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여행기2] 호치민에서 방콕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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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여행기2] 호치민에서 방콕그리기

피비 16 2881
**방콕 가기 5일 전입니다!

저는 지금 호치민에 있지만, 이 여행기는 결코 벳남 여행기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잠깐 태사랑을 멀리하고 이름부터가 감성 돋는 베트남그리기 카페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도 있지만, 
방콕으로 가기 전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일 뿐, 
내 영혼은 이미 방콕에 가 있답니다. 

어제는 오토바이들을 헤치고 길 건너느라 식겁했는데, 
오늘은 과도한 커피 드리킹으로 심장마비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네요.

호치민에 있는 동안, 지난 번에 다 쓰지 못한 방콕 여행기를 완성해야겠네요,

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실시간 여행기다보니 당장에 일어나는 일들이 피부 가까이 다가오는군요.



__________



정글을 가기 위해서 굳이 아마존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다.
이곳, 호치민은 지금껏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정글이다.
길바닥에 목숨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아찔함이 골목마다 거리마다 도로마다 있다. 
오토바이가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흡사 필리핀 외딴 섬에 있던 오래된 목재 건물 숙소에 불을 켜고 들어갔을 때, 
갑작스런 눈부심에 빠른 속도로 흩어지던 바퀴벌레들처럼, 
무섭고 징그럽지만 한편으론 매혹적이다. 

그리하여,
숙주나물 야무지게 넣어 쌀국수를 먹을 때도,
망고와 패션의 조합이 최상인 생과일주스(신또)를 마실 때도,
굳이 위험천만한 도로변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진,
목욕탕에서 때 밀 때만 앉을 수 있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오토바이 행렬의 장관을 감상하고 또 감상하였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슬아슬하지만 사고를 비껴간다.
묘기를 구경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하루종일 쳐다봐도 질릴 거 같지 않던 그 풍경에,
내가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목숨이 내 것이라면,
블록버스터 웰메이드 액션 영화가 하드코어 호러로 둔갑할 수밖에. 
 
내 생명은 너무나 소중해서 순간 마음이 애틋해진다. 

놀라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심장을 부여잡고 있던 그 손이 기특하다. 

호치민에는 보행자를 위한 신호등이 없다.
아니 있다. 시내 중심가 돈 냄새 물씬 나는 공간에는 있다.
그러나 여행자 거리 데탐에는 없다.

애초에 시내 투어를 나갈 생각은 없었다. 
근데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파는 켐박당을 찾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시내로 나가야 한단다. 

호치민에 도착한 첫날, 
혼돈의 오토바이 소굴을 경험한 나는,
저 도로를 다시 건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호텔 방에서 꼼짝도 않고 무서움에 떠는 모습이 시간이 지날 수록 또 한심한 거다. 

슬그머니 기어나와 시내로 나가는 첫관문인 숙소 앞 도로를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방법이 있었다. 

정글에서 태어나 자란 현지인이 나타나면,
그림자처럼 옆에 붙으면 된다. 

단, 너무 붙으면 상대방이 당황할 수 있으니 거리 유지를 잘해야 한다.
만에 하나, 그가 당황해서 도로 중간에 멈추기라도 하면,
이건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데탐 거리에서 공원을 가로질러 뉴월드호텔까지 잘 찾아왔다. 
다음은 벤탄시장을 지나서 대통령이 옛날에 살았다는 집을 거쳐 노틀담 성당까지 가야 한다.
단단히 숨을 붙잡고, 
현지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 명은 안 된다.
쏟아지는 오토바이를 막아줄 방패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방패막이 서너 명이 모이면 잽싸게 따라 붙는다.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해댄다.

- 아, 대박, 헐, 대박, 악, 악, 악, 악, 악, 휴우,,,,,,, 대박

악, 이 다섯번이면 죽을 위기가 다섯번이었다는 얘기다. 

이 방법으로 나는 무사히 호치민 시티를 한 바퀴 돌고,
소원하던 코코넛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태국 것이 훨씬 맛있다는 게 함정.-_-)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듬직하니 믿음직해 보이는 건장한 남자 옆에 따라 붙었을 때가,
최고로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지나고나니 그는 하자있는 방패였다는 생각이 든다. 
정글에서 나고 자란 이가 아닌 나랑 똑같이 정글에 갇힌 외지인이었던 거다.  
그렇게 몇 번의 판단 미스로 내 목숨은 길바닥에 수 번 굴러다녔다. 

지금, 이 안전한 커피숍에 앉아,
진한 에스프레소와 그보다 더 진한 연유가 밑에 깔려있는,
달고도 쓴 베트남 커피를 두 잔째 드리킹하면서 감상하는 오토바이 행렬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다시는, 다시는, 저 길을 건너진 않을 테다.

나서지 않으면 사고도 없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실연도 없다.

나는, 
사고도 실패도 실연도 없는 안전무사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방콕 도착 5일 전이다...! 오바!

