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 카오산, 그 숲에서 길을 잃다
카오산, 그 숲에서 길을 잃다
잠결에 눈을 감은 채 몸부림을 치다 문득 느끼는 어색한 기운들....
'뭐지? 뭔가 이상해....'
낯선 베개와 이불의 감촉들...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
억지로 눈을 부시시하게 떠 눈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낮은 천장엔 팬이 어지럽게 돌고 있고
좁디 좁은 방안에 낯선 가구들이 병정처럼 둘러서서 지켜 보고 있다.
잠깐동안의 혼란....
'아, 여긴 방콕이지.....'
도착한 지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첫날 밤이었다.
몸이나 머릿속은 아직 여행자임을 인식 못하고 있구나...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하얀 연기를 공중에 천천히 내뿜으며
혼자 내던져진 절박한 상황을 주지시킨다.
'이곳으로 혼자 내친 건 너 스스로 라구...'
'알아, 근데 이거 왠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한데...'
'오늘 뭐 할건데?'
'몰라, 천천히 생각하자고. 그냥 맘 가는데로...'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낯선 잠자리라 숙면을 취하지 못해 온 몸이 뻐근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숙소를 나선다.
길거리로 나서자
후끈한 열기...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 온 몸을 훑는다.
길거리의 노점상 테이블과
노천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 1층 식당에는
뒤늦은 아침을 해결한 여행자들이 얽혀
커피나 쥬스를 마시며 열심히 수다들을 떨고 있다.
에라완하우스 쪽 골목을 지나
파아팃거리로 나선다.
부산하게 스쳐지나 가는 알록달록한 택시 사이로
곡예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툭툭이들을 보며
태국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술 마신 다음 날이라 밥이 부담스러워 나이쏘이를 찾았다.
아침으론 늦었고 점심으로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별로 붐비지 않는다.
양이 많지 않은 나의 식성에도
곱배기 마저... 정말 양이 적다..
부드러운 면발과 국물로 속을 달랜 후
다시 천천히 산책을 나선다.
겨우 사람하나 다닐만큼 좁은 골목에도
작은 리어카가 자리를 잡고 각종 반찬을 진열한 채
밥을 팔고 있다.
무지했던 기억..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지저분해 보이는 저런 곳에서, 저런 음식을 먹으면 병걸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매일 뷔페나 불고기, 갈비만 먹고
분식집 된장찌게, 김치찌게는 외면한 꼴이었으니
이 얼마나 불쌍한 여행이었나...
하긴 지금도 태국여행을 나선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걱정부터 한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태국이라 하면,
강에는 악어떼가 돌아다니고
밀림 울창한 숲속에 말라리아 모기떼가 번성을 하고
바나나 잎으로 몸을 가린 원주민들이 칼을 들고 돌아다니며 위협하는
아마존 오지쯤으로 생각하는 지도....
파쑤멘요새 앞 공원으로 들어가
차오프라야 강을 바라본다...
이 지저분한 흙탕물아,
오랜만이다.....
탁 트인 전망에 부풀은 바람이
한껏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켠다.
날씨는 쾌청하고 적당히 부는 강바람....
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태사랑에서 눈에 익은 간판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며
정신없이 걷는 중에
눈에 띄는 노점 먹거리...
이 또한 태사랑 먹는 이야기에서 한 번 봤던 것 같은데..
빙수도 아닌 것이 국수도 아니고..
색깔만 초록색일 뿐 우리나라 올챙이 국수 모양을 한 면발이 담긴
이 먹거리의 맛이 자극하는 호기심...
이걸 옆에서 먹고 있던 한 아저씨가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Good!"을 연발한다.
원래 술과 밥 이외에 군것질 하는 것은 정말 싫어하지만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나 사서 맛을 본다. (10밧)
'럿짱'이라고 했던가....
연유를 넣어 시원달콤하고 밤고구마 같은 것이 씹히는 게
후식으로 먹을 만 하다..
무표정하게 오가는 사람들..
무표정하게 장사하는 사람들..
나를 이방인으로 느끼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람푸뜨리로 돌아와 숙소로 들어간다.
아침 잠깐 산책을 했을 뿐인데 온통 땀으로 젖었다.
샤워를 하고 에어컨 바람으로 몸을 식힌 후..
왕궁을 가기 위해 나선다.
태국을 올때마다 들리는 왕궁..
빠뜨리고 가면 왠지 허전한,
내게는 방콕의 랜드마크로 각인된 곳이다.
파아팃 선착장에서 보트를 기다린다.
쉴새없이 오가는 보트들..
부지런히 관광객들과 주민들을 나르고 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하지만 접근성, 활용도를 따져보면
차라리 베네치아 보다는 암스테르담이,
암스테르담 보다는 방콕과 강을 낀 많은 태국의 소도시들이 오히려 물의 도시의 면모를 갖춘 듯하다.
