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도시★바라나시(Varan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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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도시★바라나시(Varanasi)

인도지기 0 1508

바라나시 (Varanasi)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인도여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으로 타지마할과 함께 이곳 겐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를 꼽을 수 있다. 인도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보다 더 인도를 잘 비추고 있는곳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 인도인과 그들의 삶 그리고 종교가 아닌 삶의 한부분으로 여겨지는 힌두이즘을 모두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곳 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아침에 나와 이곳에 몸을 담그며 누굴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일까? 보기만해도 매쓰거지는 이물을 마시고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이곳에서 빨래를 하며 결국 주검이 되어 이물에 뿌려지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강의 의미는 어머니 이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24시간 365일 전국에서 몰려드는 주검들의 화장으로 불길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 이곳은 죽은 영혼의 부활을 바라는 힌두인들에게는 삶의 한부분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인도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는 이곳 바라나시는 인도 여행함에 있어 이방인들에게는 낯설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도인들의 삶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라나시라는 오늘날의 이름은 시의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흐르고 있는 바루나강과 아시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국이 통치하던 시절엔 베나레스라고 영어식으로 표기되어, 지금도 이곳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불교의 석존께서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룬 후 자신이 증득한 법을 처음으로 펼친 곳인 사르나트도 바로 이곳 바라나시의 영역으로, 바라나시의 시가지에서 1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치이다.

3,000여 년을 이어온 힌두 성지로서의 바라나시는 석존 이후 번성했던 불교의 세월과 11세기 무렵에 이곳으로 진출하여 무굴 제국까지 이어진 회교의 세월을 겪으며 많은 것이 바뀌는 시련을 넘겨야 했는데, 특히 무굴 제국의 말기인 아우랑제브 시대에는 거의 모든 바라나시의 힌두 사원들이 파괴되거나 회교사원으로 바뀌는 곤욕을 치루어야 했었다.

무굴 제국의 몰락으로 1738년에 시작될 수 있었던 작은 힌두 왕조를 기점으로 바라나시는 다시 힌두권이 되었지만, 그동안 이곳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회교의 세력과 공존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고, 이처럼 두 종교를 엇갈려 있는 바라나시는 오늘날 기회만 있으면 양자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격렬하게 터지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종교를 토대로 한 도회지로서의 오랜 역사를 지닌 바라나시는 따라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하여 오며 많은 인물들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범어의 단어 변화를 외우느라 고심하는 학자를 목격하게 된 샹카라차르야가 그 학자에게 범어에 능통하게 되는 것은 신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냉엄하게 일깨웠다는 일화나 깔리다사가 범어를 익히기 위해 이곳 바라나시로 유학을 왔었다는 일화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현대 인도의 범국가적 언어가 된 힌디어의 체계를 잡고 발전시켰던 툴시다스 등의 일화는 이곳이 오랫동안 학문의 중심지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널리 인용되는 것이다.

또한 인도의 고전음악을 서구에 알리고 널리 보급시킨 최고의 유공자로 꼽히는 라비 상카르로 대변되는 이곳의 예술적 전통은 오늘날에도 활발하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음악과 춤을 공연하는 크고 작은 연주회가 끊임없이 진행되며 뿌리 깊은 예술의 고장으로서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석존의 호사스러웠던 왕자 시절을 묘사하는 문헌에 그가 카시 비단으로 만든 옷만을 입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그 옛날부터 바라나시는 전통의 비단 산업을 위주로 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바라나시의 이 유명했던 비단 산업은 지금도 변함없어 바라나시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비단 집에 고용된 호객꾼들로부터의 유혹을 한번이라도 받지 않고서는 바나라시를 떠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강물에 목욕을 함으로써 죄가 씻겨지는 것이라면 물 속에 사는 고기야말로 최고의 성자가 아니겠냐는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갠지스 강가에서 정화의 의미를 품고 목욕하는 사람들이 3,000여 년을 이어가며 매일 같이 재현되고 있는 힌두의 성지로서의 바라나시, 세계 그 어느 도회지도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이곳처럼 종교적인 관습이나 의식과 완벽하게 뒤섞여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인도의 어머니인 강가와 가트

바라나시의 생명이며 인도의 어머니이기도 한 강가(갠지스강), 그리고 그 강변에 이어진 가트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볼만 한 곳으로 빼놓아서는 안 될 곳이다.

구시가지인 강의 서쪽 기슭을 따라서 60개의 가트가 늘어서 있다. 가트란 강변에서 강물로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제방으로 목욕하는 장소로 이용되지만, 힌두교도의 화장터인 경우도 있다.

도시에서 각 가트로는 길이 연결되어 있으며 강변에 나란히 지은 왕후의 별장과 사원들이 그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강물이 불었을 때의 수면이 남긴 흔적이 건물 벽 꽤 높은 곳까지 남아있기도 하다. 수위는 계절과 강우량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건조기인 12월 ∼ 5월 무렵이 되면 무척 낮아지게 된다. 수많은 가트 중에서도 이 도시에 오는 순례자들에게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곳은 북쪽에서 바루나상가므·판치강가·마니카르니카·다샤슈와메드·앗시의 5개소이다.

