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토리 이야기. 시암 럽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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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토리 이야기. 시암 럽디.

다동 17 5055
 
 
 
여행은 시작한 지점에서 끝을 봐야 한다고 한다.

내 입장에서 보면 뭐, 그냥, 개떡같은 소리다. 초저녁 고스돕 판에서 낙부금 통으로 날려버리고 해장국에 쓴 소주 마시는 새벽을 맞아도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나는 여행을 끝내고 싶지 않은 여행자. 시작점에서 돌아볼 수밖에 없는 지난 날의 기억은 아쉽고 또 아쉬우며 못내 아쉽다(아, 더 가열차게 놀았어야 헀는데... 그때 그 자식의 복부가 아니라 싸데기를 쳤어야 했는데... 그녀와 당일날 바로 쇼부를 쳤어야 했는데,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방콕으로 돌아왔다.

이왕 돌아가야 한다면 낯선 곳으로부터의 귀환이 매력적이지만, 방콕 인& 아웃이 주는 실용성과 영향력을 벗어날 정도로 강렬하진 않았음으로 나는 결국 다시 방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암을 선택했다.

방콕하면 초지를 일관하는 자세로다가 일단 카오산이고 그냥 카오산이며 내처 카오산이었다. 동남아 최대의 여행자 거리 카오산의 자장 아래 어느세 관성이 되어버린 걸음을 배신, 배반하고 선택한 시암. 일단 이름이 맘에 든다. 군주제에 대한 망상을 버리지 못하는 태국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만 한. 갑자기 빡빡머리 형형한 눈빛으로 "쉘 위 댄스" 하던 율 브리너가 생각나기도 하고.

무슨 똥배짱 이었을까? 라기 보단, 그냥 줄곧 '생각 없음' 이었다. 치앙마이 발 방콕 행 버스의 도착시간을 나는 몰랐고, 묻지도 않았으며, 물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음으로 당연히 나는 도착시간을 몰랐고 물론 도착장소 역시 알 지 못했다. 그냥 환한 아침이면 도착하리라, 짐작하고 있었을 뿐.

사위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 나는 버스에서 거리로 내쳐졌고 어리버리 멀뚱멀뚱 멍 때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이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방콕이냐?" 쌩~. "여기가 뱅콕이냐?" 역시나 쌩~. 방콕? 뱅콕? 바앙콕? 뱅코옥? 쌩~. 쌩~. 쌩~. 쌩~.

허나 생각 없는 내게 운빨이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던 방콕 아가씨 둘은 내게 어딜 가냐고 물었고, 시암으로 간다 했더니, 우리도 거기 비스무리한 데 간다. 원한다면 데려다 주겠다, 라는 감사한 제안을 덥썩 물었다. 그리고 냉큼 저녁 약속을 잡았다(은혜를 모르면 싸나이가 아니다!).
 
 


(새벽이라고 해야 하나, 아침이라고 해야 하나) 6시를 즈음으로 하여 도착한 Lub D Siam Square(이하 럽디).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제법 참신한 모양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그게 제법 그럴싸하다. 일단 Square 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처럼 이만 평 규모의 건물이 '광장' 처럼 늘어뜨려져 있었다... 는 건 말이 안 되고, 이전에 본 적 없는 모양으로 아주 그냥 '네모' 반듯하게 훗가시를 잡고 있었다. 그 모던함이 청담동 어디 미술관이라 해도 어울릴 정도로.

음주와 흡연과 수다를 비롯 각종 진상과 작업을 담당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이기 만땅의 야외 테라스를 지나 건물 안으로 진입, 실내 레스토랑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리셉션 앞에 섰다. 분분한 어스름이 말해 주듯, 새벽과 아침의 경계가 모호한 시각임에도 리셉션에는 사람들의 활기가 있었다.
 






리셉션을 지키는 직원들은 간결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체크인은 오후 두 시, 그래서 너는 못 들어간다, 는 것. 그 간결한 업무처리 방식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인류의 성장도를 전혀 염두하지 않는 좁아터진 버스에서 보낸 지난 밤을 생각하면 고급 스파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스파는 고사하고 일인용 침대에도 몸을 눕히지 못하는 신세라니 아, 놔.

