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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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13

필리핀 4 828
12월 31일 맑음
눈을 뜨니 새벽 3시 30분이다. 인도네시아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서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브라스따기의 새벽 공기는 여전히 엄청 춥다. 담요 속에 몸을 웅크린 채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2003년의 마지막 날에 인도네시아 산골 마을에서 홀로 낡은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번 인도네시아 여행은 출발부터 꽈배기의 연속이었다. 가장 가고 싶었던 부낏 라왕은 홍수로 폐쇄되어버렸고, 발리 테러의 여파로 엉망이 된 여행 인프라는 여행 기간 내내 나를 피곤하게 했다.
첫 날부터 계속된 설사는 가장 큰 복병이었다. 대체로 나는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편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도착 첫 날부터 뱃속이 좋지 않더니 떠나는 날까지 설사가 이어졌다. 아마 이곳 물이 나와 안 맞는 모양이다. 때문에 샌드위치나 계란 요리 외의 제대로 된 음식다운 음식을 거의 못 먹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순간, 아마 나는 다시 인도네시아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고생이 많았던 곳일수록 기억의 창고에 눌러 붙은 이끼처럼 오래토록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향수를 자극하는 법이니까.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다. 숙소의 문은 잠겨 있다. 할 수 없이 담을 넘는다. 시외버스정류소로 가니 첫 차가 부릉부릉 시동을 건 채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벌써 반 이상 자리가 찼다. 전부 현지인이다. 다들 머리끝까지 두툼한 옷을 뒤집어 쓴 채 눈만 빼꼼 내밀고 있다.
정확히 1시간 30분 만에 버스는 메단에 도착했다. 요금은 5,000루피아. 시외버스에서 내려 베모(1,000루피아)를 타고 마지드 라야로 간다. 그 근처에 페낭 행 페리 사무실이 있다. 제발 오늘 페낭으로 가는 페리 좌석이 남아 있어야 할텐데. 한번 떠나기로 마음먹고 나니 한시라도 빨리 인도네시아를 벗어나고 싶다.
다행히 좌석이 있다. 알고 보니 대목이라고 평소에 1대만 운행하던 페리를 오늘은 2대나 운행한단다. 항만세 26,000루피아를 치르고 항구까지 가는 셔틀버스에 오른다. 잘 있거라 메단이여, 다시 보자 마지드 라야여.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한국인이나 일본인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중국인 같다. 국적을 물어보니 태국이란다! 여행 다니면서 태국 사람 만나기는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라오스 루앙 프라방에서였다.
방콕 까쌤산에서 친구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휴가를 맞아 여행을 하는 중이란다. 인도네시아 어디를 여행했느냐고 하니 메단에만 5일 있었단다. 이 최악의 도시에 어떻게 그리 오래 있었냐고 하니까, 제이라는 이름의 이 아가씨는 메단이 좋단다. 친절한 인도네시아 청년을 만나서 그의 오토바이로 메단 구석구석을 구경했단다.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제이에게 그 청년의 소개로 환전을 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환율은 얼마에 했냐고 하니까, 1달러에 7,100루피아에 했단다. 역시, 그 청년의 친절은 다른 데에 목적이 있었군. 순진한 이 아가씨는 그것도 모르고 청년의 친절에 눈이 멀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진실을 말해주려고 하다가 참기로 한다. 그래, 이제 와서 사기당한 사실을 알아봤자 속만 쓰리지 무슨 소용이랴. 돈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진실을 모르는 채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 
항구에 도착해서 탑승수속을 하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린다. 알고 보니 새치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돈 좀 있어 보이는 현지인들이 여권과 함께 현찰 몇 푼을 경비원에게 집어주면, 그 경비원은 출국수속대에 가서 돈 준 사람의 여권에 출국스탬프를 대신 받아다준다. 정상적으로 줄을 서서 수속을 받는 사람보다 그렇게 불법으로 수속을 받는 사람의 숫자가 세 배는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줄이 안 줄지. 
공무원까지 동원되어 공공연하게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걸 보니 인도네시아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거의 모든 정치인이 불법자금을 받아 처먹고, 심심찮게 뇌물 받아 구속된 공무원의 명단이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이 아닌가.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금액만 엄청나게 차이 날뿐, 부패했다는 자체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생각이 있는 인도네시아 인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대해 외국인이 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척 창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못지않은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자 나도 갑자기 무지무지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한 척의 페리는 만원인데 다른 한 척의 페리는 반 가까이 자리가 비었다. 다행히 승객이 적은 페리에 배정이 되었다. 메단으로 올 때는 4시간 정도 걸렸는데, 페낭으로 갈 때는 5시간이 넘게 걸린다. 조수의 차이로 인해 메단에서 페낭으로 가는 게 힘이 더 많이 드는 모양이었다.
페낭에 도착하니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얼른 입국수속을 마치고 출리아 거리로 가서 75트래블러스 롯지에 여장을 푼다. 이번에도 싱글 룸은 만원이고 더블 룸밖에 없다.
대충 샤워를 하고 거리로 나와 저녁을 먹을 식당을 물색해본다. 잠시 생각 끝에 킴벌리 거리에 있는 킴벌리 커피샵으로 갔다. 말레이시아에서 ‘커피샵’은 음료도 팔고 음식도 파는 장소를 말한다.
킴벌리 커피샵은 푸드 코트 같은 곳으로 각기 다른 음식을 파는 매대가 여럿 있다. 주로 중국 음식이 많다. 그중 입구 왼쪽에 있는 매대에서는 한국의 짜장면과 아주 흡사한 국수를 파는데 정말 맛있다. 요리 비법을 배워서 한국에서 식당을 개업하면 돈을 엄청 벌 수 있을 것 같다.
짜장면(?) 한 그릇에 꿰이띠오(물국수)도 한 그릇 했다. 역시 말레이시아, 그중에서도 페낭의 국수는 일품이다. 가격 대비 음식 맛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다.
하루 종일 버스와 페리에서 시달린 데다 배까지 부르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숙소로 돌아와 정신없이 침대 위에 엎어지는데, 밖에서 ‘펑’ ‘펑’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잠에 빠져들었다.(다음날 아침에 영자신문을 보니, 신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 축제가 내가 묵었던 숙소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벌어졌던 모양이다.)
내 생애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03년의 마지막 날이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4 Comments
고구마 2004.02.20 12:30  
  조그만 포켓사이즈 지도책을 펴놓고 또바 호수와 메단을 찾아보며 글을 읽다보니, 마치 내가 그길을 따라 걷고 있는거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필리핀 2004.02.20 15:01  
  고구마님도 꼭 한번 가보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단, 사기꾼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후순이 2004.02.23 00:07  
  오랜만에 글 올리셨네요...
다음편도 얼릉 올려주세요...
할리 2012.05.24 01:21  
저도 꼭 다녀 오신 여정으로 다녀 올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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