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극.복.여행기] Vol-02-1. 무작정 걷다 멈추기
시작하기에 앞서. 예상보다 너무 늦어져 버렸네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직장에 복직해서 일이 많은데다
이번 주는 개인적으로도 너무 바쁜 한 주여서
진짜 밤 잠 줄여가며 준비했는데도 이렇게 느지막이 왔습니다. (__)
명절, 아오, 이건 뭐 쉬는 날이 아니라 완전 노동절입니다.
시집 못가는 것도 서러운 딸을 이리끌고 저리끌고 3박4일 장보러 다니고
어제 오늘 하루 종일 허리 필 틈도 없이 집안일만 한 부엌데기 입니다.
설이라 그런지 태사랑이 어찐지 좀 휑하니 빈 집 같은 느낌이 드네요,
기분 탓일까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맛있는 것 많이들 드시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한 설 연휴 보내세요.
| 연애,
| 시작할 할 때는 마치 피어나려는 꽃망울처럼 싱싱하고
| 무르익을 때는 활짝 핀 꽃처럼 수려하지만
| 끝나고 나면 결국은 볼품없이 말라비틀어져
끝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꽃처럼
| 찰나의 눈부심으로 반짝이는 것.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여기저기 형편없이 부서진 채 불안하게 흔들리던 다리가
결국은 흉물스런 아귀를 벌리며 두 동강 나 끊어지고 만다.
그 사이 균열된 틈새를 뛰어넘으려 몸을 날린 딱 한 발 앞서가던 이가
여지없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걸 잡아보려고 무작정 손을 내뻗는 순간,
그때까지 마치 진공상태인 듯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던 정적 속에서 갑자기 “아악-”하는
현실감 넘치는 비명 소리가 귓가로 흩어진다.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니 스펙타클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흰 면 티를 걸친 너른 등판만 뜬금없이 시야에 가득하다.
그대로 동그랗게 뜬 눈을 굴려 익숙한 것이라곤 눈에 뵈지 않는 낯선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아뿔싸, 꿈이었구나! 그런데 이일을 어째, 덕수 놈 등짝으로 폭풍펀치 날렸구나, 싶다.
아 놔, 온 몸을 불사르며 꿈을 재연하려는 이 몹쓸 여우주연빙의 잠버릇이 중증에 이르렀구나.
잠기운에 가물대는 두 눈을 애써 꿈벅이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덕수의 얼굴을 보자니
미안한 가운데서도 크크큭, 웃음부터 터지고 만다.
영문도 모른 채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덕수는 멍한 표정으로 부스스 일어나 앉더니
아침 댓바람부터 미친 여자처럼 혼자 연신 킬킬대는 나에게,
김덕수씨 : 나 꿈꿨어. 뒤에서 누가 내 등을 때리는데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 너도 들었지?
라며 히죽 웃는 거다.
덕수는 반대로 자신이 잠꼬대로 내지른 “악-” 소리에 내가 잠이 깨서는 그게 웃겨서 웃는 줄 아는 모양이다.
난 너무 웃겨서 그 등짝 내가 때렸다, 고 말도 못하고 이제 아예 배를 잡고 뒹굴었고
덕수는 제 입장에서도 생각할수록 웃긴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 테러의 진상은 알지도 못하면서) 같이 웃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간만에 큰 (진실 따윈 저 깊숙한 곳으로 은폐한 검은) 웃음으로
태국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한다.
조식을 먹는 1층 식당. 아담하지만 깔끔하고 예쁘다.
바로 앞에는 주로 현지인들이 식사를 사먹는 노천 식당도 있다.
서 너 가지의 차림표 중에서 1인 1식사 선택 가능.
주문한 조식을 기다리는데 덕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덕수의 하품이 끝나자 이번에는 나 역시 긴 하품이 늘어진다.
아침부터 피곤하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나의 버르장머리 없이 격렬한 잠버릇에 일찍 깬 이유도 있지만
어젯밤 잠들기까지도 꽤나 오래 뒤척여야만 했던 탓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멈추지 않고 울려대는 무질서한 음악소리와
가끔 과도한 음주로 ‘하이드’라는 새로운 자아를 만나 세상의 중심에 지 밖에 없는 줄 아는 다국적아해들
혹은 탯줄과 더불어 정신줄도 함께 자르고 나온 모태무개념 아해들의 지칠 줄 모르는 고성방가의
이중창에 잠 못 이루는 밤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밤 정작 우리를 잠 못 들게 한 것은 예정된 소음이 아니라
(사실 사왓디 방람푸 인은 카오산 로드 중심에는 있지만 안쪽에 위치한 덕분에 바깥 소리가
한 번 차단되어 크게 시끄럽지도 않다)
내부의, 전혀 예상치 못한 은밀하고 뜨거우며 생생한 것이었다.
