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in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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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좋은 날-intro

유령 38 4064

비어있는 퍼즐 같은 어느 기억의 한조각을 맞추며..

그냥 모든 게 귀찮고 무의미 했다.
일 끝나면 맹숭맹숭하게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그날도 미친듯이 술을 마셨더랬다.
그리고는 뭔가에 씌인 사람처럼
만취된 나는 무의식적으로 차에 올라타고 핸들을 잡았다.
음주운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눈을 떠보니 터진 에어백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아마도, 다행히(?)
철제 중앙분리대를 들이 박은 것 같았다
차는 구겨질대로 구겨져 앞유리는 물론 유리란 유리는 모조리 박살이 났다.
멀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이마와 무릎에 타박상을 입은 것 말고는 그다지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배가 좀 아프고 몸이 으실으실하게 추웠을 뿐이다.
그런데도 강행하던 CT와 MRI촬영..
마침 그 병원에서 내과의로 당직을 서고 있던 친구넘이 외과과장을 새벽에 호출해서 상의한 끝에 집에 전화를 하랜다.

"걍 대충 치료하고 집에 보내줘. 이깠 걸루 집에 걱정끼치고 싶지 않어.."
"임마. 너 내장파열로 출혈이 심해 곧 죽을거래, 빨랑 전화하자.."
"......"

손쓰기에는 너무 늦어 손대지 않겠다는 외과과장에게 죽더라도 배나 한 번 갈라보고 죽게해 달라고 사정한 친구넘...
나는 그때도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었음에도 사태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눈뜨고 있는데 무슨 소리들이야..
사람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죽는 수도 있나.....'
그리고..

죽음이란게 남의 얘기가 아닌,
나 역시 언젠가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런 존재임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수술이 결정되자
마치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코와 입으로 호스가 들어오고 팔, 다리에는 수많은 링거바늘들이 주렁주렁 꽂히기 시작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사이..
먼발치로 넋을 놓고 울고 계시는 부모님을 면목이 없어 애써 외면했다.
수술실 앞까지 눈물을 흘리며 따라오는 형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렇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아버지, 어머니 잘 부탁한다고..

수술실로 들어가 눈을 감으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독거렸다.
고생다운 고생 한 번 한적 없이 즐겁게 살다 가는 거라고..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실컷 소풍을 즐겼으니 이제는 끝내고 미련없이 갈때라고..
마음은 담담하기만 했다.
눈앞에 수술조명등이 켜지면서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안녕.. 이 세상 모든 것들..'
작별인사를 고하고

강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던가...
삐걱삐걱.. 노저어 오는 카론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10여 시간에 걸친 대수술..
그리고..

기적처럼
숨이 붙은 채로 나는 수술실을 나왔다
드물게도, 췌장이 끊어졌지만 흘러나온 피들이 응고되어 출혈을 지연시키고 있었기에 살릴수 있었단다.

중환자실로 나와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목구멍 깊숙히 꽂아두었던 플라스틱 조각을 손으로 가리키며 빼달라고 한 뒤,
긴 한숨 끝에 내뱉은 첫마디..

"XX. 죽는 것도 안쉽네.."

(비몽사몽간이라 기억에 없는데 내 간호를 담당했던 레지던트가 얘기해줬다)

이 날이 2004년 4월 8일 새벽...............

그리고 정확하게 만 4년 후인 2008년 4월 8일

나는 짐을 꾸린다.
지인이 하필 재수없는 이날이냐고, 다른 날을 택하라고 했지만
그냥, 이날 떠나고 싶었다.
사고로 죽을 운명이라면 그건 보너스로 딱 4년만 더 살게 해주려 한 신의 뜻 아니겠는가..
그럼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뭐.. 이미 죽었던 목숨...

'보너스 인생 4주년 기념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
부모님께 둘러대기도 좋찮아.. ㅋ~

사고 이후로도 여행을 안나가 본 건 아니었지만
주당들과 함께 떼거지로 나가 모두 호텔에서 주로 먹고 마시고 밤에 술집만 찾아다니던 여행..
태국이든 필리핀이든 현지 음식 한 번 제대로 먹어본 적 없으니
굳이 나갈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호텔 잡고 놀아도 상관없는, 준 패키지 같은 그런 여행이었다.

태국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자는 취지로 한 달 계획을 잡았다.
첨에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다 돌 계획이었으나..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도 여행이라는 게 휴식의 의미가 있는 건데
다니면서 힘들고 다녀와서 피곤한 여행은 안하니만 못하다는 게 나의 지론.

굳이 일정은 잡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재미를 들인 스노클링 때문에 오리발과 스노클링 장비를 구입하고 주로 남부 바다 위주로 돌기로 한다.
머물고,
투어 한 번 돌고,
쉬고,
지겨우면 떠나고...