지지고 볶고, 삶고 찌고 하는 심도 깊은 요리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커피한잔에 뜨끈한 토스트를 먹기엔 그림이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레스토랑에 앉아서 시간이나 죽여볼까 생각이 있었으나, 커피한잔에 뜨끈한 토스트를 먹기엔 내 속이 나빴다. 종종 메스껍고 자주 미식거렸다(이 증상은?).

다행히 샤워가 가능했다. 여행용 트렁크 기능을 수반하는 숄더 백을 로기지 룸에 맞겨 놓고(나는 배낭은 메지 않는다. 절대로) 간단한 샤워도구만 챙겨 숙소와 욕실이 있는 계단을 밟았다. 내가 가야할 곳은 Mixed Room 이 있는 삼층, 차츰 올라가는 걸음이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럽디, 21.5불 짜리 고가의 도미토리, 이미 외관에서 느끼고 리셉션을 겸한 레스토랑에서도 느꼈지만, 실내가 보여주는 정숙하고 음전한 모양새가 능히 훌륭했다. 21.5불이 아깝지 않았다(물론 성수기 요금이다).
 
 




 
 





 
 
 
 
 

빼어난 구조를 자랑하는 건물에 욕실이 형편 없을 리 만무. 여러사람은 한꺼번에 수용가능함으로서 고객을 최선으로 배려하는 욕실에서 거짓 없이 핫(hot) 한 샤워를 즐겼다. 싸구려 도미토리 그러니까 3.95불 또는 5불 짜리 호스텔에선 그닥 핫 하지 않은 미적지근한 샤워를 만끽할 수 있다. 나 그런 호스텔에서도 묶었다. 왜? 거기가 제일 인기가 좋았으니까. 인기가 좋으면 이쁜이들이 몰리니까. 이쁜이들이 몰리면... 얼레리 꼴레리 하니까!

사람이란 자고로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으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하는 욕망의 동물. 샤워하니 머리 감고 싶었다(응? 비유가 맞나?). 그러니까 이걸 언제 감고 안 감았길래 이리 가렵나 따져보니, 그러니까 태국 북부에서 감은 적이 없고, 라오스에서 한 번도 안 감았고, 베트남... 아, 하노이에서 하롱베이 투어를 가지 전에 감았으니 대략 2주.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가려움이 정도를 지나쳤으나, 마침 아무런 해야 할 일도 없었기에 세심하고 꼼꼼하게 머리를 감아내렸다. 그 결단(?)을 돕는 헤어드라이기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여행에 나서 처음으로 손수 머리를 감는 노고를 감내하고 나니(평소엔 미용실에서 감는다. 대략 5~10불이면 능숙한 맛사지까지 겸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에선) 그 영광에 미천한 몸뚱아리가 몸둘바를 몰랐던 것일까. 피곤이 한 방에 가신다.
 


 
 
 
(참고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욕실은 남녀공용이 아닌 남성전용이다. 남녀공용의 욕실이라면 대략 이런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진다. 옹골진 가슴굴곡위로 하얗고 커다란 타올을 두룸으로써 꼭 하얗고 짧은 원피스를 입은 듯한 금발의 아가씨가 젓은 머리카락 움켜쥐고 칫솔질을 하고 있을 때, 우통을 까고 있는 젊은 동양인 청년 하나는 날렵하게 면도를 해 나간다. 그리고 둘은 젓은 눈길이 마주친다. 딱히 무어라 말 할 필요 없이 찡긋~ 무언의 인사를 통해 말한다. 좋은 아침! 또는 안녕 예쁜이! 혹은 아가씨 매끈한데~.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신데~. 나는 그 그림같은 풍경을 베트남에서 겪은 바 있다. 하하하)