(경험해 보신 분들, 눈치 빠르신 분들, 남들보다 쵸큼 본능의 부르짖음에 충실하신 분들이라면
무엇인지 짐작하시리라.)
(혹시... 어젯밤 당신들 아냐?!)
우리가 방에 들어왔을 때(자정 즈음)도 이미 들리고 있던 강도 높은 응응-_- 소리는
그 이후로도 한참[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 = for a long time]동안 계속되었다.
우리의 숨죽임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소리는 점점 크게만 들려 정말 듣기 싫은데도 안 들을 수가 없게 되고,
그러다 잠깐이라도 소리가 멎으면 정말 끝난 건가 귀 기울이게 되고, 그러나 금세 다시 시작되고,
그래서 피곤한데도 잠을 잘 수가 없고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도 모르게,
대화1. 김덕수씨 : 저 여자, 아오~ 할 때 마이클 잭슨 같지 않냐?
[나]란여자 : 어디서 들어본 소린데 했더니, 그래, 마이클 잭슨이었네.
대화2. 김덕수씨 : 저 여자 정말 좋아서 저러는 거 같아?
[나]란여자 : 그건 모르겠고, 왠지...목마를 것 같다.
대화3. [나]란여자 : 잠을 못 자겠어. 쟤네 얼굴 너무 보고 싶어.
김덕수씨 : 너무 시끄럽지? 내가 가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한 마디 하면서 보고 올까?
[나]란여자 : 너 이제 뼛속까지 한국사람 다 됐구나? 훗, 기쁘면서 슬프다.
대화3. 김덕수씨 : 저 남자 불쌍해. 저건 내가 볼 때 혹사야.
[나]란여자 : 소리가 2/4박자에서 4/4박자로 느려졌잖아. 난 쌍방혹사다, 에 한 표.
이토록 심도 깊게 그들의 소리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 속의 ‘변태’라는 자아를 만나기도 했다.
태국에서의 첫 날 밤은 이런 중독성 강한 악순환의 무한반복 속에서 깊어갔으며,
무슨 중국산 비아그라라도 드신 건지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테너와 소프라노의 하모니를 자장가 삼아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초간단이지만 공짜이기엔 큰 기쁨인 아침 식사에 간밤의 피로도 함께 우걱우걱 씹어 삼키며,
각자 가고 싶은 지역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얘기하면서
한 달짜리 비행기 티켓을 끊고 무작정 태국으로 날아간다, 뒤로는 전혀 계획하지 않은
백지 상태의 여행일정을 잡아본다. 아래의 목록이,
1.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방콕 시내 돌아다니기
2. 짜뚜작 주말시장 가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군것질하기
3.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모친께 엽서 보내기
4. 야간버스 타고 푸켓 가기
5. 트랜스젠더 쇼 보면서 순위 매기기
6. 길거리에서 낮술 마시기
7. 명문대학교 놀러가서 공부 잘 하는 학생이랑 밥 먹기
8. 열대과일 질리게 먹기
9. 칸짜나부리 가서 (역사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애들 (이미 저세상 가셨을 테니 맘 편히) 디지게 씹기
10. 닉쿤 같이 생긴 애 찾아서 무조건 들이대 보기
11. 해변에서 침 흘리며 낮잠 자기
12. 한국에 가서도 연락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태국 친구 사귀기
13. 미친 척 꽃 달고 클럽 가서 어우동 춤사위 한판 벌리기
14. 수평선이 보이는 해변에 앉아 일출 보기
15.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꼭대기에서 석양 보기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여줄 우리의 완소 여행 나침반, “Just do it!” 되시겠다.
(명문대학교 화장실에서 응가 해보기, 마시지 아줌마/아저씨 꼬셔서 공짜로 마사지 받기 등의
내기성 저질 항목 따위들은 자체 검열)
자, 그럼 당장 오늘은 무엇을 해볼 것인가, 고심하던 우리는
(동시에, 칸짜나부리, 를 얘기했으나 투어 예약을 안했었기에 당장 내일 일 순위 일정으로 잡아두고)
오늘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마음 내키는 곳에서 멈춰서 보기, 를 하기로 하고 여행길을 나선다.
태국 여행은 벌써 네 번째인데도 다행히 아직 안 가본 곳이 많다는 게
(그럼 그동안은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녔나 싶기도 하지만;;;) 남겨진 과자처럼 흐뭇하다.
그렇게 시작해 무작정 걷다 처음 발길을 멈춘 곳은 바로 탐마쌋 대학교.
쫄라롱껀 대학교가 우리나라의 서울대 격이라면, 탐마쌋 대학교는 고대/연세대학교 격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표현을 빌리자면 말 그대로 SKY이며
한 마디로 앞으로 미래를 이끌어 갈 주역이 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재 양성의 장인 셈이다.
