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 새벽사원이 드리워 준 그늘, 그 아래
새벽사원이 드리워 준 그늘, 그 아래
눈이 부시다..
눈을 감은 채,
얇은 커튼의 촘촘한 올 사이로 흩뿌려져 들어오는
햇볕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이젠 눈을 뜨지 않아도,
몸에 익지 않은 이 푹신한 매트리스의 촉감 만으로도
낯선 어딘가에 내 자신이 내동댕이 쳐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까끌한 입속을 축이려 머리맡의 물통를 찾아 한모금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문다...
입에서 나오자마자 팬의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연기...
'지겨워, 이젠 어디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
'벌써? 그래도 쏭크란 축제는 기다려야지?'
'그냥 깐차나부리에라도 다녀올 껄.......'
'참아, 곧 지겹게 돌아다녀야 할 텐데.......'
하염없이 무료한 이틀을 또 보내야 한다.....
샤워를 하고 숙소를 나선다.
람푸뜨리가 좋은 건,
코 앞에 노천 리어카들이 줄지어 있어
국수건 덮밥이건 볶음밥이건 혼자 손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
역시나 아침해장으로는 꾸웨이띠여우 탈레(25밧)...
길거리표라 조미료 맛이 좀 더 강하긴 하지만
한 달에 몇 십 개씩 먹어치우는 라면의 스프맛에 길들여진 내게
이정도의 조미료 맛은 애교스럽다...
더운 날씨에 포만감이 싫어 면과 건더기만 대충 건져 먹고
냉커피(20밧) 하나를 주문해 시간을 떼운다...
담 너머 왓차나송크람에서 뻗은 나뭇가지의 그늘 아래
들려오는 새소리에 한가한 람푸뜨리의 오전...
아마도 밤새 바와 클럽을 배회했을 이방인들이
시뻘건 토끼 눈들을 하고 와서
주문한 음식을 받아 빈자리를 찾아 쭈그리고 앉아
어설프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스킨헤드 족..
군데군데 피어싱을 한 서양 아가씨..
곱슬머리를 길게 길러 레게머리 처럼 꼬아서 세운 흑인..
60억 인구중에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떠나온 이들이 스쳐가는 동네니 만큼
별난 개성을 지닌 인간 전시장이 따로 없다...
그런데...
저들처럼 표현하고,
저들처럼 살기에는...
나는 용기가 없다.....
'뭐가 두려워?'
바람이 묻는다
'눈...'
'눈?'
눈, 이라고 표현할 밖에...
하릴없이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때,
비좁은 람푸뜨리 거리를 비집고 들어와 지나가는
재규어 구형 모델...
'그래.....!!'
작년에 시암 파라곤에서 매장 밖에 전시된 험머 H3 와 재규어 XJ를 만져보며 전율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번에는 어떤 차가 전시되어 있을래나?'
남은 커피를 쪽쪽 소리나게 빨아마시며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될 슈퍼카들을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된다....
숙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버스를 타기위해 파아팃 거리로 길을 나선다..
파아팃 선착장 옆 새로운 숙소가 오픈하는가 보다.
트럭에 잔뜩 싣고 온 새 매트리스가 호텔 안으로 부산하게 옮겨지고 있다..
매트리스의 품질로 보아 게스트하우스 급은 아닌 것 같은데....
(여행 끝날 무렵 오픈한 이 숙소는 역시 중급호텔......)
깔끔하게 보이는 것이, 도로쪽 방들은 시끄럽게 보이는 반면
리버뷰는 묵을 만 하겠다...
15번 버스가 도착하자 냉큼 오른다
'헉......'
마치 우리나라 80년대를 연상케 하는 버스 내부....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여자 승무원이 다가온다.
버스비(7밧)를 내고 우표만한 버스표를 받아들었다.
에어컨이 없어 좀 더운게 흠이지만
창문 없이 뻥 뚫린 창밖 풍경이 시원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이 무더운 날씨에...
긴 팔 옷에 긴 바지..
