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고 기다란 쉼표 아홉, 셋이 같이...
초록.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의 초록이 더욱 선명하다. 밤사이 비가 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잠결에도 비바람과 천둥번개 소리에 무서웠던 것 같다. 그래도 아침이면 활짝 개어버리니...참, 운도 좋은 우리 가족.
유난히 두눈이 퉁퉁 부어서 각자 말없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부녀...입이 아니라 눈으로 먹어야 할 것 같은 과일조각들...참 드럽게 밥먹는 딸.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까? 일단 수영장에서 놀구, 비치에서 쉬구, 마야베이 갈까? 아니지...딸내미 등판 다 구워져서 안되지... 그럼 종일 수영장에만 있어? 그냥 피피시내 나갔다 올까? 많이 변했다던데...
부부가 쑥덕쑥덕 모의를 한 끝에 오전 수영, 오후 시내구경으로 일정을 짰다. 아니, 오전에는 그 어렵다는 수영을? 그리고 오후에는 그 힘들다는 시내구경을?? 참으로 복잡한 일정일세. 한가함, 여유로움, 조용함, 게으름, 이런 것들만 판을 치는 이 빌리지에서 말여...ㅋㄷㅋㄷ ^^
꽃단지.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꽃단지. 매일 아침 새로 딴 꽃으로 이쁘게 장식을 해준다. 이뻐서 툭하면 사진을 찍곤 했는데...어느날 가까이 사진을 찍느라 자세히 들여다보니...이런, 꼬물꼬물 무언가가 물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지지; 저거이 모야? 모가 움직이는데???
퍼그; 모기 유충이자너. 것두 몰라?
지지; 뭐라구??? 그럼 어케...옴마야, 구래서 여기 모기가 이렇게 많구나...우씨, 나쁜 넘들. 이 물에다 살충제 뿌리자.
퍼그; 당신 모기유충 죽이는 방법두 몰라???
지지; .......
퍼그; 기름 한방울 톡 떨어뜨리면 돼. 그럼 얇은 막이 하나 생겨서 공기 안통해 안에서 다 죽어.
지지; @@;;
퍼그;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모기박멸할 때 이 방법 쓰는 데 다....것두 여적 몰르구...
우리 딸, 온몸에 수두걸린 아이마냥 해놓은 모기가 미워서 어떻게든 해보구 싶은데...박식한 퍼그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더 가르쳐준다.
퍼그; 모기가 왜 피 빨아먹는지 알아? 모기는 단백질 합성을 스스로 못한대. 그래서 알을 만들고 낳으려면 외부에서 단백질을 공급받는 수밖에 없쥐. 바로 우리 피.
지지; 진짜야??? (난 꼭 진짜야? 정말?? 하고 묻는다...)
퍼그; 몰러...
퍼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기에게 물린 나의 피가 지금 저 꽃단지 안에서 꼬물거리는 모기애벌레같은 놈들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로 쓰여졌다 이거쥐...
나, 갑자기 숙연해지며 모기유충들에게 피붙이로서의 연민을 느꼈다나 뭐라나.....
그랑께 따지고보면 저것들도 다 나랑 혈연관계를 맺고있는, 내자식같은 존재들이구먼....
-_-;;
수영장으로 출동!
모기유충에 대한 연민을 뿌리치고 서둘러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영장.
빌리지 수영장 홍보사진처럼 나온 것 같다. 수영장, 정말 이쁘고 편안하고 재미났다.
수영장에서 바라보는 바다.
수영장 끝쪽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경계선이 없다. 수영장하고 바다하고 같은 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저 수영장 벽에 턱을 괴고 기대서서 건너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정말 좋았는데, 평화로웠는데.
엄마랑 즐거운 한때.
어제 오후 수영장 다녀와서 보니까 지퍼양 머릿속 정수리 부근이 다 벗겨지려 하고 있었다. 오늘은 완전무장하고 모자도 썼다.
무슨 포즈일까??? 이상한 상상 금물! 오염물질 그거 아님~
울 딸, 여름에 두달 가까이 유아수영을 다녔다. 일주일에 세번씩. 워낙 겁도 없이 수영을 즐기길래 차라리 제대로 배워봐라, 하고 데려갔는데 호흡이니 뭐니 가르치다보니 오히려 물에 대한 겁이 생겨 진도가 안나갔다. 수영선수 시키자고 작심한 것도 아니고 싫으면 관두지, 뭐, 하고 그만뒀었다.
그런데 외국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수영들을 잘할까, 강습도 안받고...했던 궁금증이 이번 여행중에 다 풀렸다. 지퍼양을 보면서. (답; 어려서부터 물에서 많이 놀았다. 자연스럽게.)