16 Comments
쏨땀뿌 2013.09.25 09:25  
ㅎㅎ
제 일기를 보는줄 알았네요..
15일간 벳남종단하면서 늘 태국으로 탈출하는날만 손꼽았다지요.
무단횡단스킬이 장난아니게 늘어서 하노이가서는 외쿡인들이
우리뒤로 마구 붙었다는요..ㅋㅋ
마지막에 하노이공항에가서도 실망을 많이 한터라 떠나면서
그렇게 후련할수가 없었는데,한달이 지나 사진들을 천천히 보니
좀더 많이 베트남을 즐기지못한것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계시는동안 맛난것도 많이 드시고 행복한 여행하세요^^~*
피비 2013.09.25 15:20  
여기 사고가 다반사라 뺑소니도 흔한가 봐요.ㅠㅠ
하필 내가 데탐에 온 날 저런 일이ㅠㅠ
뿌님은 무단횡단 안전하게 잘 하셨으니 천만다행에요.
벳남 사고 생각하면 무섭고 정 떨어지는데 커피, 신또, 쌀국수 생각하면 또 괘안아요.
기사 끔찍하지만 모두 조심하자는 의미로 올려봅니다ㅠㅠ
루나tic 2013.09.25 12:46  
ㅋㅋㅋ저도 태국에서 신호등없는 길 건널때 현지인이 건널때 붙어서 건너고 했어요..ㅋㅋㅋㅋ 그러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해서 나중에는 잘 건너고 하긴 했지만...ㅎㅎ
피비 2013.09.25 15:22  
태국도 만만치 않죠ㅋㅋㅋ 그래도 신호등 군데군데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임ㅠㅠ 얼른 태국으로 넘어가고 싶어...욤...ㅠㅠ
etranger 2013.09.25 19:59  
호치민에 사는교민 입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 10년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아직 길건너기가무섭습니다. 밤에는 더욱더 ... 그래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 옵니다.
3번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보았읍니다. 아주 심하게 다치지는 않앗지만 정말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더군요. 이것은 추억이 될수가 없읍니다. 생사의 문제 이니까요.
피비 2013.09.25 20:23  
헉, 완전 좌절인데요?ㅜㅜ
사시는 분꺼정 무섭다하시면 저같은 뜨내기 여행자는 정말 답이 없군요.
아까 잠깐 외출했을 때, 또 한명의 현지인이 피흘리면서 도로가에 누워 있었음.ㅠㅠ
아, 조심조심해야겠어요.ㅜㅜ
pf13 2013.09.26 16:02  
중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해봤습니다.
차가 조금만 막혀도 인도로 뛰어들어 달리는 택시에 아연해지는 것도 잠시, 러시아워에는 인도가 차로 막혀버리고.....
그런 대혼란 속에서도 현지인과 교민들은 어떤 리듬을 알더군요.
자유자재로 무단횡단하고 차가 인도 위를 달리는 상황에서도 전혀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그런 리듬은 묘하게도 나라마다 동네마다 다 다른 것 같아요.
중국 무단횡단의 대가가 베트남에서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는.
그 동네 전통 음악 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하달까요?
호치민의 리듬도 꼭 한 번 느껴보고 싶네요.
피비 2013.09.26 18:59  
이 혼돈의 도시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되는 말입니다.
리듬이란 것도 정말 크게 공감이 가고욤.ㅋ
차가 인도 위로 올라온다는 건 상식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네요.ㅋㅋ
시스템이 좋은 곳만 바라면 동남아 여행은 못할 듯 합니다,
근데 벳남은 괜씨리 선입견 때문인지 태국 만큼 마음 주진 못하겠어요.ㅠㅠ
피비 2013.09.26 19:08  
그나저나, 분명 쓰기 전엔 지난 태국 여행에 이어서 쓰려고 했는데, 쓰고 나니 이건 완벽한 호치민 여행기네요! 데탐, 벤탐시장 다 나왔넹ㅋㅋㅋ
이거 벳남여행기 게시판으로 옮기기 할 수 없나요? 원문 댓글 그대로 옮기는 걸루!
뮤즈 2013.09.26 22:14  
하자있는 방패라는 글에 한참 웃었는데..
맨 아래 사진을 보니...헐...실제로 큰 사고가 났었군요.
안전운전~
아니지...
안전보행하세요~~~~~~~~~~~~~~~~
피비 2013.10.01 01:42  
실제로 사고가 났어요.ㅠㅠ
뺑소니였고요.ㅠㅠ
전 다행히 무사히 방콕으로 잘 건너왔어요.
김병업 2013.09.27 09:57  
여행기 너무 재밌게 쓰시네요.
중국에서 2년 살았는데 그 나름의 질서가 있어요.
베트남도 그렇겠죠?
피비 2013.10.01 01:46  
베트남도 나름의 질서가 있겠지요?ㅋㅋ
전 뜨내기 여행자라서 질서도 파악을 못했고 그 혼돈스런 질서에  크게 매력도 못 느끼고 떠나왔네요.ㅠㅠ
물고기날다 2013.09.27 22:53  
닉넴 보고 반가워 로긴까지 했습니다.ㅋㅋ

베트남 사람이 하는 말이 길을 건널 때는 빠르게 길을 건너면 안된대요.
오토바이가 나를 볼 수 있는 속도로 건너라고 하더라구요.
이해가 될 듯... 안될 듯...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나네요 ㅋㅋ
피비 2013.10.01 01:47  
날다님 저도 반가워요.ㅋㅋ
길을 건널 때 천천히 걸으면 오토바이들이 알아서 피한다 하는데, 내 안녕을 타인에게 맡겨야 하다니요. 그냥 내가 알아서 잽싸게 피하고 싶은데 말이져.ㅠㅠ
재프™ 2013.10.03 17:34  
호치민
제가 처음 갔을 때 느낌이랑 참 비슷하게 느끼셨네요  ^^
그 뒤로 몇번 더 벳남에 갔었고, 얼마 전엔 다낭, 호이안에.
전 이제 거기서 오토바이 타고 다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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