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신
아버지와 아이들 상을 물리고 나면 친정 엄마는 대궁밥을 먹곤 하셨다. 새로 지은 밥은 가족에게 주고, 어느새 찬밥이나 누른 밥을 조용히 드시던 어머니. 그런데도 엄마가 차지하는 심리적 힘은 가장 셌다. 이번 여행에서 코끼리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코끼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세 번 있었다. 한번은 치앙마이 동물원. 또 한 번은 도이 인타논 국립공원, 나머지 하나는 루앙프라방 코끼리 야영장에서였다. 동물원의 인위적인 환경도 그렇거니와 코끼리 트렉킹은 더더욱 내키지 않았으나, 아이가 갖는 코끼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차마 그걸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아프리카초원에 가지 않는 이상, 그나마 코끼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이 두 가지 밖에 더 있겠는가? 마치 이상의 시처럼 말이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 이상 ‘거울’ -
코끼리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질 때는 아기코끼리와 함께 있을 때다. 치앙마이 동물원에서 바나나를 먹고 난 어미코끼리는 기둥 같은 다리 하나를 들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 곁에 아기코끼리가 어미 곁을 맴맴 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환호하면서 사진을 찍곤 했다. 루아프라방 코끼리야영장에서도 코끼리들은 아기코끼리를 함께 돌본다. 나뭇잎사귀를 먹느라 뒤처지면 기다려주고 때로 재촉하기도 하면서.
도이 인타논 국립공원의 코끼리 상황이 가장 열악했다. 성수기다 보니 코끼리들이 잠시도 쉴 틈이 없어 보였다. 시지프스는 산꼭대기로 돌덩이를 끌고 올라가다 그것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때 잠시라도 희열을 갖는다지만 코끼리는 애써 사람을 태우고 와봐야 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얼마나 허탈하고 힘이 들겠는가? 조련사는 그러한 코끼리 심정을 아는지 물가에서는 물도 마시게 하고, 일행이 뒤처진다 싶으면 그늘에서 쉬게도 했다. 먼지 목욕을 하느라 흙을 온몸에 뿜어댈 때는 얼른 고개를 푹 숙여야만 그나마 흙먼지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아기 코끼리가 곁에 있었다면 덜 쓸쓸했을 텐데 하는 측은한 마음이 솟는다.
코끼리는 죽을 때까지 몸이 자라나기 때문에 하루 한두 시간밖에 잠을 못자더라도 나머지 시간은 먹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부드러운 나뭇잎만으로는 배고픔을 감당할 수 없어 나뭇가지, 껍데기를 먹다가 어금니마저 다 닳고 나면 서서히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지닌 동물. 새끼를 키우기 위해 할머니, 엄마, 이모가 함께 다니며 가족을 꾸려나가는 지상 최고 크기의 포유류. 코끼리에겐 먹는 것이 곧 시지프스의 ‘돌’과 같은 숙명이 아닐까? 3톤이나 되는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소화도 시키지 못하고 배출하는 나뭇잎은 종이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단다. 이제 어금니마저 다 닳아버려, 더 이상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졌을 때, 코끼리는 무엇을 상상할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 이제는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면서 안도의 숨을 쉴까? 아니면, 이렇게 죽을 바에야, 세상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평생을 살아왔을까? 한탄을 할까?
안토니아스 라인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엇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탄생해. 인생은 그런 거야. 이유 없는 시작이지.”
코끼리를 ‘지혜의 신’으로 섬기면서, ‘시작의 신’으로 섬기는 이유를 혼자서 새겨보며, 친정엄마가 내게 남긴 ‘무엇인가’가 과연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