온 몸을 꽁꽁 싼 듯한 차림으로 꽃을 심으며 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작년, 파타야에서도 하수도 공사 하느라 땅을 파고 내려가 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비슷한 차림에 복면까지 썼더랬다..
보고 있는 내가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장시간 이 햇볕에 노출되면 위험한 건 알겠지만, 어떻게....'
'일사병으로 죽는 것 보다는 났잖아....'
혹자는 동남아 사람들이 게을러서 가난하게 산다는 얘길 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게을러 질 수 밖에 없다, 는 생각이 든다.....
고층빌딩들이 늘어선 거리를 달려온 버스...
나를 시암역에 떨어뜨려 주고 바삐 떠난다.
건물에 들어 가기 전,
버스를 타고 오느라 참았던 담배 생각에
담배를 한 대 피우려 둘러보니
금연 표시가 보인다..
전에 한 쪽 구석에 있던 야외 흡연 장소의 쓰레기통 마저
모두 치워버렸다..
원가가 싼 담배에 온갖 세금은 다 매겨 비싸게 팔면서
흡연자들을 왜 이렇게 내모는 건지.....
시암파라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어오는 에어컨의 냉기로
온 몸의 땀이 식는다..
아무래도 배낭 방수커버가 필요할 것 같아
여행가방 매장으로 가서 방수커버를 찾으니, 없다.
몇 군데를 돌다 한 곳에서 배낭 전용커버가 아닌
포장재 같은 하얀 자루 같은 걸 하나 내민다..
아쉬운 마음에 저거라도 하나 가지고 가야지...
"얼마?"
"공짜야, 그냥 가져가..." 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500밧"
"헉, 장난해? 이 자루 하나에? 배낭전용 방수커버, 한국에서 사도 돈 만원이면 사."
"그럼 300밧"
값을 깎는 것이 오히려 못미더워 뒤돌아 선다.
아마도 슈트케이스 사면 공짜로 씌워 주는 걸
종업원이 내게 눈탱이 치려 한 느낌....
'그깟 자루 하나 가지고 정도껏 눈탱이 쳐야지..
점심값으로 한 50밧만 불렀어도 사줬을 텐데...'
왠지 마음이 씁쓸하다..
물론 그게 정말 돈받고 파는 물건인지는 몰라도
그 값을 할 만한 건 분명 아닌 것 같다.
수도 없이 많이 마주치며 상대를 하는 외국인들이,
이들에게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물론 이들의 근시안적인 장삿속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청바지 매장을 대충 둘러보고...
드디어 눈에 들어오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이 넘, 시동을 걸고 심장 소리를 한 번 들어봤으면...
Porsche 911 GT3RS (996)...
경주용 심장을 얹은 M5.. 그나마 대중적(?)인 차..
황홀함의 절정,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앞 모습이 얼핏 애스턴마틴의 뱅퀴시를 떠오르게 했던 넘..
아쉽게, 이번에 복도에 전시된 차량은 없다..
직접 만져보고 타 볼 수 있는 희귀차량을 기대했건만...
하지만 잠시동안 눈이라도 행복했던 것에 만족하며 뒤돌아 선다.
지하 푸드코트에서 물 한 병을 사서 1층 로비에 앉는다.
고급 백화점이지만 의외로 외국인은 드물다.
주로 피부가 하얀 중국계 사람들...
웃음에서 나오는 여유들...
하긴 여기서 인상을 쓰고 다닐 이유가 없다...
여기는 시암파라곤... 이니까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만 바라보며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보낸다.
'자, 이제 돌아가자고...'
바람이 재촉한다.
일찍 들어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는 걸..
마지못해 일어나 시암 BTS 역으로 향한다.
사파탁신행 표를 끊고 (30밧)
지상철을 기다린다...
태국 물가에 비해 싸지 않은 탓인지
이 무더위에 이용객들은 의외로 적다..
오히려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눈에 띈다...
촌스럽게 이런 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기는 민망해
몰래 한 장 찍었다..
사파탁신역을 나와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작은 공원이 보인다..
