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유효기간 문제로 좌절되었던 출발은 한달 후 강행했습니다.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모두 해결하고... 가 아니고, 무시하고 여행을 떠났죠.
이점은 정말이지 불우한 프리랜서가 갖는 유일한 특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

11월 초 어느날,
전날 늦은 가을비를 뿌리던 날씨도 저의 방콕행을 응원하는지 화창하게 게었더군요.
세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순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며 카메라를 꺼냈죠.
마음먹고 산 롤라이 녀석을 드디어 테스트해볼 심산이었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롤라이은 100% 수동 카메라로 아주 조그만 녀석입니다.
매번 거리와 셔터 속도, 조리개를 조종해야하는 구식 녀석이죠.
롤라이 녀석의 첫 셔터를 위해 저는 목표를 설정하고 거리를 측정한 후 뷰파인더를 봤습니다.
적정 노출에 맞춰 조리개와 셔터 셔터 눈금을 맞추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이 녀석의 노출계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겁니다.
롤라이 35SE는 파인더 안에서 빨간 램프와 파란 램프가 깜빡이며 노출을 알려줍니다.
노출이 적정이면 파란 램프가 예쁘게 켜지는 거죠. 그런데 이 녀석이 파란 램프는 커녕
빨란 램프도 깜박거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분명히 몇 주전 노출계를 테스트했을 때는 이상이 없었거든요.


문제는, 첫째, 노출계 고장.... 둘째, 배터리 아웃.....!
둘중 하나였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지더군요.
출발 시간까지는 3시간 밖에 남지 않았고, 지금 배터리를 사러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제 롤라이는 1978년산입니다. 요즘 흔히 쓰이는 카메라용 배터리는 쓸 수 없습니다.
롤라이 전용 배터리를 구해야하죠.

카메라 전체가 오작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재수없는 생각까지 머리에 스치자,
저는 대충 광량을 감안하여,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마추고는 테스트 촬영을 했습니다.
카메라 작동상태를 보니 고장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이번 여행의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구입한 놈인데 이렇게 배신을 당하는구나!
저만치 공항버스가 오더군요.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든요.

버스 안에서 롤라이 녀석을 바라보았습니다. 입을 꼭 다물고 있더군요.
이 녀석마저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번 여행은 정말 혼자 떠나는 여행이 되겠구나.
롤라이와 함께 하는 여행일기는 영영 물건너 가는가?

갑자기 혼자 가는 여행이 더욱 고즈넉해졌습니다.
결국 방콕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곧바로 아유타야로 떠나려 했던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방콕에서 하루 더 머물며 롤라이 녀석의 배터리를 구해보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방콕에 도착한 다음날 MBK의 모든 카메라점을 돌아다녔습니다.
유일하게 제 카메라를 알아본 MNK의 써니 카메라 종업원이 한마디 하더군요.
"롤라이 35! 배터리? 위 돈 해브! 노 방콕! 온리 홍콩!!"
배낭을 메고 샤이얌 일대와 MBK를 헤맨 첫날 상황은 이렇게 정리되었고,
기운이 빠진 저는 까센삼으로 발길을 옮겨 방콕에서 묵을 두 번째 숙소를 정했습니다.

제가 사진을 함께 올리지 못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아래 사진은 롤라이35의 사진입니다. 롤라이35 동호회 이정애님의 사진을 퍼왔습니다.
제 카메라도 이 녀석하고 똑같이 생겼답니다. 다음 글에는 제 롤라이로 찍은 사진도 올려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