특히 탐마쌋 대학교는 그 당시 싯푸르게 젊던 학생들의 피와 눈물로 태국 민주화의 근원이 된 만큼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명실상부한 명문대가 아닐 수 없겠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명문대 치고는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그만큼 명문대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이 소수로 제한되어 있다는 뜻일 테고,
어떤 의미로 보면 그만큼 대학 진학 자체가 보편화 되지 않는 교육 분위기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 싶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된 분위기가 쾌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 색깔이 참 퉁명스럽긴 하지만) 수도의 젖줄 차오프라야 강을 곁으로 둔 경관이
규모에서 오는 실망 따위는 단연 압도하고도 남는다.
다른 이유는 막론하고 1시간 남들 놀 때 1시간 공부하고, 남들 30분 밥 먹을 때 10분 밥 먹고 공부하고,
남들 5시간 잘 때 3시간씩 자며 공부해야 하는 정도의 남다른 노력 없이는 갈 수 없다는 점 하나를
높이 평가해서 일류 대학이라 하면 콩깍지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나로서는
혼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여럿이 모여 토론하는 학생들도, 수다 떠는 학생들도, 밥 먹는 학생들도,
심지어 연애에 한창인 학생들도 모두 다 똑똑하고 잘나 보인다.
그런 지성미 속에서도 간혹 교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로 인해 우리나라의 중, 고등학생들이 가질 법한
순수함과 풋풋함을 느끼게 하는 것 또한 태국 대학생들만의 특별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대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보고 싶게끔 하는 매점과 식당에도 안 들러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처럼 확실히 모든 게 시중 판매가 보다 저렴하다.
편의점에서 미리 사서 무겁게 들고 온 생수(그것도 Large size!)와 커피가 후회스럽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준 조식을 먹고 나온 터라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태국의 알아주는 명문대 식당에서 싸고 맛있는 식사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식당에 온다.
학생들이 다양한 음식을 먹고 있었으나 차림표는 태국어인지라 우리 앞에 선 학생을 따라
볶음 국수 하나와 쏨땀 하나를 주문하고, 수저 소독도 하고, 각종 양념도 첨가해 먹어본다.
가격도 싸고 맛도 좋다. 이건 뭐 비단 위의 꽃이 아니라 황금 위의 다이아몬드인 거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교정으로 나와서 좀 걷다보니 외국인이라고는 우리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만 젊은 패기로 넘쳐나는 학생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도 우리를 보며 웃기도 하고 저들끼리 뭔가를 속닥거리기도 한다.
언어란 건 참으로 신기해서 못 알아듣는 것이 마냥 괴로울 것 같아도,
때때로는 알아듣는 이유로 나와의 상관 여부를 떠나 들리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시끄러운 불쾌한 소리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전혀 못 알아듣는 이유로 여대생들의 왁자지껄한 수다도
그저 따오따량따떵이 주를 이루다 쿰떵쩌락펏깽쎈 등이 섞여 나오는 랩처럼 들리며
그 자체가 활기가 되어 전해져 오기도 한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서로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깔깔 웃어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다.
나도 한 때는 전국을 강타했던 또래의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와 첫사랑을 꿈꾸는 소녀였고,
내가 고민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사회적 문제로 열변을 토하는 패기 넘치는 청년이기도 했는데
어느새 양희은이나 이문세가 부르는 사랑 노래에 눈가가 젖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정의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그런 어중간한 어른이 되어버린 탓이리라.
나도 아직은 온 길보다 갈 길이 훨씬 긴 팔팔한 젊은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도 마음도 잔뜩 옹송그린 채
저 눈부시도록 찬란한 시절을 허송세월한 게 두고두고 후회로 남은 한 사람으로서
난 진심으로 저들이 언제나 딱 저만큼만 행복할 수 있길 기도하며,
넘어지고 깨지고 부서지는 것 따위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향해 쾌속질주 하는 청춘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넘쳐흐르는 젊음이 마음도 몸도 지친 나의 이번 여행의 원동력이 되길 희망하며
발길을 돌린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탐마쌋 대학교를 나와
어느새 중천으로 떠올라 온 힘을 다해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돌아다니다 선착장을 발견하고
짧으나마 선상버스도 타볼 겸 왓아룬에 가기로 한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흐르는 땀에 애써 바른 비싼 자외선 차단제가 줄줄 녹아내리는 게 아까워 죽겠다.
잠시 후 배가 도착하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배에 오르기에
우리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홀랑 따라 탄다.
외국인 반, 현지인 반으로 복작대는 배 난간에 기대서
후끈하게 달아오른 붉은 뺨으로 시원하게 닿아오는 바람과
유유자적하게 흙탕물을 넘실대는 차오프라야 강과 강변으로 밀집한 주택들에서 느껴지는
이국의 정취를 한껏 만끽하며 우리는 새벽의 신이 계신 왓아룬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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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보잘 것도 없는 것이 생각보다 길어져 두 개로 나눠 올립니다.
2-2편은 아직 마무리가 안 된 상태라 아마 내일 쯤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읽어주셔서 정말.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