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만성적 불안은 언제까지? 태국의 어제 오늘의 상황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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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만성적 불안은 언제까지? 태국의 어제 오늘의 상황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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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이 없는 태국?
그리고 해마다 해외토픽을 장식하는 태국의 정정?
오늘날 태국의 불안한 정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태국 정치 사회에 대한 깊은 연구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태국연구 학자가 그 현상을 분석했다.
부산 외국어대 김홍구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태국의 만성적 정치불안은 언제까지?
2006년 9월 19일 쿠데타가 발생한 후 8년이 접어드는 현재까지 태국에는 정치불안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지난 해 10월말부터 시작된 대규모 시위가 3개월여 동안 지속되고 있다. 역사상 이번과 같이 정치불안이 장기화된 적은 거의 없었으며 사태도 더욱 악화돼가는 경향이 있다.
현재 태국의 극심한 정치불안은 지역갈등과 계급갈등으로 번져 거의 내전상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탁씬이라는 인물과 그의 집권시기(2001-2006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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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씬 정권의 특성: 대중영합주의와 권위주의
탁씬 친나왓(Thaksin Shinawatra)은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중령으로 예편했다. 80년대에 컴퓨터 부품 사업을 하다가, 90년대에 들어서 휴대폰이 도입될 시기에 태국의 이동통신 사업 독점권을 얻는 데 성공해 유수의 재벌이 된다. 1994년 탁씬은 초대 직선 방콕 시장으로 잘 알려진 짬렁 씨므엉(Chamlong Srimuang)의 팔랑탐당(Palang Dharma Party)에 입당한 후 외무부장관과 부총리를 지냈으며 1998년 직접 타이락타이당 (Thai Rak Thai Party)을 창당했다. 그리고는 2001년 선심성 공약을 내걸어 태국 총선을 휩쓸고(하원 500석 중 264석 차지) 태국 총리가 되었다. 태국 최초의 4년 총리 임기를 마친 탁씬은 2005년 선거에서도 압승했다(하원 500석 중 377석). 그때까지 태국 역사상 한 개의 정당이 의회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을 얻었던 경우는 없었다. 선거결과 과거 같이 극심한 다당제로 인한 태국의 정치불안은 크게 감소했으며 탁씬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탁씬의 압도적인 승리는 선거기간 중 그가 내걸었던 대중영합주의(populist) 정책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의회 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해 안정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한 탁씬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영합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탁씬은 부실채권문제 해결, 농가부채상환 3년 유예, 농가마을 당 100만 바트 지원, 의료보험제도 전국확대, 감세와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부양 등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 같은 정책의 추진은 농촌과 서민층 유권자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국민들 사이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탁씬 개인에게 맡기려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그는 종종 “백마 탄 기사”로 불려졌다(Nelson 2001, 360).
태국은 방콕 중심으로 개발이 되어온 국가이다. 지난 수십년간 이런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20년 동안의 농촌개발은 전반적인 경제개발정책의 결과였지만 탁씬의 정책적 성과도 무시할 수 없다. 1980년 이전 지방에 할당된 국가예산은 5-10%정도였지만 2001년 16%, 이후에는 24%까지 증가했다. 농촌개발과 더불어 사회적 가치도 변화했으며 과거보다 많은 평등과 정치참여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다. 특히 농촌사회에서는 탁씬에게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Pasuk 14/January/2014).
대중영합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스스로 CEO라고 불리기를 원했던 탁씬은 일의 효율성과 업적을 중시했으며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갔다.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가 뚜렷하게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는 인권탄압과 언론자유의 훼손, 시민사회운동세력과의 갈등, 독립적인 기구들의 활동에 대한 간섭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같은 권위주의 통치행태에 대한 정치적 불만은 200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탁씬은 중산층, 시민사회, 인텔리 계층, 주요 기업으로부터 급속히 지지를 잃었으며 정당성이 약화되어갔다.