매일매일 수영장에서 놀다보니 어느순간 스스로 물속에서 균형잡는 법, 가만가만 떠있는법, 호흡, 발차기 등을..연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키지 않아도 남들 하는 거 보면서, 더 재미나게 놀겠다는 일념하에...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연습을 해보곤 하는 딸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 저 사진의 모습은 엄마아빠 지들끼리 놀고 있을 때 딸 혼자 가만히 물속에 서서 균형을 잡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나선 가만히 발을 떼어보고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지 가늠도 해보고 혼자 떠있을 수 있는지 연구도 해보는... 저렇게 가만히 2-30분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뭐가 웃긴지 가끔 혼자 키득키득거리기도 하면서...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는구나, 수영....수영장에서 머무는 날이 더 많아질수록 점점더 그걸 느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 공부라든가... 환경을 조성해주고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순간, 자기가 필요하다 느낀 순간, 스스로 할 수 있겠지. (나도 좀 그래볼껄...학창시절 돌리도!)
아빠랑도 즐거운 한때.
슬라이드, 첨에는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잘도 타던 딸, 한번 된통 물먹고 나더니 저렇게 온갖 튜브 다 착용하고 어렵사리 탄다. 꼭 아빠 대동하고서. (어른들 타기 쫌 X팔리는데..)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우리랑 같은 날 빌리지에 들어와서 우리보다 하루먼저 나간 어떤 아이. 유럽에서 온듯한 말씨였는데 우리 딸이랑 친해보려고 어찌나 애를 쓰던지... (빌리지 통털어 아이가 달랑 둘 뿐이었으니 아마도 심심해서 같이 어울려 놀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우리 지퍼양은 어른들에게는 싹싹하지만 아직 또래에게는 심한 낯가림을 보이는지라.... 하물며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다보니 아예 상대를 않으려고만 하는 딸. 늘 저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도망다녔다.
덕분에 서울 돌아와서는 비슷한 생김새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또래 아이들을 무지 반가워하더니...예전보다 낯가림도 덜해졌다.
수중바.
멋지게 쥬스한잔 마시려는데 내 표정 영 떨떠름이다.
두잔 시켰는데 딱 한모금 마시고나서 한잔을 홀라당 쏟았다. 얼른 걸레 달라해서 직접 다 닦고 종업원에게 미안하다고 연신 말했는데도 (사실 내가 미안할 것도 없는데..내돈 내고 사서, 마시든 엎든 바르든.) 이 종업원 끝까지 괜찮다는 말을 안하고 기분나쁘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손님에게 괜찮냐고 해야하는 것 아닌가. 왜 내가 그 말을 기다리며 미안하다 해야하지. 친절하고 인심 좋은 종업원 같으면 한잔 새로 만들어주고도 남을 판국에 왜 인상 찌푸리고 기분나쁜 티를 내냐고오~.
암튼 이런저런 만감이 교차하여 나의 표정도 당황스럽고 슬프게 일그러졌다. 변했어, 변했어, 종업원들 변했어....를 되뇌이며...
ㅋㅋ 옆에는 사태파악 전혀 못하고 무조건 자기가 쥬스잔 엎은 줄 알고 반성중인 우리 딸. (평소 비슷한 죄를 하도 많이 지어놔서 자기도 헷갈리나보당.)
아그야, 엄마도 가끔 쥬스 흘려...몰랐지?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멀리서 여기좀 봐~ 해가며 셔터 눌러대는 퍼그 닮았나보다, 우리 딸.
쉬는 시간.
수영장에서 놀다 나와서 오후 시내투어 예약하고 방에 돌아와 씻었다. 씻자마자 딸이 잠들어서 부부는 편안하게 휴식시간이다. 나는 커피랑 비스킷. 퍼그는 음악감상.
애 잘때 잠깐 쉬는 시간은 얼마나 달콤한지.... 아이를 키워본 사람만이 알겠지.....
한낮의 풍경.
푸르고 조용한 바다.
꽃들.
나무 위의 도마뱀.
기다려도 아이가 깨지 않아 퍼그마저 잠들고 나는 혼자 빠져나와 또 사진찍기 놀이했다. 바다 찍고, 꽃 찍고, 운좋게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고 있던 도마뱀도 찍었다.
사진찍기 놀이에도 싫증이 날 무렵 시내투어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할수없이 아이를 살살 깨워 롱테일보트에 올랐다.
영국 시골마을에서 혼자 온 여자 한명, 캐나다에서 온 여자 두명, 그리고 우리 식구. 배는 두두두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린다. 딸은 자다깨서도 배탄다고 좋아한다...
톤사이만에 도착하자마자 늦은 점심부터 해결하려고 피피 베이커리에 갔다.
피피베이커리.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맥주랑 콜라랑 코코넛밀크쉐이크랑 한잔씩 시켜놓고 숨돌리며 유리창 밖 거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전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들로 붐빈다.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이다. 갑자기 3년전 피피 뷰포인트 리조트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 부부가 마주보며 웃는다. 볼일보고나면 직접 바가지로 물을 퍼다가 부어서 오물을 씻어내려야 하는 독특한 변기부터...병실이나 감방을 연상시키던 특유의 인테리어(?)...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부부끼리 웃고 떠들다보니 옆에서 딸이 애타게 뭐라고 외친다.
- 짠~ 해요!!!! 셋이 같이 짠~~해요!!!!! (건배 하자는 얘기...)
카이섬 갔다가 중국아저씨들 소란스럽게 건배들 하는 걸 보구 그러나....언젠가부터 계속 짠~! 해요!를 외쳐대는 딸.
