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꽃이 진 자리에서 꽃이 핀다
다시 세상이 버린 이름의 꽃이 핀다
다시 숨이 붙어있는 모든 곳에서 꽃이 핀다
다시 세상의 색을 모두 품은 꽃이 핀다
다시 지난 시간의 모든 소리를 담은 꽃이 핀다
다시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할 꽃이 핀다
다시 우리를 우리로 묶는 꽃이 핀다.
우리조차 알수 없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우리의 씨를 뿌려
우리의 이름으로 된 우리의 꽃을 피우려 애를 써보지만
꽃망울이 열리기도 전에 다르다는 이유로 악랄한 도적에 쫓기어
이 산으로 저 골짜기로 흩어지고 또 흩어지고
꽃이 필 무렵에 또다시 다르다는 이유로 또 다른 도적에게 쫓기어
더 높은 산으로, 더 깊은 골짜기로 흩어지고 또 흩어지고
높은 산의 찬바람을 서로의 온기로 버텨내며
깊은 골의 외로움을 서로의 존재로 위로하며
땅을 깍아 논을 만들고
자갈밭을 깨어 옥수수를 심고
숲을 헤매어 약초를 캐고 산짐승을 잡아
우리의 이름으로 된 우리의 꽃을 피우려 했지만
잔혹한 십년의 포화 속에서
우리의 일부는 패배한 비밀의 전사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포성이 멈춘 후에는 다시 쫓겨야 했고
삶의 마지막까지 쫓겨애 했고
뾰족한 산정의 끄트머리까지 쫓겨야 했고
깊숙한 골의 밑바닥까지 숨어야 했고
메콩의 거친 물살을 맨몸으로 건너야 했고
빌고 빌어서 낯선 서방의 땅으로 이주해야 했고
그럼에도 지켜낸 우리의 씨앗
지켜낸 우리의 소리
지켜낸 우리의 신앙과 풍습
지켜낸 우리의 이야기
수천년의 시간마저 이겨낸 우리였기에
수많은 도적마저 피해온 우리였기에
쫓겨가도 잃지는 않는
흩어져도 잊지는 않는
무너져도 꺾이지 않는
어떻게든 어디서든 꽃을 피우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유전자처럼 박혀있는 경험과 믿음.

그래서 지금은 남의 이름으로 된 땅에서
우리의 꽃을 올해도 화려하게 피운다.
우리의 말을 올해도 목청껏 외친다.
우리의 놀이를 올해도 신나게 한다.
다시 꽃이 핀 이 자리에서 꽃이 지겠지만
시간은 항상 우리 편이었으니 영원히 이 자리에서 또 꽃을 피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