군주제 네트워크와의 갈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탁씬 정권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그 몰락을 재촉한 것은 이른바 군주제 네트워크와 갈등을 빚은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에는 1980년대 이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군주제 네트워크가 유지되고 있는데 이 네트워크는 군부, 관계, 재계 등 보수세력 동맹으로 형성되며, 그 정점에 있는 국왕이 이들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다. 2001년 선거를 통해서 탁씬은 의회 과반수 의석을 획득한 후 군주제 네트워크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기반과 기존 정치권의 합의된 위계질서를 뿌리 채 뒤흔드는 치명적인 리더십(a toxic mode of leadership)을 발휘하게 되는 데 이를 가리켜 영국 리즈 대학(University of Leeds)의 맥카고(Duncan McCargo)교수는 국왕네트워크에 대한 해체작업이라고 주장했다(McCargo 2005, 512). 결국 군주제 네트워크와의 권력공유를 거부한 탁씬의 정치행태가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탁씬은 집권 후 전통적 권력기구인 군주제 네트워크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관료체제와 군부를 확고히 장악하려고 했다. 탁씬은 행정부서를 기존의 14개 행정부서에서 20개 부서로 확대시켰다. 이 같은 관료체제의 대개혁은 1세기만에 처음 이루어진 것이었다(Pongsudhirak 2003, 284-285). 이를 통해서 관료체제의 장악력을 높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립정부 내 각 파벌을 위해 분배할 정치적 자원을 확대시킴으로써 통치 장악력을 크게 높였다. 또한 탁씬은 군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육, 해, 공군 3군사령관을 그의 지지자들로 임명했을 뿐 아니라 군사예비학교 동기생들을 군과 경찰의 요직에 승진시킴으로써 향후 그들이 군과 경찰의 주요 사령관직을 맡도록 대비해 두었다(Pongsudhirak 2003, 283-284).
전통적으로 민간관료 체제와 군은 국왕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특히 1980년대 국왕의 충성스런 신하인 쁘렘 띤쑬라논(Prem Tinsulanonda)총리 집권 이후 이 두 개 영역은 사실상 불가침의 영역과 같이 되어 있었다. 관료체제 개편과 군 인사는 왕실의 정치적 이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태국에는 아직도 관료를 카랏차깐(kharachakan, 국왕을 섬기는 자)이라고 부를 만큼 관료체제는 왕실의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었다. 뿐 만 아니라 군부는 현재도 국왕의 복심 또는 왕의 남자라고 불리는 왕실 자문기구 의장 쁘렘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탁씬은 2002년 남부 무슬림 소요사태에 대처하면서 1980년대 초 쁘렘이 만들어 놓은 남부국경지방행정센터를 해체하고 경찰 출신인 자신의 확고한 기반인 경찰력으로 대체했다. 또 보다 온건한 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한 국왕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경진압을 고집했다. 태국 남부 지역은 전통적으로 친 국왕, 친 쁘렘, 당시 야당인 친 민주당(쁘라차티빳) 성향을 보였던 지역이었다. 남부사태에 대한 강경진압에 직면해 이 지역 무슬림들은 탁씬을 퇴진시키고 국왕으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임명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탁씬은 태국사회에서 불가침의 영역에 속해 있는 국왕에 대한 존경심을 의심받을 언행도 자주 표출해 수차례 왕실모독금지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정치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의심도 받았다.
군주제 네트워크의 이해에 반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 속에서 반 탁씬 세력들은 국왕을 정치에 끌어 들이려 다양하게 시도했다. 2005년 말 탁씬의 권위주의 통치행태와 비리혐의에 대한 반발로 친왕정파를 자처하는 쏜티 림텅꾼(Sondhi Limtongkul)이 이끄는 민주주의 국민연맹(PAD: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주도 의 탁씬 정부퇴진운동의 초점은 정부의 부정부패를 비난하면서 "국왕에게 권력을 반환"하라는 데 맞추어 졌으며 1997년 헌법 제7조에 의거하여 국왕 직권으로 새로운 정부를 임명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탁씬 정부의 정통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부정부패 문제였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한 특정 기업특혜, 주가조작, 특정집단을 위한 경제정책 입안, 공무원사회의 부정부패, 뇌물 등 부정부패의 유형도 다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쑤완나품 신공항 검색대 폭발물 탐지장치(CTX bomb scanner) 도입 수뢰의혹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현직 교통부 장관이 사임했다. 쑤완나품 신 공항과 도심 연결철도 공사, 신공항 면세점 계약, 신 공항 파이프라인 설치, 신 공항 보안계약, e-passports, 스마트 카드(smart cards), 복권, 저소득층 주택계획, 쓰나미 복구 계획, 고무농장 프로젝트, 농업은행의 토지 매입사건, CDMA 네트워크 설치 등과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 등도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불만을 산 것은 탁씬과 가족, 친지의 부정부패문제였는데 주식매각사건은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탁씬과 그 일가는 보유하고 있던 친 코퍼레이션(Shin Corp.)의 지분 49.59%를 싱가포르 국영투자기구인 테마섹(Temasek)에 모두 매각, 총 733억 바트의 수익을 얻었고, 합법적인 면세 혜택을 받아 260억 바트의 세금 역시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탁씬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쿠데타의 주요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태국정치는 부패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다. 많은 태국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과거 태국의 부패가 “망고 한 잎을 베어먹는 정도였다면 탁씬의 경우는 망고나무를 통째로 삼키려했다”고 비난받고 있다. 탁씬이 2006년 쿠데타로 물러난 후 대법원은 그의 부인이 공공용지를 매입하는데 탁씬이 권력남용했다는 혐의로 2년형을 선고했으나 탁씬은 형 집행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 쿠데타 후 탁씬 전 총리의 부정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산조사위원회는 탁씬 부부의 460억 바트(약 1조 6000억 원)상당 금융자산에 대해 동결 조치를 내렸으며 이후 대법원은 이를 몰수하기로 판결을 내린 바도 있다.