집을 나서다가
문득 태국이 우기로 들어섰음을 떠올린다.
배낭 방수커버도 없는데..
집앞 슈퍼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시험삼아 펼쳐들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우산을 든 나는 휘청거린다.

문득 메리 포핀스를 떠올린다.

양산을 펼쳐든 채 바람을 타고 와서
현실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속을 넘나들다
다시 바람을 타고 떠난 메리 포핀스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 바람을 친구 삼기로 한다..

그렇게 외로운 여행은 시작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그 어느 날...

38 Comments
bs1227 2008.06.30 09:03  
  인생을 느끼는 글입니다.
계속 기대합니다.....
콩국수군 2008.06.30 09:21  
  포스가 넘치는글...
여행기 기대하겠습니다~
dandelion 2008.06.30 09:52  
  좋은 여행이 되셨을 것 같네요!! 정말 윗분 말씀때로 포스가 대단하네요~ 다음여행기도 빨리 올려주세요
켄지켄죠 2008.06.30 09:58  
  잠시나마 인간극장 보는줄 알았습니다, 사진으로 뵌분이 글쓰니깐 그상황이 상상되네요,,, 포스작렬~
김우영 2008.06.30 10:04  
  헉.. 유령형님.. 그런일이있었다니.. 쩝.. 놀랍기만 합니다... 4월8일 우리는. 같은 대한항공을 타고...

수안나폼공항에서도 같이 캐리어를 찾고...

또 송크란축제때.. 동대문에서도 뵙고...
베트남 번개때도 뵙고..

그렇게 자주 뵙는 사이가 되었네요.. 하하하..

인연이란~~~~~ 참 재미난거죠..

필력이 장난아닙니다... 우와~~~~ ^_____________^
Bohemian 2008.06.30 10:47  
  크아....마지막....명대사 남기시네요!!!

"혼자 떠나는 여행, 바람을 친구 삼기로 한다.."

순간 소름이 화악~ 돋앗다는....

유령님은 정말 멋을 아시는 분이시군요~^^
오즈의맙소사 2008.06.30 12:10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의 첫장을 읽을때의 기분이네요~~ ^^ 기다립니다 2편
속빠진만두피 2008.06.30 12:35  
  와우 거의 소설수준이군요!!
기대만발입니다!!
Leona 2008.06.30 14:05  
  맑고 담백한 여행기, 잘 보겠습니다...^^
lakill 2008.06.30 17:27  
  멋진 글귀들이군요^^ 꼭 챙겨볼께요.ㅎ
철수 2008.06.30 17:54  
  기대 많이 하겄습니다 다시 울렁증이....ㅋㅋ
young588 2008.06.30 19:44  
  2,000밧
로이킴 2008.06.30 19:56  
  유령형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요..
긴 글 ... 많은 글..남겨주세요. 기대하렵니다.
잠신 2008.06.30 22:50  
  나랑 손잡고 책 함내죠^^
유령님!! 사람을 울릴줄 아네 ㅡㅡ;;
기다립니다~~~~ 2타부터 쭉욱...... 빨리빨리....
동심 2008.06.30 23:47  
  와~~ 글 솜씨가 작가 이상이네요. 멋진 인트로였습니다.
자니썬 2008.07.01 00:16  
  유령님은 소문에 으ㅣ하면 동해 번쩍 서해번쩍 아니구나{이건 홍길동 이지}살포시 왔다가 다시 살포시 가시는 분이 아닐까요?
1980년 초반인가?이장호감독 안성기주연에  바람불어 좋은날 이문득 생각 나네요.. 내용은 경제는 발전해 나가는 반면 다른면 에서는 소외된 젊은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내용 같아요... 초등학교때 본 영화 덴 기억이  가물 가물 하네요..유령님  잠시후에..제가 급해서..
helena 2008.07.01 00:59  
  intro...단편 소설의 도입부처럼...
책장 넘기며 읽고 싶은 글이네여
바람과 떠나는 소풍 이야기,
기다려집니다.. 마니 ...
이츠키 2008.07.01 01:08  
  오~~ 유령님 이런!!
매번 볼때와는 너무 달라서...
앞으로 기대 됩니다!!!
♥아이린♥ 2008.07.01 02:12  
  와우~~~~~~@.@
자니썬 2008.07.01 02:41  
  죄송해요..아는 직원이 뭘 잃어 버려서...절대로 볼일 보러 간 것 아니에요..
사실 개인적인 일을 애기 하는게 참 힘든 것데  대단하세요..유령님..제 애길 조금 해보죠..2003년도에 자살 할라고 마음 을 먹은 적 이 있어요..7년사귄 여자가 바람이 나서,,근데 지금와서 생각 해보면 죽기는 싫더라구요..
아마이 이야기를 김우영 부장님 한데 하면 -여자 때문에 죽기는 왜 죽어요 하겠죠..그러면 아마 저는 모프로에 나오는 말을 인용해서 여자한데 미쳐 봤어요..미쳐 보지 않았으면 애길 하지 마세요  라고 그춥고 눈오는 날 인천 석남시장에서 무릎을 끊고 떠나지 말라고..그때 는 왜 그래는지...부장님 이야기는 가상 으로 생각 해 봤어요..
혼자 다나는 여행 결론 은 자기자신 이 파트너 란 느김이
드네요...바람을 친구삼아...너무 좋은데요...
개인적으로 레오나 님과 유령님 진짜로 글 을 잘스세요...부럽네요...
안녕 이세상모든것 들 을 작 별을 고하고 ...{미련이 없다는 느낌}하지만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서 중반부터 여행 일기 가 시작 되네요...다음편 기데 할께요...너무
  감사 해요~~~
달빛여행 2008.07.01 04:13  
  와..제목부터..다 ㅠㅠ 님 지금은 많이 괜찮으신거죠?^^
자니썬님도..완전 가슴아픈 추억이 있으시네요..ㅠ
살면서 아마도 한두번은..힘든고비가 있나봅니다.
저 역시 있었구요 ^^;; 여행기 기대됩니다 ^^
타이킹왕짱 2008.07.01 09:24  
  한편의 장편소설이 또 시작되는건가요? 기대됩니다!!
세박자 2008.07.01 11:57  
  류 소설 좋아한다고 할때부터...
어쩐지 비린내가 나더라니...ㅋㅋㅋ