것도 꼭 셋이 같이 해야만 한단다.
음료수 잔부터 시작해서...... 돌아다닐 때 운동화끼리도, 간식으로 까까 먹을 때도, 그림 그릴때 크레용끼리도, 밤에 칫솔끼리도, 무조건 셋이 같이 짠~! 해야 한단다.
아이가 여행 다니면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셋이 같이>였다.
엄마랑만 해도 안되고 아빠랑만도 역시 안되고...꼬옥 셋이 같이...
아이는 여행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을 배운 것 같다. 24시간 똘똘 뭉쳐 다니고 있는 세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행기 타고, 배타고, 차를 타고, 낯선 곳으로 자꾸자꾸 옮겨다니면서도 변하지 않는 고정멤버 셋. <셋이 같이>하기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낯선 곳도 편안해지는..가족이라는 것. 엄마나 아빠 어느 쪽에도 더많이 치우치지 않은 똑같은 무게를 셋이 같이 지니고 있음을 아이는 깨닫고 믿고 확인한다. 자꾸자꾸만 셋이 같이 짠~! 해요! 하면서. 먹는 거나, 입는 거나, 노는 거나, 자는 거나 자꾸자꾸만 셋이 같이 짠~! 해요! 하면서.
셋이 같이 짠~!
오로지 먹기 위해서만 사는듯한 우리 가족. 필사적이다.
밥먹고 나와서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즐비한 여행사들 사이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광고판 하나. 요즘엔 이게 유행인가벼??? 서양아그덜 환장하겠구먼.
뛰어내려!!! ㅋㅋㅋ 재밌겠다.
돌아댕기다 80밧짜리 공 하나 사줬다.
그리고 발마사지 받았다. 발냄새나서 챙피하다고 안한다는 퍼그를 꼬셔서 둘이 나란히 받았다. 지퍼양이 얌전히 있어줄까..걱정했는데... 오우! 이런! 여기서 지퍼양의 진로가 결정될 줄이야!!!
그녀는 타이마사지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서 아줌씨들에게 싸왓디카, 컵쿤카....인사하는 법도 배우고 맛사지도 배우고...
너무 열중해서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아이들은 왜 열중하면 침을 흘릴까?...켁, 우리 딸만 그런가...??) 어찌나 똑같이 포인트를 짚고 제대로 하는지...아줌씨들 감탄하고 웃느라고 제대로 주물러주지도 않는다. 헐~
이 모성, 타이마사지 천재인 딸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금쪽같은 화면을 적극 할애하여 대문짝만한 사진을 올리겠다. 이해해주시길~
타이마사지 천재소녀.
지금까지 내가 본 중에 가장 평화로워보였던 어떤 공놀이.
이제 빌리지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슬슬 다가온다....
투어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볼일을 보려고 바삐 움직였다.
인터넷도 조금 보고 딸 기저귀랑 간식도 샀다. 우유랑 두유랑 야쿠르트...
피피 시내에서 꼭 사야할 것들...(?)
망고도 사다 먹었지롱!
자, 그럼 빌리지로 다시 출발!
자유와 젊음이 넘치는 톤사이베이 안녕!!!
어제와는 또다른 노을.
배타고 돌아오는 중에 노을이 시작되었다. 배에서 찍은 하늘은 어제의 노을빛과는 또 다르다...창조주는 참으로 익살맞기도 하셔라. 매일매일 똑같은 게 하나도 엄써.
하늘은 마치 천지창조를 연상시키는... 장중한 빛이었다.
배에서 내리니...갯벌이다.
오후의 비치는 또 다른 세계다. 물이 다 빠져나가버리고나면 파도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갯벌이 드러난다. 게도 잡고 군데군데 웅덩이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도 잡으려는 의욕에 고무된 딸....물론 찐덕찐덕한 모래 주무르다가 바지 궁둥이만 다 젖었다.
저멀리에 배를 대고 갯벌을 걸어 들어오는동안 하늘은 또 시시각각 변한다. 하늘에 대해서 이리도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오래 들여다 보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내 기억으론 호기심 왕성했던 대여섯살 때가 마지막이었다.
바다보다 갯벌이 더 신난다는 지퍼양. 지퍼양한테 적정 수심은 5센티 내외라나 뭐라나. 드러난 갯벌 군데군데 생긴 얕은 웅덩이에서 마음껏 첨벙댄다.
엄마라는 사람은 연출 사진 하나 찍어보겠다고... 그 웅덩이에서 딸을 내쫓고 대신 나무 그림자를 집어넣는다.
저녁시간. 오늘도 지퍼양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전속밴드.
너 누구니?
침입자를 향한 딸의 시선이 조심스럽다. 그 침입자는 다름아닌 도마뱀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아~ 거기 쓰레기통이야~ 얼렁 나와~
오밤중에 갑자기 또 필받아서 수영장 가시겠다는 따님.
수영모자 뒤집어쓰고 쇼타임이다. 딸때문에 밤에 방안에서만 뒹굴어야 하는 신세지만... 대신에 또 딸때문에 방안에서도 재미나죽겠다~ 헤헤.
이건 오늘의 <뽀오~너쓰>예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