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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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매듭

네버스탑맘 8 1797
매듭
 기차레일의 덜컹거림이 등줄기로 파고든다. 차장이 만들어준 야간 침대는, 남다 자는 이 밤에도 내가 현재 움직이고 있다는 생생한 사실을 시시각각 알려준다. 차장은 스펀지 패드를 능숙하게 펴고 초록색 커튼까지 달아 주었지만 홀로 침대에 남은 내게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이 겹친다.

 

치앙마이.. 배낭여행에 희노애락애오욕이 있다면, 그 중 노여움과 비애, 그리고 염오를 가장 많이 느끼게 했던 도시. 이곳으로 건너올 때, 무엇을 잘못했을까? 루앙프라방에서 훼이싸이로 2박 3일간의 슬로우보트를 타려했던 애초 계획을 수정하고 비행기로 한 시간 만에 당도했던 것이 치앙마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나? 여행자거리 타패에서 승부를 보지 않고 부촌인 님만해민으로 온 것이 실수였을까? 아니면, 아이의 컨디션을 생각 않고 치앙마이 동물원에서 다섯 시간 동안 땡볕에 돌아다닌 무모함 때문인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아이가 탈이 난 건, 여행한지 이주가 지났을 무렵이다. 방콕의 훨남퐁 기차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농카이로 왔을 때도 피곤한 기색하나 없었다. 비엔티엔에서는 야시장에 더 있겠다고 보챌 정도였고, 방비엥의 항아리 마을에서도 몇 백 개나 되는 쵸코우유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다가 더위 먹을까 걱정했는데 그것도 다 이겨냈다. 악명 높기로 소문난 코스.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오는 밤버스도 군소리 없이 이겨냈던 아이인데, 치앙마이에서부터 아침도 못 먹고, 점심에도 편의점의 라면과 아이스크림으로 전전하더니 끝내 배탈이 나고 말았다.

 

속이 미식거리는데 토하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배가 부글거리는 경험은 아이에게 혹독했는지, 끝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갖고 온 약이 듣지 않아 현지 약국으로 달려가 위염진통제를 사오고, 설사가 나고부터는 지사제도 사오고, 아이 속을 달래려고 한인식당에서 특별히 죽도 쒀 오려고 오며가며 삼십분이 넘게 걸리는 곳을 너 댓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젠 내가 탈이 날 지경이었다. 저녁엔 힘이 들어 쓸쓸히 맥주 한 캔을 마셨다. 발권이 끝난 뒤지만 수수료가 나오더라도 일정을 줄여 돌아가야겠단 생각으로 투어익스프레스에 문의를 해놨다. 방비엥의 항아리 오지마을에서 우리의 앞날에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매듭을 손목 가득 매어주셨는데 이렇게 끝이 나는가 싶어 허무해졌다.

 

우리가 머물던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아무래도 아이를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 문을 여닫는 소리, 화장실 쓰는 소리, 가래침을 뱉는 소리까지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숙소를 옮기고, 점심쯤엔 아이가 조금 괜찮은 거 같아 일식집에서 초밥을 사 먹였다. 내처 싼칸팽 온천이 가고 싶어 쏭태우를 타고 시내에 갔더니 아침 7시에 출발해야 저녁에 돌아올 수 있단 말만 들었다. 헛걸음이 아까워 발맛사지를 찾아서 받고 투어를 하나 신청했다. 그마저도 못하면 치앙마이 와서는 동물원 간 것이 전부인 허전한 여행이 될듯해 마음이 바빴다.

 

태국은 여행자로 넘쳐나는 최성수기다 보니, 모든 것이 기계적이다. 가이드 겸 운전사도 그렇고, 식당도 그렇고, 짚 라인으로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들도 그렇고, 친절한 모습보다는 그저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해치우기에 바빠 보였다. 다만, 난정원에서는 옷핀에 어여쁜 꽃을 달아 여행객을 환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마음이 귀해 꽃이 시들고도 핀을 버리지 못했다. 코끼리를 타고 난 뒤 뷔페식인 태국 점심이 있었는데 여준은 또 못 먹는다. 점심 뒤엔 트랙킹을 나섰다. 영국에서 온 물리치료사 청년, 전라도에서 온 대학생 남매, 그리고 우리 둘, 이렇게 다섯 명만 가이드를 따라 등산을 했다. 코끼리를 타고 래프팅을 하는 것보다 두 발바닥에 와 닿는 땅기운이 좋아 마음이 편해진다. 나중엔 폭포에서 물놀이도 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여준에게 온힘을 다해 아이를 잡아주면서 물을 조금 먹었나보다. 목이 따끔 따금 하다. 그래도 아이가 좋아하니 저절로 흥이 난다. 저녁엔 삼겹살과 차돌박이까지 사 먹였다. 나이트 바자에 가서 그동안 못 샀던 기념품도 사고 바트도 넉넉하게 인출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새로 옮긴 호텔은 쾌적하다. 부대시설도 좋아 빨래도 깔끔하게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일기도 쓰고 가계부도 정리하면서 배탈을 이겨낸 아이에게 감사했다. 더 많은 경험을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다음날 다섯 시 방콕 가는 밤기차를 탈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니 님만해민의 숨겨진 카페도 가보고 치앙마이 대학도 가야겠단 마음에 서둘러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먹는 거로 날 힘들게 한다. 태국음식을 잘한다는 레몬트리를 힘들게 찾아가 가장 무난해 보이는 음식을 시켰지만 아이의 구미를 당길 수 없었다. 샌트럴백화점의 케이에프씨에 가서 패스트푸드로 대강 끼니를 잇고 말았다. 속이 안 좋다며 감자만 몇 개 먹고 말아버린다. 그 모습을 보자 심신은 자꾸 지쳐갔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어제 세운 계획은커녕 이런 상태로 아이가 밤기차를 잘 탈까 싶어 또다시 걱정이 인다. 한인식당에 가서 김밥을 하나 먹이고 하나는 포장을 했다. 시루떡도 있길래 그것도 집었다. 김밥은 단무지가 떨어져서인지 전혀 맛이 나지 않았다. 또 못 먹는다. 급기야 나는 아이를 앞에 놓고 폭탄선언을 했다.