화장실 팻말이 보이자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진다.
'여기서 일을 보면 되겠네..'
화장실 입구에는 아니나다를까 돈을 받고 있다. (5밧)
'이 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소변 몇 번 참으면 한 끼 식사가 해결되겠구나..'
아까운 5밧을 날리고 나오는 길...
누군가 비둘기들을 위해 밥을 가져다 주고 물을 떠놓았다..
저 관용과 베픔으로 인해
언젠가 비둘기들은 날개를 잃을 지 모른다...
하긴,
새들은 살기 위해 나는 거지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날개짓은 아닐 것이다..
편안한 삶이 보장 된다면
날개는 거추장스러워 지는 것 아니겠는가...
날개짓은 힘들다...........
선착장에서 파아팃행 보트를 물어보니
투어보트를 가리킨다..
"아니, 투어보트 말고 일반 르아두언.."
"투어보트 어쩌구....."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속는 셈 치고 올랐다.
'20밧? 싸네?'
어제 파아팃에서 타창까지 일반 르아두언 15밧이었는데..
바가지를 썼었나...
배도 훨씬 넓고, 자리는 많고, 물도 덜 튀고
게다가 가이드까지....
주요 선착장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니 차라리
투어보트가 더 실속적인 것 같다.
출발 하자마자 강변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들이 눈에 들어온다..
샹그릴라, 오리엔탈 방콕, 쉐라톤...
사랑하는 누군가와 오게 된다면 한 번쯤 묵어보게 되겠지?
그 아래로...
우리나라였으면 미관상의 이유로, 개발의 논리로
이미 철거 되었음이 마땅한 집들도 강 위에 나란히 도열해 있다.
'저런 집에 사는 사람들 역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글쎄...'
'마치 타워팰리스 옆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 처럼...'
'...............'
'.........................'
'.......................................'
넋을 잃고 왓아룬을 바라보다
오는 내내 바람과 나,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이제부터 지극히 상투적인 생각들은 접기로 한다.......
점심을 걸러 허기가 진다..
'아점을 국수로 떼웠으니 저녁은 역시 밥...'
위앙따이 호텔쪽 람푸뜨리 골목 노점상으로 간다.
각종 생선과 닭, 돼지고기를 구워파는 노점..
쏨땀과 돼지갈비 구이를 주문한다.. 그리고 카오니여우...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먹은 만찬에 대만족이다..
특히 숯불의 향을 머금은 돼지갈비 구이의 맛이 상상 이상이다..
단지 흠이라면..
찹쌀밥이 너무 찰져서 씹을때 턱관절이 아프고
너무 목이 메여 물과 함께 먹어야 했다..
마치 떡이랑 반찬을 먹는 느낌....
그런데..
이 외지고, 코딱지 만한 방 구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밥먹는 이 처량함...
'정말 적응 안되네... '
되도록 방에서 밥은 먹지 않기로 한다...
처량함을 달래기 위해
숙소앞으로 산책을 나온다....
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 속에 묻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앉았다....
오늘따라 배낭이나 캐리어를 끌고 방을 구하러 다니는 여행자들이 부쩍 눈에 띈다.
바야흐로 쏭크란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이방인들에겐 별 의미없는 물총싸움에 지나지 않을테지만...
갑자기 아는 지인의 전화를 받아 만나러 간다...
태국을 두 달째 여행하고 있는 사람이라 혼자 버틸 수 있는
노하우라도 전수 받으려 했건만..
일행이 달려있다.
그것도 모자라 앉아 잠시 얘기 나눌 틈도 없이
또 누군가의 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나간다...
덩그러니 남겨진 술잔..
덩그러니 남겨진 쓸쓸함..
그럼 그렇지...
혼자서 먹고, 자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터...
지금이라도 동행을 구해볼까....
그만두자,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다니며 받는 스트레스가
외로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테니....
바람만으로 족하다구....
'그렇지?'
대답없는 바람은,
밤새
마음에 담아온 왓아룬을 맴돌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