말끔하게 단장하고 커피 일 잔을 위해 1층의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니 잠시 인사 나눈 한국인 모녀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양해를 구한 후 동석, 모처럼 한국말로 노가리 푸니 그 또한 즐겁지 않을 쏘냐.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한국인 모녀(참고로 거기서 모텔하신단다)에겐 캄보디아로 향해야 하는 정보가 미흡했고, 마침 나는 캄보디아를 두 차례 다녀와봤기에(그래요, 나 캄보디아 두 번 갔다 온 사람이예요) 소신 껏 정보를 전달함은 물론 이제 별 쓸모가 없어진 가이드 북도 함께 넘겼다. (결국 내가 쌩판 모르는 사람에게 2만 원 짜리 가이드 북 줬다고 애기 하려고 이 단락을 써 내려간 것은 아니다) 뉴질랜드에서 거주하는 J양께서 대한민국 남도 담양에 사는 나를 안다기에 더더욱 기꺼웠다(참고로 나는 전혀 안 유명하다. 우연히 봤단다).

"이따 또 봐요" 라는 인사로 헤어졌으나, 나는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 이따 또 못 보는 사람이다. 여행지에 여행자는 즐비했고 여행지에서 여행자들이 마시는 맥주는 지천이니, 나는 여행지에서 여행자들과 맥주를 마시는 일로 여행의 대부분을 보내며 항시 바쁜 일과를 보냈다. 내겐 그게 편히 쉬는 일이었다.

마땅히 할 일 없음으로 마땅히 마셔야 겠기에 나선 아침, 나는 그날 방 구경도 못 했다. 체크인 시간은 오후 두 시, 나는 새벽 세 시가 넘어 들어왔다. 그 다음날(아... 또 그 밤의 스토리가~).
 




죽은 듯이 자고 싶었고 죽었나 싶었을 때 깨었다. 해도 시간은 고작 아침 열 시. 만취로 향한 몸을 뉘인 곳은 남의 침대. 개인물품을 보관하는 열쇠와 방을 출입하는 카드키 그리고 베게커버와 시트가 바닦에 고스란히 놓아져 있었다. 제 정신으로 둘러 본 방. 푸른 빛으로 도배된 4인실 Mixed Room 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조를 띄고 있었고 푸른 빛이 도배된 내관이 시각적으로 편안했다. 쌈박했다.

죽었다 싶게 주무신 간밤이 보살핀 덕인지 몸이 가뿐하다. 오늘도 취하겠군... 이라는 생각이 아침과 동시에 들었고 물론 실행에 옮겼다. 바이런의 말마따나 생의 가장 큰 재미는 만취에 있지 않겠는가. 하하.

몸 상태를 풀(Full)로 단장하고 내려간 1층의 레스토랑에서 공짜로 제공되는 컴퓨터를 좀 만졌다. 여긴 한국어가 읽히기도 쓰이기도 했다. 여행에 나서 인터넷 사용을 거의 안하는 인간인데, 베트남에서 사용할 일이 있어 몇 번 접속을 시도했으나 한국어는 쓰기는 물론 읽히지도 않았다. 다른 방콕의 호스텔 사정은 모르나 여튼 여긴 읽히고 쓰인다. 그래서 읽고 썻다(어젯밤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노라고). 그 무료로 사용 가능한 LCD 모니터를 지닌 컴퓨터가 대략 열 대는 넘는데, 지랄맞게도 의자가 없다. 대충 쓰다가 그냥 나오라는 무언의 권유인지도.
 
 


시암의 럽디는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픈 근사한 호스텔이었다. 그날 밤, 서울로 향해야 하는 나를 위한 마지막 잠자리로써도 훌륭했다. 마지막으로 고온에서 압축해 내린 50밧(대략 이천 원) 짜리 커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굿모닝 이쁜이들~. 앉아도 되?"

"물론".

역시나 물론 안 될 리가 없지 않는가. 수다를 겸한 향긋한 커피에 방콕의 마지막 아침은 참으로 밝았다. 
 
