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빠이(Life of Pai) 3. 그녀와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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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빠이(Life of Pai) 3. 그녀와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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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색에 투석이 아닌 악수를 건네는

 

 

치렁치렁, 기다랗고 정신없는 봉두난발과 칠레팔레, 시대와 국적을 분간하기 어려운 옷차림과 해롱해롱,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타투와 피어싱 등등 일색이 난감하고 심란한 스타일로 일상을 살아가는 자를 두어 대기업 기획실에 근무하겠거니, 또는 명문 국립고에서 수학을 가르치겠거니, 혹은 청와대 제일정무수석을 역임하고 있겠거니 추측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필시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터,


 

사회의 생성, 변화, 발전에 따라 자생자립이 불가능해진 세상, 온전한 독고다이로 살아가긴 진즉에 글러먹은 시대에서 이번 생은 영 아닌갑다며 화끈하게 자발적 조기마감을 감행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주어진 삶을 이어가기 위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일이라는 것을 하게 마련인데 그 일견 숭고하고도 종종 구차하며 어쨌든 중차대한 사항은 외적인 조건 또한 동반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하고 다니는 꼬라지와 하고 있는 일 사이에는 당연한 연계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이를 통한 짐작, 추리, 연상 작용 역시도 자연스레 가능한 바,

 


넌 어쩌다 그 지경이 되셨어요?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기원을 파헤치고 과정을 짚어가며 존재 철학과 행동 심리학을 빙자한 헛소리와 흰소리를 늘어놓아야할 것이라 다음 기회를 엿보거나 그냥 건너뛰기로 하고,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하는 질문을 수십 차례 받아온 만치 오랜 세월 일반적이지 못한 외관을 지니고 살아온 덕에 때론 유쾌하고 때론 불쾌하며, 때론 정확하고 때론 부정확한 편견이나 선입견, 이해 혹은 오해를 겪어왔던 게 사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성적취향이나 선호체위도 알 수 없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날아든 한통의 싸가지 없는 메시지 역시 그에 기인하고 있었다.


 

노느니 염불하는 셈으로, 쉬느니 광 파는 격으로 심심한 시간을 삼삼하게 때우고자 낮술 마시며 휘갈긴 잡문을 올려놓곤 하는 어느 커뮤니티에 접속하자 띵동, 메시지가 와써요. 빨리 확인해주세요, 혀 짧은 여자의 더럽게 예쁜 척하는 목소리. 이에 클릭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그렇게 여행하세요?”

따지듯 묻는 한마디. 이런 썅, 멋진데!


 

젊은 나이에 뭐 건물 같은 거라도 하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로또를 맞았다든지, 것도 아니면 어디서 눈먼 돈이라도 한 뭉치 주운 걸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한 달 일해 한 달을 사는 인간들 지천인데다 갈수록 가관이라고 하위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져 없는 놈만 죽어 자빠지는 대한민국 땅에서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저리 팔자 좋게 놀러나 다니실까? 하는 분노 섞인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는 그의 의문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왜냐면 나도 그랬으니까.

 


난 다 팔아버렸어. 집도, 차도, 심지어 여자 친구마저도.”

? 여자 친구를 팔아버렸다고?”

. 그녀는 내 모든 것보다 비쌌지. 그녀는 too sexy 했으니까.”

 


여행에 있어 경비란 글래머 스타의 야시시한 비키니이자 백수 삼촌의 포르노 외장하드에 다름 아닐지니 상대적으로 부유한 유럽여행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오대양육대주의 명승지를 지나 남녀상열지사를 거쳐 자금의 출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팔아버릴 집은커녕 전세금이나 보증금은 물론이거니와 팔아 돈이 될 차도, 그 모든 것보다 비싼 여자친구도 없었기에 이빨 딱 악물고 몇 년을 버틴 끝에 겨우 탈출에 성공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소상히 밝히기는 상당이 쪽팔리므로 때마다 돼먹잖은 농담을 구사하며 적당한 실효를 거두곤 했다.