레테의 강에서 배삯이 없었구만... ㅡ,,ㅡ;;
무사태평 2008.07.01 14:53  
  전혀다른 여행일기에 시작 서서히 흥분되고 있습니다우리동네 유령님 화이팅;;
heyjazz 2008.07.01 15:35  
  저역시도 자살을 생각해서 한겨울에 부산으로 갔더랬지요......
그러나 다시 왔네요....
이유는??? 겨울바다가 너무 추워요....ㅠ.ㅠ
허리까지 들어갔나???? 순간적으로 드는생각....
아띠 감기걸리겠다...ㅋㅋㅋㅋ
자살할려고 술을 잔뜩 마시고도 감기걱정이라니....-_-;;
거의 코메디지만 그당시엔 절박했더라는.....
mloveb 2008.07.01 19:20  
  읽는도중 눈물이 찔끔했네요... 죽을 고비를 넘기면 정말 얼마나 인생이 소중한지 꺠닫는다는데.... 멋진 글 정말 기대됩니다
딴즈 2008.07.01 20:38  
  와우~ 유령님의 멋진 글이 시작되었군요~
완전기대하고 있겠습니다...^^
Rhett 2008.07.02 17:29  
  매일 2탄 보려고 태사랑 들어오고 있습니다.
얼렁 좀 올려주세요 ~~~~ ^0^
철수 2008.07.02 21:28  
  진짜 2탄은 언제  얼렁얼렁...........유령행님 ....
유영 2008.07.05 02:40  
  저도 4월 3일날 태국 입국해서 4월 6일부터
카오산에서 멍때리기 시작했어요.. ㅎㅎ
장장 2주동안... -_-;;
그 좁은 카오산에서 송크란때 부장님 일행도 봤으니
유령님도 아마 지나쳐가면서 봤을듯.. ㅎ
다피 2008.07.05 07:31  
  유령님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그러한 턴 포인트들은 나를 성숙하게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으로 부터든 타인으로 부터든....
"jenny" 2008.07.05 20:37  
  왜....내가.....울컥하냐....;;;;ㅋ기대되는데요...ㅋ
bagpacker 2008.07.06 04:50  
  우와~~ 아름다운글이 이런거군요...기대됩니다...
닥터조 2008.07.07 10:27  
  그래서 얼굴에서 풍기는 잔잔함과 애절함이 같이 보여지시는 분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다시 함 불붙어 보아요......^^
돌고래 2008.07.07 13:37  
  헐.......왜 눈물이 난다니...............
초이[C] 2008.07.15 15:51  
  이제사 읽게 됐네요.
항상 웃는 모습만 보다 첫글을 읽는순강 멍하네요.
기대만땅입니다.
mybee 2008.08.20 02:14  
  멋지네요...삶을 다시 돌아볼수 있네요..
etranger 2008.08.27 18:24  
  전율이 옴을 느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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