17 Comments
낙슥사 2012.04.01 00:06  
대단한 패션 센스를 가지신 분 같네요. 사진이 모두 화보집 같습니당.
다동 2012.04.01 09:09  
칭찬으로 듣습니다. 하하.
두바이귀부인 2012.04.01 12:59  
에르메스 에르백...가방이 부럽습니다.
다동 2012.04.01 14:43  
많이 팔린 모델이죠. 여행에 즐겨 동반 됩니다. 하하.
다람쥐 2012.04.01 19:05  
사진 찍어주신분 솜씨가 대단하네요.
다동 2012.04.01 20:41  
그닥 대단하지 않습니다. 셀캅니다.
케이토 2012.04.02 15:48  
감각적인 사진과 글! :) 요 앞 지나다닐때마다 언제 한번 묵어보려나 했던 럽디네요.
난중에 혼자 간다면 여기 꼭 묵어보고 싶었는데, 다동님 후기 덕분에 대리만족 합니다. 후후후.
다동 2012.04.02 20:06  
사소한 졸문과 빈약한 감성에 대리만족을 느껴주시다니, 그저 감사할밖에.
언제나 글 잘 보고 읽고 하고 있습니다.
펜더 2012.04.04 01:07  
다동님 글은 항상 재미나게 읽고 있습죠 항상 아뒤가 궁금했는데 다동이라는 한자어? 마음을(이) 동한다? 여행자의 궁극적 마음가짐인지 다똥이라는 실존적 허무주의인지...하하 평소에는 이런 단어를과 멀리 있지만 다동님 글을 읽고 있으면 너무나 내스스로 흡족하게 단어 선택 하나에도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네요... 오랜만에 귀환 반갑습니다...그리고 리모콘 기능 새로 장착하셨나봐요... 모델의 각이나 구도의 힘을 빌려 (한사람이 찍은 거 같은^^) 판단해보건데 리모컨이 아닐까 → 느낌좋네 → 비록 유선일지라도(저의 디에쌀이 구형이기에) 구매하고 말리라 라는 충동을 불러 일으키네요... 항상 응원합니다.
다동 2012.04.04 19:41  
차茶 아이童 해서 차 달이는 아이 입니다. 어릴 때 지리산에서 두 해를 살았는데 그때 받은 아명입니다.
사진은 무선리모컨을 이용한 게 맞습니다만, 태옆식 구형(셀프 타이머) 입니다. 바디는 짜이즈 이콘, 렌즈는 15미리 물렸네요. 필름은 둘, potra 160vc와 e100vs.

추신. 태사랑을 글 올리기가 불편해서 잘 올리지 않는 편입니다. 차차 올려볼까 싶은 중 입니다.
펜더 2012.04.04 01:08  
아참 저의 아이뒤 뜻은 뭘까요? 히히
다동 2012.04.04 19:37  
펜더 기타밖에 떠오르는 게 없네요. 하하.
펜더 2012.04.05 00:43  
빙고 20년째 C코드네요 ㅎㅎ
큼큼이 2012.05.10 18:07  
아, 정말 로그인 하게 만드는 럽디사진 잔뜩이네요!!!(사실은 가입도 이제함)
제작년에 새벽 4시까지 저 테라스에서 여행자들과 수다를 떨었다며 +_+
캄에서 있다와서 그런지 왠지 비싸게 느껴지던 맥주도 공짜로 얻어먹으면서
기타치며 놀던 베짱이!

다녀온 뒤에 친구들에게 추천에 추천을 가미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던 럽디.. 또 가고 싶다!

이번 7월에 한번 또 가리리이다앙..
쌍예 2012.09.27 01:22  
헐..너무 멋있어.....간지가 쓰나미로 몰려오네요
쌍예 2012.09.27 01:22  
밥한번 사드리고싶네요
다동 2012.09.27 08:15  
밥은 제가 사드리죠, 뭐.
지금은 소설을 쓰는 중이고, 쓰고 있는 여행기 <인도차이나 표류기>는 내년 봄에나 출간을 목적하고 있네요.
심심하면 한 번 읽어보세요. 기존과 좀 다를 겁니다.
네이버 검색에 '인도차이나 표류기'. 프롤로그부터 읽으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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