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여행기] 미스테리 호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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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여행기] 미스테리 호텔-_-

피비 28 7718
*방콕 날씨, 서서히 우기로 접어들려나 봅니다. 후덥한 게 지대로네요. 아직 본격적으로 비가 오지는 않네요.

**

시암에서 옮긴 숙소는 수쿰빗에 위치한 미스테리 호텔이다.
미스테리 호텔이란,
이름 그대로 호텔 이름은 철저히 숨긴 채,
위치와 금액만 제시하여 '모험'을 즐기는 숙박객들을 꾀는 아시아웹에서 제공하는 호텔 프로모션 중 하나이다. .

주최측은 손해보지 않을 거라며,
소비자들을 살살 부추기지만,
사실상 완전한 손해는 아니지만 알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하지만 요행을 바라는 속마음 역시 떳떳하지 못해,
어디 크게 하소연도 못하는,

덫에 걸린 느낌으로 이제는 미스테리 빗장이 풀린 호텔로 걸어들어갈 확률도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신중해야 한다.

나는 신중했다.
퇴근 후, 밤마다 탐정으로 분하여 수사를 하기 시작했다.
미스테리 호텔이 보여주는 약간의 힌트를 집요하게 구글링해댔다.
쉽지 않았지만 결국 중국 사이트와 트립어드바이저 리뷰 게시판에서 미스테리 호텔의 이름을 거의 다 찾아냈다.

하지만 사람 심리가 희한하다.-_-
미스테리 호텔의 이름을 찾는 순간, 나는 급속도로 그 호텔에 흥미를 잃어갔다.
마치 열렬히 짝사랑하던 대상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정나미 떨어져 하는 십대 소녀처럼.

나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 같은 신비감을 주는 "미스테리"란 말에 현혹되어 "포시즌스" "노보텔" 같은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결국, 수사를 중단하고 구미가 당기는 호텔 두 개를 - 여전히 미스테리인 - 선택했고, 취소도 환불도 불가능한 불공정 거래에 미래의 삼일 밤을 맡겼다.

내가 선택한 첫번째 미스테리 호텔은 수쿰빗 소이 33에 위치한 로터스 수쿰빗 호텔로  지어진지 무려 20년이나 된 오래된 호텔이다.

나는 나보다 띠동갑 이상 젊은 호텔을 두고 늙수레하고 냄새난다며,
온갖 비방을 해댔다.
 
내 오래되고 낡은 것에 대한 혐오는 체크인할 때,
직원이 가지고 있는 격식 있는 태도에서 조금 누그러졌다.
더욱이 배낭을 메니 벨보이와 불필요한 동행을 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산뜻한 기분으로 룸키를 받아들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요청한 대로 "non smoking room, high floor, away from the lift" 방을 찾아갔다.

엘레베이터에서 내가 배정 받은 18층의 버튼을 눌렀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똑똑한 한국인은 대신 19층을 눌렀다.
17층에서 내리면 계단을 한층 올라가야 하지만,
19층에서 내리면 계단을 한층 내려오면 되니까,
이 얼마나 스마트한 처세란 말인가.

19층에서 내린 나는 주위를 재빨리 스캔한 후에,
비상구 문을 찾아냈다.

한시라도 빨리 메고 있는 10킬로 배낭을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에,
내 몸은 추호의 굼뜸 없이 내 뇌의 지령대로 신속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상구 문은 아주 두텁고 육중한 철문이었지만,
목표가 분명한 나는 간단히 열고 비상구 계단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나왔고,
뒤로 문은 닫혔다.

그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하지 못했다.
다만, 비상구 계단이 오래된 철제 계단이어서 발을 디딜때마다 덜컹거렸고,
비상구 공간 자체도 굉장히 좁았고, 무엇보다 무지하게 더웠다.

한층을 무사히 내려왔다. 벽면 한쪽에 18F 라고 크게 써져 있었다.

19층의 비상구 문과 똑같이 생긴 문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열리지 않는다.

순간, 머리 속이 뿌얘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태 파악이 순식간에 되면서 잠시나마 현실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내 룸은 1804호였다. 
눈 앞에 있는 이 철문 밖 지척에 내 편안한 객실이 있을 터였다.

굳게 닫힌 문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보려 시도했다.
가망 없는 희망에 기댄 채.

안전을 보장받아 마땅한 투숙객들은 열 수 있지만,
이미 비상을 시도한 일탈자들에게는 굳게 닫힌,
일방적이고 자기 위주의 고약한 심보를 가진 문이었다.

심지어 무려 18층이었다.
그리고 "high floor"를 요청한 건 바로 나였다.