다듬어 지지만 않았을 뿐 (다듬어 지지 않았기에 더 다가서기 쉽게 느껴지는 지도..)
서민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 함께 하기 때문에......
보트는 상쾌하게 차오프라야 강을 헤쳐나간다...
타창에 내리자 무척이나 번잡하다.
관광객과 상인과 호객꾼들....
비집고 나서자 눈에 들어오는 작은 시장...
시장을 나와 왓포쪽으로 먼저 길을 잡는다
도로에는 수많은 노점들이 펼쳐진다.
음식, 간식, 불법 CD, 각종 잡화....
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노점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배낭 여행객들이나 접해 볼 풍경이지
도로 옆으로 지나가는 버스의 수많은 패키지 관광객들에게는
버스 유리창으로 갈라놓은 저 너머 세상 일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온 삶이 패키지와 뭐가 달랐을까..
진작에 버스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내렸어야 했는데...
그래서 패키지 관광버스 유리창은 감옥의 벽보다 두껍다.....
무더위와 씨름하며 몇 백미터를 걸었을까..
왓포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너무 덥고 지친다..
물을 한 병 사서 정신없이 마시고..
이내 발길을 돌린다.
이대로 몇 시간을 더 다니면 쓰러질 것 같은 무더위...
덥다
덥다
덥다...........
중얼거리면 돌아오니 눈 앞에 펼쳐지는 낯익은 풍경.......
더위는 잠시 잊고 넋놓고 바라보다 사진기를 들이댄다.
이런 현란함에 쉽게 눈을 뺐기고 마는 나는
껍데기만 보고 살아온 단순한 인간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닌다.
어쩌면 내가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가
지극히 태국적인 췌취를 한껏 맡을 수 있는 장소중의
한 곳이라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문득 앙코르왓의 모형을 보다가 드는 의문 하나...
저런 어마어마한 유적을 지으려면
그당시 얼마나 많은 세금과 노역을 착취했을까..
아마도 그 왕은 백성들의 원성을 엄청나게 들었을텐데
지금은 그 유적으로 후손들이 먹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왕은 폭군일까 성군일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늘에서 쉬고 있을때
"너네들 믿고 온 내가 미친X이지..."
잔뜩 날이 선 한국 아가씨의 목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잔뜩 부은 얼굴로 한 아가씨가 휑하니 지나가고
뒤이어 구시렁거리며 따라가는 두 아가씨...
이해할 만하다..
여행이란 게, 특히 장기여행 일수록 개개인의 호불호가 드러나면서
트러블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무더운 땡볕에 짜증이 폭발하겠지...
'그래도 쟤들이 부러워..'
'왜?'
바람이 묻는다
'싸울 상대라도 있잖아........'
'ㅋㅋㅋㅋㅋ'
더위에 지쳐 일어선다.
좀 지치긴 했으나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훔쳐보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탐마삿 대학 쪽으로 가는 길의 노점 풍경들..
인도로 걷기가 힘들 정도로 빼곡한 노점들....
온갖 군것질꺼리가 넘쳐 나지만
나는 식탐이 별로 없다....
어릴때 엄마에게 과자 사달라고 조른 기억 한 번 없고,
소풍가면 김밥만 먹고 고스란히 되가져온 과자들은 모두
형의 입으로 들어갔었더랬다......
탐마삿 대학에 들어서자 동편 휴게소가 나온다..
노트북을 펼쳐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는 학생,
수다인지, 토론인지 열심히 얘기를 나누는 학생,
한국의 여느 대학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화만 나눌 수 있다면 저들 틈에 끼여 앉아
태국의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한 문제점과
문화에 대한 토론이라도 나누고 싶은데...
'정말 그런 얘기 하고 싶은 거니?'
'...... 아니,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물 좋은 나이트가 어디인지...'
다시 물 한 병을 사서 다 마셔버린다..
그리고 좀 걷자 서편 식당 휴게소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걸렀구나..
허기가 진다.
아침에 국수를 먹었으니 점심은 밥을 먹으려 주문한
카우만까이.....
대충 피남뿔라 소스를 흩뿌리고 가져와서 한 입 떠 먹는다..
밥이 맨밥이 아니라 마늘에 살짝 볶은 듯한 향이 나고 간이 되어있어
입맛에도 잘 맞는다..
아마도 여행중 먹은 카우만까이 중에 제일 나았던 것 같다.
가격도 무지 착한 20밧.......
배를 채우고 흡족해 하며 조금 걸으니 어느 새 파아팃 거리로 들어선다.
다시 돌아온 오후의 람푸뜨리는 한산하다
지금은 여행자들이 저마다의 사냥터로 떠났을 터...
아마도 밤이 되면 다시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오늘 노획한 것들에 대해 갑론을박 논쟁이 벌어지겠지....
땀에 쩔은 몸을 씻기 위해 숙소를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도시의 햇볕을 너무 무시했나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삶은 고구마처럼 벌겋게 익었다.