 

“ 여행은 끝없는 모험심이 기본인데, 이렇게 한국에서처럼 먹으려 하고 현지음식에 적응을 못하면 어떻게 같이 여행을 하겠니? 이제 다음엔 엄마 혼자 여행해야지 너랑은 안 되겠다. 정말 너무 힘들어.” 아이가 금방 시무룩해진다. 읽으라 해도 읽지 않던 책을 꺼내어 조용히 읽는다. 아이를 위로해주기엔 나도 지쳤나보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짐을 꾸렸다. 바깥사장님이 쏭태우 잡기 좋은 곳까지 데려다주신다며 차에 짐을 싣는다.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아이한테 먹인다고 물 한잔 데워 달랬더니 그것도 돈을 받고 수건 한 장, 생수 한 병 주지 않는데, 이곳 인심은 넉넉하기만 하다. 기차역이 여러 개 있으면 어쩌나 염려되어 몇 번이나 승객에게 기차표까지 보여주면서 마침내 방콕 가는 밤기차에 올랐다.

 

김밥과 시루떡을 저녁 삼아 먹고, 일찌감치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때부터였다. 명치끝이 더부룩하고 꽉 막혀서 내려가지 않는 통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기 침대가 있는데도 곁에서 조잘거리던 아이마저도 오늘은 일찍 잠들었다. 이리 뒤척 , 저리 뒤척이다가 화장실에 가서 토하기도 하고 손도 주물러보았지만 속수무책이다.

 

‘아! 이 아이도 이렇게 힘들었을 텐데.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그 아이의 고통 앞에서 여행을 같이 하지 않겠단 소리나 하다니.’

 

부끄러움으로 아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손을 잡았다.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중얼거리면서.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뒤져보았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약들이 쏟아진다. 난정원에서 준 옷핀, 항아리 마을에서 손목에 지어주신 매듭, 지사제, 위염진통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실로 손발을 묶고 핀으로 피를 내었다. 검은 피가 맺힌다. 속이 내려간다. 약도 먹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만난 인연들이 모두 모여 야간기차 안에서 나를 돌보아주는 기분이다.

 

한 달이나 여행을 떠나는 내 선택에 대해 뭐라 하기는 커녕 없는 용돈을 쪼개 달러를 봉투에 담아주던 남편. 방학엔 자주 볼까 은근히 기대하시던 부모님께 폭탄선언 하듯 장기여행에 대해 말하자 쓸쓸해하면서도 건강을 염려해주시던 친정 부모님. 어디로든 가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친구들이 내 여행을 보고 알게 모르게 맘 상했을 텐데도, 그저 내 무사귀환만을 빌어주며 격려했던 모든 것이 새삼 감사해서 목젖까지 흥건해진다.

 

내가 내 돈 모아, 내 두 발로 여행온 거지! 하는 교만함이 사그러들면서, 내 여행을 알고 있는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돌처럼 뭉친 시루떡이 내려가고, 남은 일정 동안 아이에게 더 많은 걸 보여줘야겠단 의욕이 넘치면서 투어익스프레스에 문의한 것도 취소했다.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무르익었다. 커피를 마시라는 소리와 차장이 다시 만들어주는 의자에 앉아 날이 밝는 것을 보았다. 그저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까마득하게 다른 날을 맞이한 기분이 든다. 무리진 새와 초록빛 들판과 오렌지빛 일출을 보며 그렇게 다시 방콕에 돌아왔다.
8 Comments
네버스탑맘 2013.02.09 15:20  
터키를 다녀와서는 문명 자체가 주는 영감으로 여행기가 금방 완성되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도무지 진도가 안나갔거든요. 격려의 말씀에 기운이 번쩍 납니다. 고맙습니다.
요술왕자 2013.02.09 15:43  
남은 여행에서는 계속 행운만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촉디 나~
네버스탑맘 2013.02.10 00:28  
영광입니다~
쿨소 2013.02.13 11:43  
최근 글부터 봐왔더니 안되겠네요 첫글부터 봐야지..^^
저 또한 요왕님의 기원에 한 손 더 보탭니다..
요왕님이 촉디 나~ 해주셨으니.. 전.. 두래투엥 나 크랍~~
네버스탑맘 2013.02.13 12:17  
^^태국어를 잘 모르지만, 앞으로 행운이! 아니면 두루두루 잘 되길! 이렇게 들려요.ㅎㅎ
쿨소 2013.02.13 13:42  
요왕님은 행운을 기원하는 good luck..
전 몸조심하시라는 의미의 take care~~ 입니다..~~^^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9 10:23  
헐... 아이가 아팟다니... 힘드셧갯네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저보다 제 조카가 더 식성이 좋아요;;;
전 숙소는... 싼곳을 잡아도.. 식사는.. 먹고 싶은것만 먹엇어요..
그 덕분인지.. 배탈 난적은.. 물 때문에 1번..그것도 장염약 먹으니.. 바로 나앗고요
점심 저녁은... 에어콘 나오는곳만...
싼캄팽.. 아침 9시에 가서.. 저녁 6시에 돌아왓는대.. 가는길도 시골스러워서 좋앗고..
수영장 희뿌연 물도 좋앗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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