18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것도 고역이지만,
더 최악은 비상구문으로 내가 기어나오는 것을,
조금 전, 짐짓 어리숙함을 숨기기 위해 가장한 내 오만함을 목격한 체크인 담당 직원이 알게 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비상구 문에 갇힐 게 아니라 쥐구멍에 갇혔어야 했다. 

미스테리 호텔의 비상구는, 좁고 답답하고 더웠다.
외부로 통하는 어떤 창문도 없었기에 어둠 속 터널 같은 곳이었다.
그러고보니 어둡지는 않았는데, 창문도 없는 그 공간에서 빛은 어디서 온 걸까.

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 없던 힘이 솟아났다.
십킬로 배낭이 무거운 지도 모르고,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문을 확인사살하는 기분으로 하나씩 열어보았다..
오래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비상구 문은 까맣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내 손은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17층 16층 15층 14층 13층...
비상구문이 잠긴 것을 확인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리고 12층. 극적으로 문이 열렸다.
아니, 문이 살짝 덜 닫혀 있었다.

18층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12층에서 구원을 받았다.

할렐루야!~

이 일을 통해 나는 확실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출구를 찾아 나간 비상구에 갇힐 수도 있다란 것을.

그렇게 어렵게 찾아간 객실은 기대 이상 좋았고,
호텔이 내게 준 시련을 몸소 겪으면서 나는 호텔에 묵는 내내 다소 비굴하게 굴면서 호텔의 눈치를 살폈다.

신고식 제대로 한 셈이다. 젠장.

이제 몇 시간 후면 두번째 미스테리 호텔로 향하게 된다.ㅋ
28 Comments
고구마 2013.04.22 15:33  
우아~
미스테리 호텔에서 긴장감 돋는 스토리네요.
문이 양쪽으로 철컥 잠기다니... 게다가 혼자이고 짐도 있는데 말이에요.
피비 2013.04.23 02:54  
고구마님과 요왕님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는 듯요~
나중에 우연히 동남아시아 어디쯤에서 딱 만나뵈면 좋겠어요.ㅋㅋ
빠이깐마이 2013.04.22 16:15  
'때로는 출구를 찾아 나간 비상구에 갇힐 수도 있다란 것을..'우리네 삶 속에두,, 굉장히 와닿는 표현입니다..
피비 2013.04.23 03:00  
사실 저런 경우 너무 많아요.ㅋㅋ
오늘도 맛사지 받느라 저녁 시간을 놓쳐 부랴부랴 에어컨 나오는 가게로 밥 먹으러 들어갔는데, 주방 마감했다고 나가라 하더라고요.
일부러 사람 많은 노점 지나쳐서 멀리까지 왔는데 말이져.

좀 상황이 다른가?-_-
별구름달 2013.04.22 16:46  
진짜 당황하셨겠네요..
그래도 교훈까지 얻으셨다니 굉장히 근정적이시네요^^
저같았으면 굉장히 자학을했던지 남탓을 했던지 아님 욕을;;;허벌나게 해대면서 씩씩거렸든지 ㅎㅎ
저도 삶을 대하는태도를 조금씩 노력하며 바꿔보려 애쓰는 중인데 쉽지만은 않네요^^
피비 2013.04.23 03:04  
아, 진짜 아찔했어요. 1층까지 내려가야 하나 해서. 체력에 정말 자신 없거든요.ㅠㅠ
뭐, 그래도 더한 일이라도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요.ㅋ 별구름달님도 나도.ㅋ
nyssa 2013.04.22 19:55  
저도 이런 상황 겪어 봤어요...
정말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ㅠㅠ
그래도 피비님은 운좋게 중간에 문이 열려서 다행이었네요.
저도 높은 층이었는데 결국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와서야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어요 ㅠㅠ
피비 2013.04.23 03:08  
헉!!!!!!
남의 불행이 나에게 위안이 되는 건 흔한 일이긴 하지만,
정말 너무나 위로가 되는 걸요? 동지애도 느낍니다.ㅋㅋㅋ

12층 문을  살짝 덜 닫아놓은 익명의 사람에게 감사해하고 있답니다.
지하주차장까지 내려왔다니 정말 너무하군요.
근데 지나고나면 그냥 웃지요.ㅋㅋ
zoo 2013.04.23 00:04  
12층에서라도 문이 열려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예전 다른분 글에서도 비슷하게 고생한 얘기 본 것 같은데 요즘 대부분의 고층건물은
저런 식으로 안에서는 열려도 밖에서는 안열리는 것 같더라구요^^;
고생하셨어요^^;
피비 2013.04.23 03:10  
역시 태사랑에 올라오는 글은 유심히 잘 쳐다봐야 겠어요.
같은 상황이었다면 주~님은 사전 지식이 있어서 저런 상황을 잘 피해가셨을 듯.