 


어쩌면 나는 무슨 돈으로 그렇게 여행하느냐는 단문의 메시지에 박복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이야기 해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물러설 수 없는 삶이란 게 있는 법, 한 발짝 뒤로 빼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벼랑 끝의 삶 또한 엄존하다는 걸 알기에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 그것 하나만을 부르짖는 자들을 신뢰할 수 없지만 결국은 무엇이 얼마나 절실한가, 에 관한 문제일 터, 잊지 않는다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답해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간절하다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낸 메시지는 그렇지 못했다.

 


거두절미하고 답하겠습니다. 물려받은 유산이 한 십 억 됩니다.”

 


오해에서 시작된 일이다. 아무래도 부단히 땀 흘리며 성심성의껏 살아가는 캐릭터라기보다는 만날 놀고먹을 것 같은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비롯된 오해일 것이다. 무슨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마음 왜 몰라 주냐고, 안을 들여다보라고, 중요한 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읍소해봐야 별반 무소용,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는 것일 터, 그래서도 빠이가 좋았다. 외적인 이미지로 인한 편견이나 선입견, 이해 혹은 오해는 물론 빠이에서도 예외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다만 대처방식이 다르다는 게 아주 다를 뿐.

 


내 생각에 넌 빠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야!”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예술가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히피들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여행자들의 마을이라고도 하는 빠이. 마을 구성원들의 불러지는 이름은 각기 다를 수 있으나 그 성향과 경향을 살펴볼라치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엄연하니 심신이 보다 자유로운 사람들. 그에 종류와 장르를 따져볼라치면 일단 음악 하는 이들이 상당한 퍼센티지를 이루는 가운데 공예품을 만드는 자들, 그림을 그리는 치들, 타투를 새기는 인간들, 글을 쓰는 작자들, 퍼포먼스를 하는 종족들 등등의 예술적인 떨거지들에 이어 생의 태반을 길바닥 위에서 살아가는 히피적인 부랑자들을 넘어 장기, 중기, 단기 일정으로 떠나온 여행자적인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 고양이 뿔만 없지 세상 모든 게 굴러다닌다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리만치 온갖 인종들이 총집결해 있는 바, 어찌 보면 뭔가 굉장히 철학적인 계시가 담긴 조합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누군가의 부주의한 장난으로 만들어진 비현실적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어찌어찌 보면 지구에서 대책 없는 것들을 죄 끌어 모아 만든 한편의 막장 코미디 같기도 하고…… , 어쨌든 간에 빠이의 그러한 특성을 고려하자면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다름으로 인한 악의가 없는 것은, 외려 매력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테다. 모난 돌이 정을 부른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그간 정을 부르는 모난 돌로 활동해오며 크기별로 다양하게, 부위별로 다채롭게 맞아온 탓일 것, 단박에 좋아진 빠이가 더더욱 좋아졌다.

 


선박 운송용 컨테이너는 광화문에 있을 게 아니라 항구에 있어야 하고 소방차의 물대포는 한겨울에 사람들 옥외 샤워 시킬 때 쓰는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길을 잡는데 이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제대로 쓰일 때 만물은 빛을 발할 일이다. 나라는 것에게도 제자리라는 곳이 있고 제대로 쓰일 일이 있다면 아마도 빠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색에 투석이 아닌 악수를 건네는 곳, 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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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여간 촌스럽긴

 

 

꽃잎이 프린트된 자가드(jacquard) 원단의 보타이를 중앙에 두고 역시나 유혹적인 꽃문양 자수가 새겨진 새하얀 드레스 셔츠와 함께 바짓가랑이의 너비가 살벌하게 넓어 미스코리아 언니의 사자머리와 떡볶이집 허리케인 박의 도끼빗이 판을 치던 시절에나 어울릴 것 같은 클래식 팬츠, 더불어 어깨를 잡아끌고 허리를 끌어당기며 전신에 긴장을 불러일으키듯 딱 달라붙는 붉은색 레오파드 재킷으로 무장. 어디 좋은 데 가시나 봐요? 묻고 싶어지는 복장으로 입장한 카페.