그 중에서도 시 중심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다샤슈와메드 가트로 가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강을 따라 걸어서 가까운 가트로 갈 수도 있으며, 목욕하는 풍경을 구경하는 보트도 이곳에 많다.

가트에 가는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강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자, 가트에서 바라보는 강가의 일출은 참으로 장관이다. 또 새벽에 이곳으로 목욕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으므로 될 수 있으면 일찍 일어나 가트로 나가자, 가트에서는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다양한 계층의 순례자를 볼수 있다. 이곳에서는 현세의 차별적인 관계를 떠나 같은 모습으로, 오로지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열망이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는 강가에 바치는 꽃을 파는 여인들이 행상을 하고 있으며, 그 앞에는 거지들이 죽 늘어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요구한다. 야윈 이들을 앞세운 여인, 아직 어린 아이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노인 등, 걸식하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잔돈이나 음식을 공양하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기쁨일 것이다. 가트의 돌계단을 내려가 보면 바로 눈앞에 모든 인간의 영욕을 초월한 강가가 유유히 소리도 없이 흐르고 있다. 거기에서 진홍색 태양이 수면을 물들이며 솟아오르고 있다. 먼저 목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인간 세계에 빛을 주기 위해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회전하고 있는 것 같은, 인도의 시간의 흐름 자체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다. 여행자도 여기에서 목욕하지 않으면 온 보람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목욕광경을 바라보는 것과 한번이라도 강가의 물에 안기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얼핏 보기에는 물이 탁해 보이지만, 강가는 성스런 강이므로 공해 오염의 걱정은 없으며, 오싹할 정도로 차가와서 특히 좋다. 강변에서 조금 멀리 가면 화장해서 던져진 유아의 시체 같은 것이 떠가기도 하고 커다란 물고기가 불쑥 수면으로 등을 내보이기도 한다. 강변에는 바라문이 파라솔 아래 앉아 목욕하러 온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목욕할 때는 룽기(두르는 천)를 준비해서 그 근처에서 갈아입고 옷들을 그곳에 맡겨 놓아도 좋다. 바라문이 당신의 머리에 맑음과 축복의 표시를 붙여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준다면 얼마쯤의 보시를 바치면 좋다. 강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왼쪽으로는 악어에 탄 강의 여신 강가 상이 모셔진 작은 사원이 있다. 종을 울리고 시주를 한 뒤 참배해 보자.

절 옆에서는 신자들이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근처에는 노점인 선물용 가게가 있다. 구리 항아리에 강가의 성수를 담은 것(강가 자리라고 한다.)이 흥미롭다. 조금 북쪽에는 화장터 마니카르니카 가트가 있다.

멀리서 대나무 틀에 운반되어 온천으로 둘둘말린 사체는 이 가트에서 화장되어 그 모습을 잃는다. 남은 재는 모두 강으로 흘려보내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타오르는 장작과 불꽃에 휩싸인 시체, 그리고 연기와 이상한 냄새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지만 인도에서는 그 삶이 명백한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모습도 명백하다. 타는 것을 기다리는 가족뿐만 아니라 타고 남은 것을 노리는 개와 길을 잃고 이곳에 온 흰 소도 이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 맞은편에는 멀지 않아 이들 살아 있는 것 모두를 살켜 버릴 강가가 무표정하게 유유히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을 삼키며 흐르는 대하는 바다로 흘러들고, 하늘로 돌아가 다시 모든 물이 원천이 되어 계속 흐르는 것이다.

이 마니카르니카 가트로는 비슈와나트 사원의 뒤에서 걸어서도 갈수 있고 보트를 타고 강쪽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가트에 앉아 있는 것에는 참견하지 않지만,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이다.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반드시 말썽이 생기게 될 테니까 카메라를 가지고 가더라도 가방 속에 넣어두자. 걷는 것이 즐거운 비슈와나트 사원으로 가는 길 다샤슈와메드 가트에서 되돌아오면 릭샤가 대기하고 있는 부근의 바로 앞 오른 쪽으로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골목길이 보인다. 이길이 비슈와나트 사원의 참배로로 좁은 길이지만, 약쪽에 빽빽이 가게가 들어서 있어서 마치 번화한 도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계의 중심'을 의미하는 불리는 이 사원은 18세기에 건조되었다. 지붕이 금박으로 입혀져 있어서 Golden Temple이라고도 불린다. 

-사르나트 (녹야원)

사르나트는 우타르프라데쉬 Uttar Pradesh주의 바라나시에서 12km 떨어져 있다.

