 그룹도 있었으나, 적어도 일부 과격파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차친"에서 깨어나게 한 이번 핫야이와 얄라의 폭탄 테러 사건의 원인이 이러한 협상 실패에 기인한 것으로 대다수가 보고 있다는 점이다. BRN의 견해에 반발한 과격파 그룹이, 지금 이상으로 세상의 관심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사건을 계획, 실행했다는 관측이다. 어쨌든, 남부의 폭탄 테러 사건과 탁신 귀국문제가 이러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경악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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