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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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스탑맘 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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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카이행 밤기차를 탔을 때, 침대칸이 비어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위 칸 하나 아래 칸 하나를 사려다가 표가 없어 100밧이나 더 주고 아래 칸만 두 개를 산 우리로서는 빈칸의 이유가 궁금하다. 그러다가 멈춰선 역이 아유타야다. 고만고만한 아들 셋을 동반한 외국인 부부가 부모님까지 대동해 올라탄다. 척 봐도 사춘기 호르몬이 줄줄 흐르는 큰 아들은 아래 칸에서 자겠다고 뻗댄다. 막내와 아래 칸을 쓰려했던 아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만약, 나였다면 강렬한 눈빛 한번으로 제압했을 텐데....아이를 기르는 남다른 태도에 마음이 동해 우리 자리와 바꿔주었다. 아이 엄마는 감격해마지 않으면서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답하니, 서울을 한번 가봤다며 청계천과 닭볶음탕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작은 아이 살피랴, 부모님 살피랴 여념이 없으면서도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하느라 다 늦게 침대칸에 오른다. 상냥한 여인이다.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내려올 때도 아유타야에 멈췄다. 여차하면 노숙도 감행한다면서 슬리핑백까지 갖고 다니는 한국인 초등학교 교사커플은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심각하게 고민한다. 아유타야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라 하면서. 또 한 번 아유타야의 존재를 각인하는 순간이다. 춤폰을 갈 때도 아유타야를 오며 가며 두 번 지났다. 두 달 가까이 휴가를 왔다는 네덜란드 커플에게 가장 좋았던 곳 하나를 추천해보라 했더니, 그들도 아유타야를 꼽는다. 사람들이 순박하고 도시 전체가 고요하며 평화롭다고 덧붙이며. 그 때부터였던 거 같다. 계획에 없던 아유타야를 방문지로 집어넣은 것은. 동선이 달라, 해변에서 올라오는 기차노선에 아유타야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해서 방콕에 간 다음 다시 기차표를 끊어 내려왔다. 아유타야를 지척에 두고 네 번이나 스쳐지나가다 다섯 번째 되어서야 발을 디딘 배낭여행 초보자의 어리석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여정이다.
세 시간에 500밧으로 툭툭을 흥정한 다음 사원을 방문했다. 방콕에 가서 짐도 찾아야 하고, 황금산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바람도 들어주고, 귀국하기전 태국에서 마지막 맛사를 받기 위해서는 그 정도가 우리가 낼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다.
극성맞은 엄마를 닮아 꼭대기까지 가보려던 아이는 그 사다리가 관광객을 위한 사다리가 아니고 탑에 천을 감싸기 위한 것이란 걸 알고 멈칫한다. 돌로 만든 탑도 추위를 느낄까, 아니면 치장을 내기 위해서일까, 탑마다 불상마다 주황빛 옷감을 휘감고 있다. 와불은 칭칭 동여매서 마치 애벌레가 고치로 변하려는 모습 같기도 하다. 툭툭 기사가 데려가는 곳마다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다. 이렇게 많은 불상을, 이렇게 거대하게 만들 때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어디에 있었을까?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나르던 민중들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앙코르왓트에서도 그랬다. 웅장한 건물 앞에 숭고미를 느끼고 회랑의 부조 속에 숨겨있는 인간의 서사에 비장미를 느꼈지만, 어쩐지 그곳엔 사람의 온기가 없고 어느 순간 돌덩어리들만 가득해 보이면서, 아득해졌던 경험이 생생하다.
사람은 가도 건물은 남는다던가? 17세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아유타야 왕국의 사원에도 역대 왕과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 극락왕생의 소원 속에 제작한 불상들로 가득하다. 어떤 절에서는 사람들이 쟁반위에 돈을 올리면서 스님들의 기도를 청하고 있었다. 태국판 면죄부인가? 심지어 줄마다 100밧 짜리 벌건 지폐를 매달아 놓고 사람들의 헌금을 독려(?)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위해 고개 숙일 줄 아는 경건한 태도는 높이 사지만, 자신의 안녕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며 지폐를 바치는 모습은 과연 팍팍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을지 남의 나라일인데도 가슴이 답답해왔다. 돈이 된다 싶은 사업은 왕실에서 다 갖고 있어도 거리거리마다 왕의 사진이 가득하고, 10밧 20밧의 봉지밥을 먹는 현실을 개선하려하기보다 절에 향을 피우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안녕만을 구하는 태국인의 모습에 고개가 돌려진다.
세 시간 관광을 끝내고 황금산에 왔을 때도 헌금행렬은 여전하다. 그들 뒤편엔 방콕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고층 빌딩부터 옛 건물, 판자촌까지. 부처님은 자신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며 복전함에 돈을 넣는 사람도 복을 주시겠지만 저 아래서, 저마다 자신의 일을 위해 땀 흘려 애쓰는 이들도 외면하지 않으리라.
순간, 바람이 살갗에 와 닿는다.
아유타야가 나를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다.
5 Comments
세일러 2013.02.14 12:49  
레드셔츠가 집권한 것을 보면 그들도 아무 생각없지는 않으나, 기득권세력이 워낙 공고해서....
네버스탑맘 2013.02.14 16:37  
왕실모독죄 수위는 아니겠지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하지만, 우리나라도 그렇겠지만, 민주화와 경제화는 정치하는 사람과 경제인에게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민중의 양심이 진보를 이루는 거잖아요. 그런면에서 안타까움이 들었답니다.
세일러 2013.02.15 15:41  
왕실모독이라뇨...
태국에 대한 애정없이는 나올 수 없는 글인걸요.
민주화와 경제화는 일보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는 것 같아요. 태국은 말이죠.
그런데 레드셔츠가 여러 악조건에서도 승리하는 것을 보면, 태국 민중은 행동을 했는데,
워낙 뿌리깊은 시스템적 문제를 한순간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 같기도 하구요...
제가 예전에 태국 정치/사회문제에 대해 정리한 시리즈글이 있는데, 한번 참조하세요...
https://thailove.net/bbs/board.php?bo_table=free4trv&wr_id=18199&sca=&sfl=wr_name%2C1&stx=%EC%84%B8%EC%9D%BC%EB%9F%AC&sop=and&page=2
네버스탑맘 2013.02.16 20:56  
농민운동가를 방아쇠로 당겼다는 말이 충격을 주네요. 고마운 글 잘 읽었습니다.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9 10:36  
전 아유타야에서 특별히 좋은점 못 느꼇어요
그래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숙박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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