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다 THAI - 그리고 그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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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로드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서양에서는 반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은 효율성과 경쟁을 내세우는 숨막힐 듯한 산업사회에 반항하며, 배낭을 둘러메고 인도나 동남아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여행 행태는 예전과 달랐다. 사회로 복귀할 의무가 없었던 그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은 채 장기간 자유롭게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의 근거지를 흔히 ‘3K’라 불렀는데, 인도네시아 발리의 쿠타 비치, 네팔의 카트만두,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이었다.
이곳들에는 엄청나게 싼 숙소들이 들어섰고, 히피들은 마리화나를 피워대며 장기 체류를 했다.
그러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정치적으로 격변기를 맞으며 새로운 ‘K’로 부상한 곳이 바로 태국 방콕의 카오산 로드다.
[세계일보,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 中]
거기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한 ‘on the road-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과,
책을 읽고 찾아본 다큐멘터리는 이 환상에 무게를 얹어줬다.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니!
마사지도 그리웠지만 ‘카오산’이 있는 곳이기에 별 생각 없이 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고,
막상 와보니 이제껏 그려왔던 상상 속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그저 오길 잘 했다며 스스로를 토닥토닥 해 줄 수 있었다.
환상을 충족시켰건 아니건, 특별한 감흥을 느꼈건 실망을 했건
변하는 건 항상 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마음상태로 여행을 하는지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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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고 경험했다는 것 보다는, 떠나왔다는 사실에 더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돌아온 후
투어를 함께했던 자매 & 페리에서 만난 젊은 미국인 교수와 싸이월드로 안부를 묻고,
연락이 닿지 않아 애통했던 여에게는 국제전화를 한 통 했고,
켄의 기억은 다행히도 담담히 적어 내려갈 수 있게 되었고,
(하지만 아직 조금은 미련이 남고)
꼬 창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메일을 몇 개 주고받았고,
꽃다발 들고 졸업식에 다녀왔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여행을 하면 사람이 제일 많이 남고,
다음번을 또 기약하기 위해선 지금 내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매번 똑같은 것을 느끼고 다짐하고 돌아오지만,
‘가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던 이번 여행은
조금 다르게 남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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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여행은 3단계로 완성된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여행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사진과 일기를 정리하면서.
앞의 두 과정은 어떻게 해치웠는지 모르겠지만
연재를 빌미로 꾸역꾸역 쏟아낸 덕분에 언제 잊힐지 모를 기억의 자락들을 조금은 잡아두게 된 것 같아 감사하다.
다음 여행은 언제,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 이미 설렌다.
뭔가 대단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숨 쉬고 있는 자체만으로 좋은,
그게 여행이 나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아닐까.
얼마든지 유혹 당해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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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숙제를 마치는 기분으로 여행기를 끝냅니다.
몇 편 되지도 않는데 벌써 3월이 넘어가니 부담스럽더라고요..
태사랑에서 너무 많은 도움을 받고 가서 졸필이나마 시작한 여행기..
[글]이라는 것의 특성상 표현이 생생하게 전달되지 못한 부분도, 제 마음대로 생략해버린 부분도 많지만
잘 보고 있다, 재미있다는 응원 댓글 달아주신 회원님들 덕분에 게을러터진 손가락을 그나마 부지런히(?) 놀릴 수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두꺼운 전공서적들과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한두 달 쉬었다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이제 다른 분들 여행기 읽으면서 머리 식히고 가겠네요
Bon voy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