위의 쏜티 림텅꾼이 이끄는 PAD의 정치적 공세 속에서 탁씬은 2006년 4월 2일 총선을 실시해 재신임을 얻고자 했다. 총선 결과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야권의 보이코트 하에서 치러진 절반의 총선에 대한 야권의 반발이 지속되는 가운데 국왕을 알현한 직후 탁씬은 총리직에서 일시적으로 퇴진할 것을 결심해야 했다. 뿐 만 아니라 국왕이 2006년 4월 25일 행정법원 판사들을 임명하는 자리에서 4월 2일 치러진 총선은 비정상적이며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발언 한 후인 5월 8일 헌법재판소는 총선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국왕은 정치적 위기의 분수령이 되는 시점마다 예외 없이 사법부 카드를 이용하여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2006년 쿠데타 후 출현한 이른바 신 관료지배체제의 한 축인 사법부를 이용한 정치개입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일컬어 소위 정치의 사법화 현상인 ‘뚤라깐피왓’ 이라고 부른다.
쿠데타-새 헌법-총선
친, 반 탁씬 세력사이의 한 치도 양보 없는 정치적 대결이 지속되는 가운데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탁씬 정부는 붕괴되었다. 쿠데타 주도자들이 행동에 앞서 국왕의 재가를 미리 얻었다는 무성한 소문과 함께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하였고 1991년 이후 15년 만에 태국에는 다시 군부정권이 등장하였다.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군부는 주요 이유 중 한 가지로 탁씬 총리의 왕실모독을 주장했으며 국왕은 쿠데타를 즉각 승인한 후 추밀원 위원인 쑤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을 총리에 임명했다. 후일 탁씬은 쿠데타의 배후세력으로 쁘렘과 쑤라윳 등을 지목하기도 했다.
쿠데타 발생 후 쑤라윳 과도정부 하에서 2007년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다. 이 헌법은 태국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1997년 헌법을 개정한 것이었다. 97년 헌법은 직선 총리제(1992년 헌법부터 실시)와 태국 최초의 직선 상원제 도입, 정당과 의회체제 강화, 군소정당들의 무분별한 난립과 불안정한 연립정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적 불안정을 불식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방안들을 마련해 두었다. 또한 행정부와 입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법권을 강화시키고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사법적, 준사법적 기구도 신설했다.
쿠데타 후 만들어진 2007년 헌법은 1997년 헌법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2007년 헌법은 1997년 헌법개정 이전 태국정치가 갖고 있던 문제점들의 상당부분이 다시 되살아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2007년 헌법은 총리와 행정부 권한 약화, 다당제 도입, 사법적, 준사법적 기구의 역할을 대폭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 헌법은 현실정치의 힘의 논리에 따라 또 다른 정치세력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1997년 헌법은 군과 관료지배체제 영향력이 배제된 헌법이었지만 이들의 축소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이 2007년 헌법개정시 반영됐다(군, 임명 상원의 권한 확대).
2007년 헌법은 결국 탁씬 정부 출범 후 약화된 기존 관료지배체제 강화시도였다고 볼 수 있으며 80년대 쁘렘 정부가 고수하고자 했던 국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체제 중심의 정치구도의 복원시도 같은 것이었다.
