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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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3

필리핀 3 961
12월 21일 흐림
오전 8시, 기차가 핫야이 역에 도착했다. 역을 빠져 나오자 몇 명의 호객꾼들이 달려든다. 사전정보에 의하면 팍바라에서 오전 11시에 꼬 리페 행 보트가 출발한다. 꼬 리페 행 보트는 하루 1대 뿐이다. 그 보트를 놓치면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핫야이에서 팍바라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팍바라 행 미니버스 정류장을 직접 찾아 나설까 하다가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 포기하고 여행사를 이용하기로 한다.
삐끼들 중 한 명을 따라 역 앞 여행사로 간다. 미니버스+보트를 포함한 꼬 리페까지의 조인트 티켓이 600밧이란다. 흥정을 하니 500밧까지 내려간다. 너무 쉽게 깎아주는 게 의심스럽다. 그런데 미니버스 출발시간이 8시 30분이란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가지를 좀 쓰더라도 초행길에 대한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표를 샀다.
여행사가 마련해준 썽태우(미니 트럭을 개조한 탈 것)가 골목을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역에서 1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내려준다. 그곳이 팍바라 행 미니버스 정류장이다. 왠지 사기 당한 기분이다. 버스에는 현지인과 여행자가 반반씩 타고 있다. 내가 타자마자 12인승 미니버스는 출발이다.
팍바라로 가는 도로는 잘 닦여 있다. 2시간여를 달린 끝에 팍바라 항구에 도착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여기까지의 미니버스 요금이 70밧인 것 같다. 팍바라에서 꼬 리페까지의 배삯은 정가 450밧인데 400밧까지 해주었다. 미니버스 요금을 포함하면 470밧이니 내가 크게 바가지를 쓴 것은 아니었다. 
배는 전형적인 통통배. 20여 명의 승객은 여행자와 현지인이 반반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와 신년 전후가 태국 여행의 최대 성수기이다. 이 무렵이면 웬만한 관광지는 여행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 꼬 리페로 향하는 승객이 이 정도면 필시 그곳은 조용한 섬일 것이다.
나는 꼬 리페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원시의 자연을 간직한 섬, 인적이 드문 해변, 고독처럼 빛나는 별, 그런 것들을 보물처럼 간직한 곳.
1시간 반 정도를 항해하여 배는 꼬 따루따오에 도착했다. 꼬 따루따오는 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섬으로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서바이벌’을 촬영한 곳이란다. 국립공원 직원만이 섬에 상주하고 있단다. 태국인 일가족과 서양 여행자 몇이 내렸다.
다시 2시간 반을 더 항해하여 배는 꼬 리페에 도착했다. 통통배는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 있고 긴 꼬리배가 승객들을 섬으로 실어 날랐다. 해변이 두 군데였는데, 순간적인 판단으로 핫 파타야를(핫=해변) 택했다. 결론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긴 꼬리배가 섬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퍼렇던 바다 색깔이 점점 하얘졌다. 해변 근처에 다다르자 커다란 유리를 깔아놓은 것처럼 바닷속이 훤히 비쳤다. 태국의 여느 해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이 시리도록 맑은 그런 바다였다.
약 1킬로미터쯤 되어 보이는 해변에는 제법 고운 모래가 깔려 있었다. 바다가 서쪽을 향해 있어서 노을이 기대되었다.
핫 파타야의 숙소들은 전부 ‘리조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수준은 게스트하우스 수준이었다. 모든 숙소들은 방갈로 형태였었다. 시멘트로 지은 에어컨 룸은 1박에 1,000~1,500밧 정도이고, 나무로 지은 선풍기 룸은 300~350밧이었다.
나는 해변 중간쯤에 위치한 리페 리조트의 350밧짜리 방갈로에 여장을 풀었다. 300밧짜리도 있었지만 약간 낡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꼬 피피나 꼬 따오에 비하면 궁전인 셈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5시였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석양을 감상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하루의 피로를 앗아가기 위해 불어왔다. 남쪽 끝으로 걸어가자 해변에 식탁을 내어놓은 레스토랑이 있다. 그곳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맥주를 1병 시켰다. 노을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을이 펼쳐지는 바다를 향해 의자에 빨래처럼 늘어져서 맥주를 홀짝이는 기분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신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해풍은 끊임없이 살갗을 어루만지고, 성난 야생마처럼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파도는 이제 발밑에서 한낱 거품이 되어 부서지고 있다.
그렇게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는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답을 구할 수 없는 화두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 화두에 집착하다보니 어느새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만이 선명해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 파도는 다시 바다로 돌아갈 것이고 저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느리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알처럼 많은 시간이 흘러 육신의 생명이 다해 스러지고 난 뒤, 저 하늘의 무수한 별 중의 하나가 되어 다시 떠오르는 것이리.
어느새 해는 지고 사방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머리 위에서는 별들이 왕관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어둠의 왕이 되어 수많은 별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해변을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왠지 오늘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숙소 근처에 있는 바로 갔다. 서너 명의 취객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둘은 스위스에서 온 커플이고 둘은 독일에서 온 커플이다. 그러고 보니 나만 솔로네.
그런데 바텐더가 참 재미있는 친구이다. 자신을 ‘지’라고 소개한 바텐더는 손님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화가였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밝히자 방콕 카오산의 한국업소 동대문과 DDM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다고 했다.(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는 예술가로써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는 태국인치고는 영어도 곧잘 하는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하게 정이 가고 밉지가 않았다. 유쾌한 사람들과 어울려 유쾌한 시간이 유쾌하게 흐르고 있었다.

3 Comments
영어강사 2008.09.02 22:50  
  아름다운 곳을 아름답게 묘사를 해주시네요. 한편의 시가 펼쳐지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할리 2012.05.23 09:37  
정말 멋진 표현들 한편의 시와 같다는 딱 맞는 표현인것 같습니다.
할리 2012.05.23 12:03  
여기 바이름은 어떻게 되는지요???  지가 있다는 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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