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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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12

필리핀 2 852
12월 30일 맑음
브라스따기에 오지 않았다면 인도네시아 여행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여행 초장부터 부낏 라왕이 홍수로 폐쇄되어 일정이 바뀌면서 계획이 뒤죽박죽되었다. 첫날부터 시작된 배탈은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날까지 나를 괴롭혔다. 메단에서 또바 호수로 가는 미니버스는 최악이었고, 뚝뚝에서 홀로 보낸 밤은 춥고 쓸쓸했다.
그러나 브라스따기는 지금까지의 고생을 말끔히 잊게 해주었다. 서늘한 날씨를 간직한 평화로운 산간마을, 그리고 구능 시바약(Gunung Sibayak). 해발 2,172미터의 구능 시바약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등반하기 쉬운 화산이다. 시내에서 출발하여 3시간 정도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이드북에 적혀 있다.
아침으로 스파게티를 먹고 도시락으로 토마토 샌드위치를 챙긴 뒤 9시에 숙소를 출발했다. 도중에 위스마 시바약의 자매 게스트하우스인 로스멘 시바약 게스트하우스에 들렸다. 내일 메단에서 페낭으로 가는 배의 좌석을 예약하기 위해서다. 로스멘 시바약에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여행안내 데스크가 있다.
그런데 전화 한 통 걸어서 좌석 예약하는데 무려 40,000루피아나 달란다. 4일치 방값이다. 너무 비싸서 망설이자 30,000루피아까지 해준단다. 그래도 비싸다. 하지만 내일은 2003년의 마지막 날이라 예약을 안 하면 좌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꼼짝없이 메단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그러나 지금 전화해도 좌석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30,000루피아 아끼고 운명에 맡겨 보기로 한다.
페리 좌석 문제로 머리가 뒤숭숭한 채 정신없이 걷는데 어째 길이 이상하다. 지도를 보니 한참을 잘못 들어왔다. 다시 30여분을 되돌아나가 길을 찾는다. 1시간을 손해 봤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얼마냐고 물으니까 어른은 2,000루피아라고 하고 그 옆에 있던 꼬마는 1,200루피아라고 한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지? 입장권을 보여 달라고 하니 1,200루피아라고 적혀 있다. 참나, 애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나.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아이구, 힘들어! 가파른 오르막길이 한참 계속된다. 아직 애티를 못 벗은 아이들이 등산로 포장 공사를 하고 있다. 그중 한 애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을 좀 달라고 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거절한다. 나도 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어 허비한 1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 열심히 걸었더니 2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 주변은 구름에 잔뜩 싸여 있다. 바닥 여기저기에 뚫린 구멍에서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유황 냄새도 진하게 풍겨 와서 화산에 올랐다는 실감이 난다.
바람이 불어와 정상을 감사고 있던 구름이 걷히자 주변 경치가 드러났다. 산 아래 아득한 곳에 푸른 산과 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그 사이사이로 손톱만한 집들이 보인다. 가슴이 탁 트이는 멋진 광경이다. 
이내 다시 구름이 몰려 왔다. 그리곤 오랫동안 산 아래 경치를 보여 주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싸준 네모난 종이 도시락 안에는 샌드위치, 삶은 계란, 오렌지, 바나나가 각각 1개씩 들어있다.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그 어떤 도시락보다도 맛있는 도시락이다. 
정상은 생각보다 춥지 않다. 긴팔 남방과 점퍼까지 준비했는데, 반팔 옷으로도 충분하다. 신발은 등산화는 아니더라도 가벼운 운동화가 편하다. 물은 가능하면 충분히 준비하는 게 좋다. 맑은 날에는 햇볕이 상당히 따가우므로 물을 많이 마시게 된다.
도시락을 먹고 이제 하산 길로 접어든다. 하산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 있어서 무척 미끄럽다. 앞서 가던 서양 남자 하나는 미끄러져서 한쪽 다리를 심하게 긁혔다. 나도 몇 차례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다.
올라온 곳과 반대편으로 내려오는데 1시간이 채 안 걸렸다.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하니 브라스따기 행 미니버스 운전사가 동네 꼬마와 배구를 하고 있다. 승객이 하나둘 몰려들어도 여전히 운전사는 배구를 하고 있다. 버스가 승객으로 다 차고 난 뒤에야 운전사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브라스따기 까지는 20여분이 걸리고 요금은 2,000루피아다.
숙소로 돌아오니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뒤라서 그런지 몸이 오슬오슬하다. 얼른 샤워를 하고 옷을 여러 벌 껴입는다. 거실에 앉아 방명록을 뒤적이니 간간이 한글로 적힌 글이 눈에 띈다. 나도 간단하게 몇 마디 적는다.
메단 행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니 첫차가 5시에 있단다. 4시에는 일어나야겠군. 맥주를 한 병 마실까 하다가 참기로 한다. 옷을 있는대로 다 꺼내 입고 일찌감치 잠을 청한다. 부디 내일 메단에 머물지 않고 페낭으로 바로 갈 수 있기를 빌었다.

2 Comments
후순이 2004.02.18 02:31  
  아,,, 옛날이여... 빨랑 올려주세요...
할리 2012.05.24 01:02  
페낭으로 바로 가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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