치양마이대학교 쏨차이(Somchai Preechasilpakul)교수는 2007년 헌법은 3개 주요 기구로 구성되는 신 관료지배체제(new bureaucratic polity)의 출현-(군과 관료들로 구성되는) 임명직 상원과 선거관리위원회, 반부패위원회, 헌법재판소 같은 독립적인 기구들과 사법부-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Askew 2010, 12). 다시 말하면 쏨차이가 주장한 신 관료지배체제는 관료체제가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고전적인 관료지배체제(bureaucratic polity)나 군부가 민간관료체제를 지배하고 정치에 개입한 집정주의적 정치체제(praetorian political system)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반 탁씬파들에게 유리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후 치러진 2007년 12월 총선에서 친 탁씬계의 팔랑쁘라차촌(PPP: Palang Prachachon) 당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PPP 집권 후 태국 정국은 극도로 불안했다. 반 탁씬 세력 PAD는 탁씬의 대리인(nominee) 정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총리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PAD 시위로 정치 불안이 조성되었을 때 헌법재판소는 두 차례 씩이나 친 탁씬 세력에게 치명적인 판결을 내렸다. 싸막 쑨터라웻(Samak Sundaravej) 총리의 총리직 무효판결과 PPP 해산 판결이 그것이다. 특히 싸막총리는 TV 요리쇼에 몇 차례 출연했다가 고위 공직자의 개인기업 취업 금지를 위반했다는 비교적 사소한 혐의로 총리직을 박탈당해야 했다. 탁씬은 싸막이 물러난 후 총리직에 취임했던 쏨차이 웡싸왓(Somchai Wongsawat)정권이 PAD 시위로 또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쁘렘과 군과 헌법재판소 때문이며 이는 실제로 이들이 침묵의 쿠데타(silent coup)를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비난했다(The Nation 30/March/2009).
군부 역시 팔랑쁘라차촌 당에게 비우호적이었다. 군은 탁씬 계열의 싸막과 쏨차이 정권때 벌어진 반 탁씬 옐로셔츠의 정부청사점거(2009년 8월-9월), 의회봉쇄(10월), 두 곳의 국제청사 점거(11-12월)때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진압하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군은 적어도 두 차례나 쏨차이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2008년 12월에는 민주당(쁘라차티빳당). 찻타이당, 프어팬딘당, 루웜짜이 타이 찻팟타나당과 네윈 파벌(Friends of Newin)의 연립정부 구성 막후에 군이 있었다. 당시의 민주당 중심의 연립정부 구성은 군이 개입된 조용한 쿠데타(silent coup)라고 비난받기도했다. 하지만 군은 친 탁씬 레드셔츠가 2010년 5월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며 조기총선을 요구했을 때 무력 진압하여 1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발생하게 했다.
그 후 치러진 2011년 선거에서 탁씬계열 정당인 프어타이당(Phue Thai Party)이 의회 과반수 의석을 상회하는 262석을 차지했다. 제2당인 민주당(159석) 보다 무려 100여석을 앞선 것이다. 그러고 보면 2001년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탁씬계 정당은 승리한 셈이 된다. 탁씬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이 총리에 올랐다. 잉락 총리 집권후 정국의 파고는 다시 예견되었다. 무엇보다도 선거결과 다시 한번 계층 간, 지역 간 갈등이 확인됐다. 프어타이당은 계층적으로 도시 빈민과 농민층, 지역적으로는 동북부와 북부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반면 민주당은 방콕 중산층과 남부 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 같은 선거 결과는 정국 불안요인으로 상존하게 되었으며 잉락 정부가 해결해야 할 제1의 과제였다.
1990년대 초이래 태국에는 지역별로 선호정당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선거 후 타이락타이당은 쾀왕마이당, 쎄리탐당, 찻팟타나당 등 지역기반을 가진 연정 참여정당 합당에 성공해 북동부와 북부에서 의석을 휩쓸었다. 반면에 방콕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은 민주당이 강세였으며 남부지역은 민주당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고착화되어 갔다. 특히 북부와 동북부 지역 주민들은 저소득층이었기 때문에 지역화 현상은 계층갈등과도 일치하게 되었다.