앞으로 비상사태를 제외하고선,
건물 비상구를 이용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어요.
타이뱀비 2013.04.23 13:12  
우와.. 19층에서 12층까지.. 짐들고 혼자 걸어서 내려오시다니 대단하시고 고생하셨어요. 그렇게 힘들에 찾아가신 객실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비상문 이용할때는 조심해야겠어요..
피비 2013.04.23 15:54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은 안 나고, 철제 계단 삐걱대는 소리만 귀에 남아있네요.ㅠㅠ
모두 조심하자는 취지에서 여행기 썼어욤.
여행정보에 한줄로 적으면 안 와닿을까봐.ㅠㅠ
포맨 2013.04.23 15:47  
역 발상으로...

가운바람에 그러고 돌아댕긴다면?...

그와중에 ...부지불식간에 꼭 1층 로비에 나타나야만 하는 불쌍한 가운바람이라면?

얼굴은 팔려도 나라는 안팔겠다라는 소박한 애국심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혼자 투덜대면서 엘레베이터 앞에서 당당하게 니하오마?...를 날린다면?

............우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피비 2013.04.23 16:01  
^^ 그냥 웃지요.
곰돌이 2013.04.23 16:44  
니 하오마  보다는..


히사시부리 데스네~~~

오겡~끼데스까~~~  를  ^^*
meiyu 2013.04.24 01:17  
이 야밤에 웃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포맨님 그리고 피비님.

그래요.
늘~~~감사가 먼저래야 됩니다.

오늘 밤은 좋은 꿈이 찾아올 것 같네요.
곰돌이 2013.04.23 16:43  
이건,

피비님 잘못이 아니네요....

18층 버튼 고장내  놓은  호텔측의  잘못이  100 %임 !!!


아니면....

이런 미스터리한 경험을 하라고,  일부러 버튼 고장을  ??^^;;
피비 2013.04.24 11:38  
명백한 제 잘못이에요.ㅠㅠ
일이 터지고 나서, 엘레베이터 3개 있는데 다 눌러봤어요.
18층 잘만 눌러짐.ㅠㅠ

그냥 비상계단에 갇힐 운명이었나 봅니다.ㅋㅋ
레몬맛사탕 2013.04.23 20:10  
지난달에 미스테리호텔 엄청 고민하다가
또 엄청 검색하다가 결국 답안이 안나와서
다른곳을 예약했었다지요.

남일같지 않네요 ^^; 그리고 비상계단에서의 일
마치 제일처럼 조마조마하네요 어휴...
피비 2013.04.24 11:40  
미스테리호텔 추적하느라 날밤 샌 적도 있다죠.ㅋㅋ
2인 1조로 찾았다면 더 효율적이었을 텐데 말이죠.ㅋㅋㅋ
참새하루 2013.04.24 02:16  
글을 재미있게 쓰시는 재능을 가지셨나봅니다 
피비님 덕분에  스트레스 하루가 다 풀립니다
ㅎㅎㅎ
피비 2013.04.24 11:42  
저 역시도 여행기 제때 제때 쓰니깐, 하루가 알차고 보람찬 듯 착시효과가 있네요.ㅋㅋ
본자언니 2013.04.24 06:27  
글을 너무 재미있게 소설처럼 흥미있게 잘 스셔서 오랜만에 댓글남기고 갑니다~
앞으로의 여행기도 더 기대 합니다~
피비 2013.04.24 11:51  
본자언니님 여행기도 기대하고 있어요.ㅋ 남자분인 걸 알았을 때의 반전이란! 띠용,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재프™ 2013.04.26 16:41  
로터스 호텔이  예전엔 노보텔 이엇다가, 새로 단장하고 재오픈 했을겁니다.
예전에 저도 자주 갔었는데...  ^^

수쿰빗 길이랑 소이33 도는 코너에 음식점...  맛나요... 
국물 요리도 잘 해 주고..
똠양꿍 대신 똥양탈레도 해 준답니다  ^^
주인집 아들 만나시면, 안부 전해 주셔요 ~~~  ㅎㅎㅎ
피비 2013.04.26 17:43  
맞아요! 객실은 레노베이션을 했더라고욤.ㅋ
호텔 낡았지만 기품 있어 좋았어요. 1700밧 정도, 프로모션 가격이면 언제든 다시 이용하고 싶을 정도로욤.
코너 음식점 미처 이용 못 했는데 담에 가게 되면 시도해봐야 겠어요.ㅋㅋ
BeeSee 2013.04.29 14:20  
사실 회사다니다 보면 많이 겪는 일인데 말이지요... ㅎㅎ
피비 2013.05.03 03:17  
제 직장은 그냥 비상구문 열고 담배 한개피 몰래 피고 다시 들어오는 구조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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