 


그때 그 시절, 우리가 흘렸던 무수한 땀방울들과 눈물방울들은 모두 어디로 가 무엇이 되었단 말인가? 따위를 회상하는 눈빛으로 머다란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 한 개비 깊게 빨아올리고 있자니 때를 맞춰 등장한 작은 잔 하나 데미타세(demitasse). 커피의 때깔과 볼륨을 배가시키는 황갈색 거품 크레마를 두툼하게 두른 에스프레소 한잔을 들어 올려 코밑을 엷게 스치게 한 다음 슬며시 혀끝을 적신 후 매끈하게 한 모금 말아 넣자 입 안 가득 울려 퍼지는 강렬한 맛과 향에 절로 터져 나오는 한마디.

 


염병, 잘못 시켰다!

 


술이나 처마실 줄 알았지 평소 커피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던 작자인지라 모처럼 주문하는 커피에 긴장했던 걸까? 그래서 겨우 그걸 헷갈렸던 걸까? 마음으론 쌉싸름한 맛이 제법이고 양도 적지 않은데다 값까지 싼 아메리카노를 원했으나 주둥이는 아뿔싸, 쓰기만 오지게 쓰고 양도 코딱지만큼 줘 가격대비 참패를 기록하는 에스프레소를 말해버렸으니 글자 수만 같을 뿐 천양지차로 나뉘는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그딴 걸 커피라고 만들어 놓고 파는 인간들도 원망스럽지만 그딴 걸 주문해버린 내게도 패착의 원인이 있으니 아, 인생사 정녕 쌍방과실.

 


맛은 괜찮아?”

감출 수 없는 어리바리함을 그녀는 보았을 것이다.

너무 써. 양도 너무 적고.”

지금 자랑하는 거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하자 가벼운 미소를 띠우던 그녀, 각설탕 하나를 넣고서 서너 번 잔을 돌리더니 마셔보라고. 그렇게 천천히 한 모금 더 음미해보자니…… 오호라, 그거였다! 달콤쌉싸름하다가 진하게 마무리되는 한방. 연이어 마시는 따뜻한 물 한잔에 입천장과 바닥에 남아있던 여운이 깔끔하게 말려들어가며 혀끝에 작렬하는 은은한 풍미! 설탕 타먹는 커피는 중삐리 시절에 졸업했다고, 세상 모든 커피는 설탕 없이 먹어야 폼이 난다고, 그래도 사실 나는 믹스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던 촌놈에게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커피의 신세계. 어떠냐는 물음이 담긴 그녀의 표정에 나는 답했다.

 


, 이거 좋은데!”

그렇다고 또 시켜 먹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흐뭇한 낯짝을 드러내자 엷은 웃음과 함께 마주 닿은 시선에선 물씬한 애정이 느껴졌다. 하여간 촌스럽긴.

 


반경 2km쯤이나 될라나 말라나, 싶은 빠이의 읍내에서 메인 스트리트로 활약하는 CHAISONGKRAM RD, 그중에서도 중심이랄 수 있는 아야 서비스 인근에 위치. 세월의 풍화에 따라 자연스레 낡은 듯 멋스럽고 따뜻한 색감으로 도배된 가운데 가지각색의 장식품들과 부가적인 먹거리, 예컨대 빵과 쿠키, 꿀과 잼 등등이 오밀조밀하면서도 올망졸망한가 싶으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시각적으로 몹시 안락한데다 안과 바깥을 구분 짓는 문이 따로 없이 전면 개방되어 흡사 작은 공연장처럼 느껴져서인지 개폼을 잡으며 버스킹으로 살아가는 온갖 떨거지들과 어디 사기 칠 데 없나? 둘러보는 각종 놈팡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동공연을 하거나 즉석구라를 풀어내기에 용이한 그녀의 숍. 한차례 이름 모를 잡것들이 다녀가고 한가해진 틈으로 그녀가 맞은편에 앉았다.


 

몸은 괜찮아?”

걱정스레 손바닥을 가져다 그녀의 볼을 휘감자 채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

, 어제보다 좋아졌어.”

휘감긴 손바닥으로 고개를 기울인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슬며시 감기도 했다.

오늘 밤도 개 필요해?”