잉락정부와 전면적 사면법안의 추진
잉락정부 집권 후 가장 집요하게 추진한 것은 두 가지 였다. 이는 모두 탁씬의 귀국과 사면을 겨냥한 것이다. 그 중 한가지는 전면적 사면법안의 추진이고 또 한가지가 헌법개정이었다. 헌법개정의 궁극적 목적은 탁신의 사면복권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야권의 거센 반발로 일단 몇 개 조항의 개정만을 추진했다. 그 중 하나가 상원선출 방식의 변경이다. 현행 헌법상 상원 의원은 76 개 주에서 각 1명씩 총 76명을 선출하고, 74명은 직능 단체 등의 추천을 받아 선임위원회에서 임명하고 있지만 개정안은 상원 전원 선출 방식을 직선으로 하고 하원의원의 직계 가족도 상원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개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하자 민주당에서는 헌법재판소에 헌법 68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제소했다. 헌법 68조는 "어떤 누구도 헌법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를 행사해서 입헌군주제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조항으로 이를 위반하는 정당은 해산되고 그 정당 집행부는 5년 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헌법재판소는 개정안이 헌법 68조를 위반하기는 했으나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 소속 정당의 해산을 초래할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헌법재판소는 현재 임명제와 직선제로 선출되는 상원의원 모두를 직선제로 선출하게 되면 의회 내 견제와 균형을 훼손시키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동 법안을 지지한 정당의 해산 및 상·하원 자격 박탈 요청에 대해서는 판결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기각했으나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정부여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크게 반발했다. 민주당 등 반정부세력은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어찌 되었든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사태악화를 증폭시키게 되었다. 야권은 정부가 계속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홍보전에 나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탁씬의 귀국과 사면을 성사시키기 위한 또 한가지는 전면적 사면법안의 추진이었다. 사면법안 추진은 작금의 정치위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이 법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 정부는 이송된 법안을 재발의 하지 않겠다고 수차 다짐했지만 민주당을 비롯한 반정부 연합세력들은 이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면법안의 원안이 하원에 처음 상정되었을 때만 해도 정부는 탁씬의 사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원안 심의 과정에서 전격적으로 수정안이 만들어져 탁씬 사면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수정안은 탁씬의 사면은 물론이고 해석여하에 따라 몰수재산의 환원도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반정부세력은 사면법안 문제를 이용해 잉락 총리 집권 2년여 동안의 몇 가지 실정-쌀수매가 정책 실패와 메가프로젝트 추진의 불투명성, 부정부패 등-을 이유로 들면서 정권퇴진을 주장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은 "탁신체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사태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야권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실패한 정책이나 법안들은 이른바 "탁씬 킷 프어타이 탐"(탁씬이 생각하면 프어타이당은 해낸다) 정책기조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야권은 마치 의회 내 소수파로 그 동안 겪은 설움을 씻어내려고 단단히 벼르는 듯했다. 반정부세력의 리더인 쑤텝 트억쑤반(Suthep Thaugsuban)은 사면법안을 지지한 하원의원 310명의 탄핵안을 상원에 제출하였으며, 태국정치의 만병의 근원이 되고 있는 "탁씬체제" 제거를 위해 시위를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정부세력은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정부 불복종 운동에 돌입했다. 야당인 민주당과 쑤텝이 이끌고 있는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 People's Democratic Reform Committee)는 현 정부와 의회는 믿을 수 없으니 새롭게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중립적 인사를 총리로 임명해 "탁신체제"를 제거하고 정치개혁을 추진하자는 주장을 했으며 잉락 총리는 이런 초헌법적 발상에 대해서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악화되고 있는 정국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느낀다면서 의회를 해산하고 2월 2일 총선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민주개혁위원회는 잉락 과도정부 퇴진, 선 개혁 후 선거를 주장하며 총선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방콕 셧다운(shut down) 에 돌입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한편의 친정부 레드셔츠는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자는 주장을 하면서 PDRC의 비민주적인 자세를 비난하며 더 이상의 국정혼란이 발생하면 자신들도 물리력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게 되었다.
2014년 총선과 향후 전망
반정부 시위대의 선거 보이코트 속에서 치러진 2014년 2월 2일 태국 조기 총선의 투표율은 예상대로 극히 저조했다. 전국적인 투표율은 45.8%로 2011년 총선 때의 75%에 훨씬 못 미쳤다. 아직 최종 투표결과가 언제 발표될지는 정확히 예상할 수 없지만 일단 프어타이당이 압승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프어타이당은 지역구 240석, 비례대표 60석 등 모두 300석 정도를 획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지만 앞으로 후보 등록과 사전투표가 무산된 선거구에서 재선거를 실시한 뒤에 선거 결과가 확정될 예정이어서 최종 의석수는 다소 가변적이다. 프어타이당은 2011년 선거에서 지역구 204석과 비례대표 61석 등 모두 265석을 차지한 바 있다.
선거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반정부 세력은 벌써부터 절차상 하자가 많다는 이유로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헌법재판소에 선거 무효 소송도 제기할 방침이다. 이번 총선이 같은 날 일제히 실시해야 한다는 헌법 108조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현재 후보 등록이 무산된 남부지역 28개 선거구와 12월 26일 사전투표가 취소된 83개 선거구는 오는 23일 투표를 다시 실시할 예정이다.