힌두교의 최대 성지 중의 하나인 바라나시의 지척이지만 바라나시의 혼잡과는 거리가 멀게 조용하고 한가 한 곳 이어서, 사뭇 색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일설에는 브라흐닷타 왕이 이곳에 사슴들이 살도록 풀어 놓았기 때문에 사슴의 동산 (鹿野苑)'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용하고 평온 해 보이는 한쪽에는 아직도 사슴 몇 마리가 무리 지어 살고 있어 녹야원이라는 이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성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리쉬파타나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내용을 처음으로 세상에 펼친 곳이었다. 그러므로 사르나트는 석존과 깊은 관계가 있는 다른 세 장소-태어나신 탄생지 룸비니와 깨달음을 증도한 성도지 부다가야 그리고 세상을 떠나신 열반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법의 바퀴를 처음으로 굴린 초전법륜지로서 불교의4대 성지중의 하나이다. 깨달음을 증득한 석가모니께서 그 내용을 펼칠 대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한때 그가 스승으로 섬겼던 알라라 카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였다고 한다. 그러나 특유의 신통력을 통해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 석가모니에게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들은 부다가야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같이 고행하며 수행하였던 다섯 도반들인 콘단나, 밧디야, 밥파, 마하나마, 그리고 앗사지였다고 한다. 구도를 위한 수행이라면 그 어떤 고행도 망설이지 않았던 구도자 싯다르타를 수행의 귀감으로 삼고 따르던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강(江)가의 소녀 수잣타가 제공하는 우유죽을 먹는 싯다르타를 지켜보며, 고행을 깨뜨리게 된 타락한 수행자에게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것이냐는 탄식을 남기고 떠났다. ' 무상정각(無上正覺)' 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확연하게 증득한 석가모니로서는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특유의 신통력으로 이들이 사르나트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석가모니는 오직 법을 나누겠다는 목적으로 250km가량의 길을 11일(일성은 7일) 동안 단신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사르나트에 오신 부처님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은 부처님께 인사조차도 하지 않을 것이며, 청한다면 앉을 자리를 내어주기는 하겠지만 일어서서 마중하지는 않을 것이며 혹시 법(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에,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안온한 표정을 보고 도취되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맞이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불.법.승 삼보가 형성되었다.

사르나트는 아라한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 다섯 수행자들에 얽힌 일화 이외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당시 어떠한 반향(反響)을 일으켰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야사 일행과의 일화도 간직하고 있다.

바라나시에 기반을 둔 부호의 아들로서 모자랄 것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야사는 어느 날 흥청거리던 잔치 끝에 골아 떨어졌다, 문득 깨어나 보니 죽은 듯 잠든 시녀들의 흉한 꼴을 목격하고, 이로부터 비롯된 메울 길 없는 혐오감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사는 우연히 사르나트에 성자(聖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석가모니를 찾아오게 되었다. 석가모니에게서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밝히는 설법을 듣고 한량없는 평화를 얻게 된 야사는 같이 어울리던 친구 50명과 함께 계(戒)를 받고 수행자가 되었다.

또한 아들의 돌연한 출가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야사의 부모가 아들의 출가를 만류하러 쫓아왔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 그들 자신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재가행자(在家行子)가 되었다. 성도 이후 석가모니께서 보냈던 첫 번째 하안거 장소이기도 한 사르나트는 석가모니 멸후 마우리아, 굽타, 팔라 시대 등을 거치며 계속 번창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현장법사가 당도하였을 때 이곳은 1,5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불교와 관련된 학문과 예술이 융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몰락하면서 함께 잊혀지기 시작한 이곳은 1017년 바라나시를 점령한 회교세력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결정적으로 퇴락하였다. 그러나 이 사르나트로부터 시작한 법은 지구 끝에 이르도록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사르나트 박물관(Sarnath Archaeological Museum)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작은 규모에 비해서 뛰어난 소장품들이 많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아쇼카 석주의 상부에 안치되었던 4마리 사자 석상이 사방을 향해 버티고 있다. 이 사자 석상은 기원전 3세기의 조각인 데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인도의 국장으로 쓰이고 있어 지폐나 동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부처님께서 최초 설법을 하시는 모습을 새긴 초전법륜상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설법인을 맺은 결가부좌의 초전법륜상은 굽타시대 불상 조각 가운데에서 최고 걸작의 하나인 동시에 인도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광배의 좌우에는 두 천인이 대칭적으로 놓여있고, 꽃무늬도 매우 아름답다. 대좌 아래에는 중앙에 법륜, 오른쪽에 3명, 왼쪽에 2명 모두 다섯 비구가 보인다. 이 사르나트의 불상은 같은 시기 마투라 불상과 비교해서 옷이 더욱 얇고 주름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베나레스 힌두대학(Benares Hindu University)

인도의 위대한 민족주의 지도자 빤디트 말라비야(Pandit Malaviya)에 의해 1917년 설립된 대학으로 규모면에서는 인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힌두이즘의 메카 바라나시 답게 힌두와 관련된 철학,산스크리트와 전통 예술과 문학분야에서 확고한 입지와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대학으로 인도인 뿐만아니라 전세계 특히 인도 학문을 수학하고자 오는 서구 유럽인들과 한국을 비롯한 중국,일본 등의 동북아 학생들까지 여러나라에서 이 학교의 우수성을 알고 모이고 있다. 학교가 워낙 크기 때문에 사이클 릭샤나 마차를 이용해 학교를 돌아다니며 관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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