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intro
비어있는 퍼즐 같은 어느 기억의 한조각을 맞추며..
그냥 모든 게 귀찮고 무의미 했다.
일 끝나면 맹숭맹숭하게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그날도 미친듯이 술을 마셨더랬다.
그리고는 뭔가에 씌인 사람처럼
만취된 나는 무의식적으로 차에 올라타고 핸들을 잡았다.
음주운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눈을 떠보니 터진 에어백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아마도, 다행히(?)
철제 중앙분리대를 들이 박은 것 같았다
차는 구겨질대로 구겨져 앞유리는 물론 유리란 유리는 모조리 박살이 났다.
멀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이마와 무릎에 타박상을 입은 것 말고는 그다지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배가 좀 아프고 몸이 으실으실하게 추웠을 뿐이다.
그런데도 강행하던 CT와 MRI촬영..
마침 그 병원에서 내과의로 당직을 서고 있던 친구넘이 외과과장을 새벽에 호출해서 상의한 끝에 집에 전화를 하랜다.
"걍 대충 치료하고 집에 보내줘. 이깠 걸루 집에 걱정끼치고 싶지 않어.."
"임마. 너 내장파열로 출혈이 심해 곧 죽을거래, 빨랑 전화하자.."
"......"
손쓰기에는 너무 늦어 손대지 않겠다는 외과과장에게 죽더라도 배나 한 번 갈라보고 죽게해 달라고 사정한 친구넘...
나는 그때도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었음에도 사태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눈뜨고 있는데 무슨 소리들이야..
사람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죽는 수도 있나.....'
그리고..
죽음이란게 남의 얘기가 아닌,
나 역시 언젠가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런 존재임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수술이 결정되자
마치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코와 입으로 호스가 들어오고 팔, 다리에는 수많은 링거바늘들이 주렁주렁 꽂히기 시작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사이..
먼발치로 넋을 놓고 울고 계시는 부모님을 면목이 없어 애써 외면했다.
수술실 앞까지 눈물을 흘리며 따라오는 형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렇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아버지, 어머니 잘 부탁한다고..
수술실로 들어가 눈을 감으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독거렸다.
고생다운 고생 한 번 한적 없이 즐겁게 살다 가는 거라고..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실컷 소풍을 즐겼으니 이제는 끝내고 미련없이 갈때라고..
마음은 담담하기만 했다.
눈앞에 수술조명등이 켜지면서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안녕.. 이 세상 모든 것들..'
작별인사를 고하고
강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던가...
삐걱삐걱.. 노저어 오는 카론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10여 시간에 걸친 대수술..
그리고..
기적처럼
숨이 붙은 채로 나는 수술실을 나왔다
드물게도, 췌장이 끊어졌지만 흘러나온 피들이 응고되어 출혈을 지연시키고 있었기에 살릴수 있었단다.
중환자실로 나와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목구멍 깊숙히 꽂아두었던 플라스틱 조각을 손으로 가리키며 빼달라고 한 뒤,
긴 한숨 끝에 내뱉은 첫마디..
"XX. 죽는 것도 안쉽네.."
(비몽사몽간이라 기억에 없는데 내 간호를 담당했던 레지던트가 얘기해줬다)
이 날이 2004년 4월 8일 새벽...............
그리고 정확하게 만 4년 후인 2008년 4월 8일
나는 짐을 꾸린다.
지인이 하필 재수없는 이날이냐고, 다른 날을 택하라고 했지만
그냥, 이날 떠나고 싶었다.
사고로 죽을 운명이라면 그건 보너스로 딱 4년만 더 살게 해주려 한 신의 뜻 아니겠는가..
그럼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뭐.. 이미 죽었던 목숨...
'보너스 인생 4주년 기념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
부모님께 둘러대기도 좋찮아.. ㅋ~
사고 이후로도 여행을 안나가 본 건 아니었지만
주당들과 함께 떼거지로 나가 모두 호텔에서 주로 먹고 마시고 밤에 술집만 찾아다니던 여행..
태국이든 필리핀이든 현지 음식 한 번 제대로 먹어본 적 없으니
굳이 나갈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호텔 잡고 놀아도 상관없는, 준 패키지 같은 그런 여행이었다.
태국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자는 취지로 한 달 계획을 잡았다.
첨에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다 돌 계획이었으나..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도 여행이라는 게 휴식의 의미가 있는 건데
다니면서 힘들고 다녀와서 피곤한 여행은 안하니만 못하다는 게 나의 지론.
굳이 일정은 잡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재미를 들인 스노클링 때문에 오리발과 스노클링 장비를 구입하고 주로 남부 바다 위주로 돌기로 한다.
머물고,
투어 한 번 돌고,
쉬고,
지겨우면 떠나고...
집을 나서다가
문득 태국이 우기로 들어섰음을 떠올린다.
배낭 방수커버도 없는데..
집앞 슈퍼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시험삼아 펼쳐들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우산을 든 나는 휘청거린다.
문득 메리 포핀스를 떠올린다.
양산을 펼쳐든 채 바람을 타고 와서
현실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속을 넘나들다
다시 바람을 타고 떠난 메리 포핀스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 바람을 친구 삼기로 한다..
그렇게 외로운 여행은 시작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그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