겨우 서너시간 돌아다녔을 뿐인데..
썬크림이라도 바르고 나갈 걸,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씻고 나와
숙소 바로 앞 맛사지 가게로 들어간다.
200밧 짜리 타이맛사지를 주문한다.
아주머니의 어슬픈 듯한 손놀림에도 나름 만족한다.
싼 가격에 뭐 그리 대단한 효과를 기대하겠는가.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지려 한다.
하지만 맛사지 받는 내내
맘 속 한구석은 편치 않다..
맛사지는 그냥 몸을 풀기위한 맛사지일 뿐인데
왠지 내가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
이상하게 맛사지사에게 알 수 없는 미안함을 느낀다.
아직 맛사지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아님 소심함의 극치일까.........
별로 한 일도 없이 빈둥거리다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한국에서 이 시간쯤이라면,
아마도 친구들과의 술약속 때문에 외출을 준비하고 있겠지?
사람이... 그리워 진다.......
어느듯, 의무적으로 또 한 끼를 해결할 시간이 왔다.
카레를 좋아하는 나는
언젠가 먹는이야기에서 본 카오목까이의 맛이 궁금해
로띠마타바로 향한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없어
카우목까이 하나 (55밧)를 '싸이 플라스틱' 해서 땡모반을 함께 사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생각만큼 카레맛은 덜 하지만 먹을 만 하다....
곤혹스런 밤.....
혼자 여행한 분들은 알 것이다..
밤이 얼마나 두려운지...
특히나 수면장애가 있어 새벽녘에나 잠이 드는 내게
기나긴 밤은 고문이다.......
자, 이제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여행자들의 숲으로 가볼까나..
어슬렁거리며 카오산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나서는 길에 흘낏 보니
동대문에 한국 여행객들이 모여 얘길 나누고 있다..
'저기 가서 넉살 좋게 한 번 끼여볼까?'
'아서라, 네 성격에...'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여자 여행객이라면 주위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접근한다.
하지만 남자라면 일단 남자끼리도 경계심을 가진다..
특히, 이해관계가 성립되어 이미 파트너 쉽이 형성된 그룹에
끼여들려고 하지 말자..
비참한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말지니.....
카오산로드 입구...
수많은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묻혀버린
첼로는 슬프다...
다소 장난스러운, 금기에 대한 조롱...
하지만
저걸 만들어 파는 그 사람은 이미 그 금기에 집착한다는 얘기이고
집착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포비아가 얼마나 크다는 걸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어릴때 변통에 빠졌나?
수많은 다국적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 여행자 숲의 밤을 즐기고 있다.....
궁금하다..
궁금하다..
대체 저 여행자들..
(주로 1년 이상의 장기여행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저들은 어떤 물음표와 느낌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긴 여행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너무 여행에 감성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건가?
단지 보고, 먹고, 마시고, 쉬는 여행은 단기로도 족하다..
기나긴 시간을 떠돌아 다니는 데
단지 '좋아서'라는 답은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난 당신들의 총이 너무 궁금하다.......
람푸뜨리 골목으로 돌아와 바에 들어 가
쌩솜과 해물샐러드를 시킨다..
'어쩔 수 없잖아.. 잠은 안오고 밤에 혼자 할 일은 없고..'
'수언룸 나이트 바자라도 갔다오지 그래?'
'됐어...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수쿰빗에나 갔다올까? 팟퐁이나 나나...'
'멀어서 귀찮아.... 그것도 혼자 뻘쭘하게....'
괜시리 바람에게 짜증만 부린다.
송크란때문에 머물기는 하지만 방콕에서 혼자 할 일이 너무 없다.
식탐도, 쇼핑도, 그렇다고 유흥문화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이곳에 묵었나..'
'왜?'
'뭐 배낭여행객의 메카라지만 특별한 것도 없잖아.....'
'이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가 좋아 일부러 이 곳에 모인 걸...'
'태국적인 정취가 너무 없잖아......'
그렇다..
이런 곳보다 좀 더 태국적인 뭔가가 아쉬울 뿐이다....
'훗, 오지 여행 다큐를 너무 본 것 아냐?
그럼 다른 동네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모닷불 피워놓고 태국 전통음악에
태국 전통 복장을 입고 나와
네 손을 잡고 같이 춤이라도 춰 줄줄 아나보지?
그냥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게 방콕이고 태국이라구.'
태국이 고유한 태국의 모습을 간직하고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일까.....
난 아직도 여행을 할 자세가 부족하다......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려하지 않고
내가 보고픈 걸 보여주기를 바라는 이 어처구니 없음....
그나마 밤새 불 꺼질 줄 모르는
이 국적불명의, 유흥가의 소란스러움이
나 같은 외로운 여행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는 걸 간과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쏟아지는 잡다한 상념들과 씨름하는 동안
어느새 람푸뜨리의 밤은
애써 쓴 내 오늘의 일기를 한 줄 한 줄 지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