버터와 마가린을 의인화한 듯 느끼하게 물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개라는 것은 물론 나 스스로를 지칭하는 비유였다고 실상을 부언하자면 나를 잘 알거나 나로 인해 한두 번 개피(수정과 만들 때 쓰는 건 계피고, 개비의 잘못인 개피 말고, 도그 블러드의 그 개피)를 본 자들은 옳거니! 너 만한 개도 드물지. , 그렇고말고 하며 격렬한 동의를 표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일명 Three dog night, 극렬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개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는 짐짓 당연하면서도 자못 기발한 에스키모들의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친애완적 스킨십을 말하는 것이라 유래와 정황을 설명할 수 있는데 태국 남부지방 출신으로 남부에서 오래 자라와 윗동네의 기후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데다 선천적 질병이 있어 추위에 유독 민감한 그녀에게 북부 산간지방의 겨울이 토해내는 커다란 일교차는 꽤나 버거웠던 바, 난방시설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동네인지라 뭐, 별 수 있나. 자고로 보시 중 으뜸은 육보시라는 자비의 말씀을 실천코자 이 한 몸 기꺼이 던져 그녀와 몸을 포개고 체온을 나누려는 가슴 절절한 속사정은 일견 당연한 결착일 테다.


 

가장 살고 싶은 나라를 스위스로 꼽는 그녀. 국토 대부분이 알프스 산맥 능선에 걸쳐있어 뛰어난 경관으로 이름 높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자비한 자본의 폭력에 맞서 계층 간의 괴리를 메우고 간극을 뛰어넘고자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와는 별반 관계없이 그저 뛰어난 의료시설이 갖춰져 있기에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여린 아가씨.

 


아아, 이 또 무슨 사연이란 말인가. 왜 그토록 사연 있는 여자에게 끌리는 것인가. 이마에 나 사연 있어요,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잘도 때려 맞춘단 말인가. 사연 있는 여자는 왜 또 꼭 그렇게 말이 없어 보는 사람 미치게 한단 말인가. 혹여 내 안에 나도 모를 정과 한이 깊이 서려있어 딱 보면 아는 것일까? 그래, 극단과 극단이 맞물리는 것처럼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한 조각 그늘로서 완성된다는데 또 어떻게 힘든 사랑 한번 해보리? 아아, 인생사 역시나 쌍방과실.


 

태국인 임에도 중국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새하얀 피부를 지녔고 웃는 듯 우는 듯, 애수 젖은 커다란 눈망울과 함께 산뜻하게 툭 잘린 머리카락. 마른 듯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사뭇 올록볼록한 체형, 벚꽃처럼 흐드러지는 목소리로 사람 환장하게 하는 그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빠이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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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녀를 구하러 간다

 

 

가진 게 많은 자의 여유란 이런 것이구나!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만으로 부자와 빈자를 가름하던 미취학아동 시절을 벗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니 이게 실로 얼마 만에 조우하는 가객인가. 물론 금전이 아닌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 아쉬움이 없진 않으나 돈도 없는 주제에 시간까지 없던 남루하고도 뻔뻔한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니 돌아가야 할 나라와 날짜가 분명했던 이전의 여행 같으면야 어차피 돌아가 쎄가 빠지게 일할 것, 금발에 푸른 눈은 티브이에서나 보게 될 것, 위아래로 치여 짜증나고 피곤할 것, 자빠져 누워 뭐하랴! 한시 바삐 놀아야지, 하는 취지로다가 눈뜨면 술 눈감아도 술, 앉아도 술 서도 술, 좌로 구르든 우로 구르든 오로지 술이었으나 남아도는 자의 마인드란 정녕 이런 것이던가!

 


릴렉스~. 빠이에 와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바로 그것이다. 세계 3대 해변 중 하나라는 필리핀 보라카이를 시작으로 마닐라의 섹스 관광을 거쳐 인도네시아 곳곳을 후비고서 말레이시아 여기저기를 훑은 다음 태국에 당도하여 잠시간 북조선 미녀 김은아 동무를 알현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넘어갔다, 다시 돌아왔다가 치앙마이를 넘어 이윽고 빠이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회상하자면 참으로 정신없었다. 마치 산주검으로 살아왔던 시간을 철저하게 보상받아야겠다는 듯 격정적으로 놀아 재끼느라 이대로 타올라 차라리 불덩이가 되리라, 싶을 지경이었다. 거기엔 어떤 결기가 느껴졌고 때론 비장미마저 감돌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그 나름대로 재미가 훌륭했기에 불만이 있을 리 없으나 빠이 특유의 분위기는 이를 와해시키며 존재의 달라진 방식을 인식시켰으니 그래, 어차피 서둘러 가야할 데도 없고, 오라고 청하는 데는 더 없고…… , 내키는 데까지 지내보자, 마음먹었을 수밖에. 물론 그 내키는 데까지라는 게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무조건적인 음주와 가무만이 아닌 여행에서 책을 읽어보는 것도, 잡스런 감상을 휘갈겨보는 것도, 차 한 잔을 마시며 시간을 죽여 보는 것도 모두 빠이에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일, 술도 팔지 않는 그녀의 카페에 들어선 원인 또한 거기에 기초하고 있었다. 더불어 실내 흡연이라는 아름다운 시스템을 가졌다기에.