앞으로 정국의 향배는 일차적으로는 헌법재판소를 비롯해 부패방지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 독립기구의 역할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기구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2006년 쿠데타 후 만들어진 2007년 헌법에서 그 기능과 역할이 크게 강화된 바 있다.
헌법재판소는 향후 선거무효 소송과 관련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헌법재판소의 활동은 시작되었다. 상원법 개정안(현재의 일부 선출 일부 임명에서 전원 선출로의 개정)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후 부패방지위원회는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킨 308명의 상하원 의원들을 조사해 고발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잉락 총리는 고발대상에 오르지 않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재선된 의원들은 그 신분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수도 있게 되었다.
부패방지위원회는 쌀수매정책에 대한 실패를 물어 상무부 장관 등 관련자들을 기소하기로 결정했을 뿐 아니라 정책을 총괄했던 잉락 총리를 추가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 이유는 쌀수매로 인한 막대한 세수손실과 부정부패, 중국과의 정부 대 정부 쌀 수출 계약서의 허위 작성 혐의 때문이다. 이 같은 사건이 잉락 정부에게 불리하게 판결이 된다면 그 정당성을 크게 훼손시키고 반정부운동에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일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은 2월 2일 총선일이 발표되고 나자마자 정국 불안 심화 우려가 있다고 선거불가론을 주장하더니 총선연기를 놓고 정부와 대립관계에 놓였다가 헌법재판소에 선거일 연기에 대한 권리를 누가 갖고 있나를 문의했다. 헌법재판소는 예정된 조기총선을 연기할 수 있다고 판결하면서 다만 잉락 총리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함께 논의 후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는 예정대로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반정부세력은 헌법재판소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번 선거는 불법선거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재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와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될 것이다.
군의 동향도 정국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군은 지난 10월말 이후 정치위기가 고조되는 중에 일관되게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며 양측은 한 발씩 양보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면서 어느 편도 아닌 국가와 국민편에 설 것임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마음은 PDRC에 가 있는 상태이다.
군은 2006년 쿠데타를 일으켜 탁씬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그 후 치러진 2007년과 2011년 선거에서 탁씬계열 정당인 팔랑쁘라차촌당과 프어타이당(Pheu Thai Party)이 의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서 두 차례씩이나 재집권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군의 현실적 인식 때문에 군은 선뜻 직접적인 정치개입을 자제하고 있다. 2010년 5월 친 탁씬 레드셔츠의 대규모 시위 진압과정에서 1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발생하게 해 지금까지 그 책임소재를 두고 시달리고 있는 군의 입장도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앞으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면 결국 군이 개입하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예상이다.
얼마전 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있던 중 쁘라윳 찬 오차 (Prayuth Chan-ocha) 육군 사령관은 “사회 갈등이 폭력화되거나 해결이 불가능해 질 경우 군이 나서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면 군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치적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군은 반정부적인 자세를 확연히 보이고 있다. 얼마 전 국민민주개혁위원회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붙잡힌 괴한들의 정체가 해군 현역군인임도 밝혀졌다. 그들은 쑤텝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띠었다고 알려졌다.
선거가 있기 전 날 방콕 북부 락씨 교차로에서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투표함과 투표용지 배달을 막고 있던 반정부 시위대와 총선을 지지하는 친정부 시위대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수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용된 무기가 군으로부터 반입 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군은 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군의 의심받을 만한 태도를 놓고 한 태국 일간지에서는 인상적인 표현을 했다. 군이 총격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태악화는 군 쿠데타의 명분을 만들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선거 직후 미 국무성에서는 쿠데타 발발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군은 부인하고 있지만 선거무효운동의 상황전개에 따라서는 군의 개입은 언제라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총선은 끝났지만 정국의 불확실성으로 만성적 정치불안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앞으로 선거 무효화 운동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재선거는 제대로 실시될 수 있을지? 각 종 현안에 대해 헌법재판소, 부패방지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이런 과정에서 친, 반정부 세력사이에 유혈충돌이 발생한다면 군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는 정국전망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출처: 해피타이
2 Comments
참새하루 2014.03.18 02:08  
단편적으로 얻어듣던 정치판을
전문가 입장에서 통찰력있게 잘 정리한 글이네요
아자쓰 2014.03.18 10:18  
와... 태국의 현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있는 자료입니다.;;

제가 이해를 다 못하여서 그런거죠 ㅎㅎ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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