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
산호초
따오섬에 딸린 낭유안은 지금껏 보아온 해변과 달랐다. 회색으로 변한 가지산호의 잔해가 물가에 가득하다. 식물을 닮았으나 엄연한 동물인 산호. 산호초는 지상의 열대우림과 같아 바닷속 물고기 중 30%가 이곳에 서식한다고 한다. 사슴의 뿔 같기도 하고 사자의 발톱 같기도 한 산호의 잔해는 바다속 보이지 않는 도도한 흐름을 몸으로 증거한다.
왕관가시 불가사리가 산호의 몸을 빨아들이면 이렇게 회색으로 변한다지만, 방금 전 물속에서 본 산호는 어떠했는가? 흰동가리돔, 두동가리돔, 능성어, 검정등무늬 나비고기들과 어우러진 오색빛깔 산호. 스노클링 장비를 입에 물고, 구명조끼로 무장한 뒤 바다속에 첨벙 빠졌을 때 총천연색 물고기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는 그 순간 내 몸은 둔하고 열등한 동물이 되었다. 도무지 지상의 자유로운 몸놀림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반면에 검정등무늬 나비고기떼는 빵조각을 향해 달려오면서 내 다리를 부드럽게 스쳐간다. 브레히트가 설파하는 서사극처럼, 여행 속에 파묻히기보다 시종일관 내 경험을 관조하며 객관화하려 했던 그동안의 여행 태도가 일시에 뒤집어진다. 바다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궁극에는 ‘나’라는 실체가 사라지는 경이로움을 맛보았다. 경계를 넘어 영역이 달라지는 세계에 몸을 들여놓는 일이 이토록 황홀하다니. 영감이 필요할 때면 바다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듯하다. 그게 어디 바다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토굴이고, 또 어떤 이는 히말라야며 , 어떤 이는 교회와 성당, 그리고 절일 게다.
보트의 구성원들을 살펴보았다. 전직 CIA였다는 미국인 70대 부부, 태국여인과 결혼한 홀랜드 중년, 신혼여행을 온 중국인 부부, 틈만 나면 키스를 퍼붓는 이십대 연인. 그리고 12살 아들과 여행 온 나. 영어로 얘길 하다가도 자신의 파트너에겐 타이어, 중국어, 한국어로 속삭인다. 아무도 서두르는 사람 없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가이드가 음식을 내오면 서로에게 가져다주며 옥빛바다를 감상해 마지않는다. 망망대해의 평화로운 공동체다.
스노쿨링 포인트를 몇 군데 지나고, 보트에서 내려 낭유안 섬으로 들어오면서,아이는 모래로 거북이를 만들고 나는 상념에 젖는다.
산호초가 생명을 지닌 이상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가 되면 부스스 부서져 나와 파도에 휩쓸려 깨어지고 쪼개져 모래가 된다.
내 여행의 기억도 그렇게 되길 소망해 본다. 온 몸의 세포를 열고, 미지의 세계를 받아들여 저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다가 때가 되면 부스스 솟아나 ‘삶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다시 모래가 되어 순환하고 싶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평생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 굶주린 듯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 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을 걸쳐서 고운 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문명의 배꼽 그리스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