 


딱 한눈에 봐도 한번 들어가 보고픈 사이즈와 분위기, 아담하고 소담하다. 투박하고 기다란 돌의자에 앉아 세련되고 기다란 나무 테이블에 진열하듯 랩톱을 올려놓고 다소 느슨한 자세로 책을 읽다가, 때론 허리를 바짝 당겨 자판을 두드리다가, 그렇게 담배를 태우며 진한 코코아를 마시다가 어라? 그러다 발견한 그녀. 뉘신데 그리 귀여우셔?

 


안녕, 아가씨. 실례지만, 저 친구가 혹시 네 남자친구야?”

멀쩡한 생김에다 어려 보이지 않는 한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초면에 대뜸.

아니

10 Comments
뿌나러브 2014.09.29 01:40  
여행기가 재밌어서 연거푸 두편 다 읽었어요. 호흡이 길면서도 시 같기도 하고 랩 같기도한 필체가 개성있고 매력적이내요. 사진을 보니 어딘가 블로그에서 봤던 분 같은데 제 기억이 확실친 않군요. 일에 치여 떠나지도 못하고 마음만 충만한 일인인데 덕분에 잠도 안자고 대리만족 중입니다.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다동 2014.09.29 06:52  
시 같다는 과찬이 즐겁긴 하지만 보통 랩 같거나 만담 같다고들 하더군요.
수선화를 보았다, 라는 블로그를 하는데 '빠이 이야기' 검색하시면 블로그 나올 거예요. 두 이야기 다 몇 편씩 더 있습니다.
우워우워 2014.09.29 09:36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 언제 나오나요? ㅎ
다동 2014.09.29 11:07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지금 올려보죠, 뭐.
바위나라작은별 2014.09.29 10:05  
저도 다른분 블로그에서 잠시 봤었던거 같은데...
여기서 이렇게 후기 보니 반갑네여~ㅋㅋ
다동 2014.09.29 11:07  
다른 분 블로그에 쌍욕이 없었길 바랄 뿐입니다.
하얀기린아줌마 2014.09.30 11:20  
아침부터  뭐  찿는다고  컴  켰다가  다동님  글  에  빠져  읽습니다.호흡도  빠르고  리듬 감  에  몸이  건들건들  해지는  기분 입니다  숨겨진  유머 가  나올 때면  같이  웃습니다 잘  읽었 습니다 ......나는  약한  사람이야  그리고  느린  사람이고...마음에 드는 귀절 입니다
다동 2014.09.30 11:38  
낮술에 취해 슬픈 망상에 젖어 있다가 귀하의 글을 통해 나를 되새깁니다.
감사하네요. 낮술 답니다!
하얀기린아줌마 2014.09.30 18:24  
저도  낮술 좀  즐김니다  .별  이유없이  음악 이 좋거나 ..책  좀  읽다가 눈  아프거나 쓸대 없이  과할 때도  있지요 OECD 회원국 중 빠이 에서 한국은 평균 몇칠 묶습니까? 다동님  의 버전으로 낮술 댓글에  감사드림니다
다동 2014.09.30 19:29  
도찐개찐, 끼리끼리 논다고 평균에 못 미치는 인간들끼리만 어울리다보니 대부분 장기 체류하는 놈팡이들이었는지라 평균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만,

아무래도 느긋한 동네이니 한갓지게 오일쯤이나 여유있게 일주일쯤이 나쁘지 않다 여겨집니다.
낮술 증진시키는 데 으뜸인 소읍, 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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