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있어~
(2005년 글입니다.)
원래의 계획대로 라면...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적용되는 무비자 15일 체류 기간에 더해, 관광 비자를 한 달 간 연장하면 거의 40일은 넘게 베트남에 머무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야심차게 그려 놓았던 북동부 루트는 사실 엄두가 안 나서 포기해 버렸지만, 40일정도의 시간이라면 천천히 남하하면서 웬만한 도시와 마을들은 빼놓지 않고 샅샅이 볼 수 있을 테니, 약간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베트남을 여행하는데 그다지 모자라지는 않을 듯 했는데...
이 계획에 대해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었고, 그래서 우리는 하노이에서 다소 느릿하고 루즈하게 도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거나, 더위에 못 이겨 에어컨이 켜진 우리 방에서 낮잠을 즐기거나 하기도 했다.
하롱이랑 흐엉사를 다녀오고 하노이에서의 체류가 거의 열흘 정도 되어가던 시점... 이제 슬슬 비자 연장을 할 때가 된 것 같아 여행사를 다녀 봤는데... 이게 웬 변괴람! 얼마 전에 비자관련 규정이 바뀌었는지, 뭔가가 훨씬 복잡하게 되어버렸단다.
우리가 이곳에 보름동안 머물 수 있는 자격은 비자 없이 있는 것이라서, 비자 연장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 비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관광비자가 아닌 비즈니스 비자만 받을 수 있고 그 비자를 만드는 기간이 열흘에서 2주일 정도 걸리고 금액은 거의 130달러~~
너 댓 군데가 넘는 여행사마다 하는 똑같은 소리에 절망한 채, 출입국 사무소로 달려 가봤다. 거기 가면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 비자 만들러 왔는데요~
- 여행사로 가시오!!
- 네.
모든 게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열흘이 넘는 시간동안 여권 없이 다녀야 하는 상황도 왠지 불안했고... 비자를 붙인 여권을 받으려면 다시 하노이로 돌아 와야 하는데 하노이 주변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있을 수도 없고...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도 어렵고...
할 수 없이 우리는 정해진 기한(15일...) 안에 이곳 베트남을 떠나기로 결정해버렸다. 원래 베트남을 이번과 내년, 두번에 나누어 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15일만 있고 내년에나 3개월 정도 몰아서 보려고 한다.
아무튼 날씨마저도 안 도와줘서, 비자 갱신에 대해 이리 저리 알아보는 동안 하노이 동부 해안에서 폭풍이 발생했다. 비가 얼마나 엄청나게 쏟아 붓는지 얼마 남지 않은 귀한 시간 이었지만, 어디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방에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게 생겼다. 흑흑...
자. 그럼 이곳 하노이에서 전속력으로 사이공까지 내려가야 된다는 말인데 뭘 타고 간담...
50달러짜리 기차를 타느냐, 아니면 95달러짜리 국내선 비행기를 타느냐 잠시 고민 하다가 기차 쪽으로 결정~ 역으로 달려가서 오늘 밤 떠나는 사이공 행 침대칸 표 2장을 예약하니, 왠지 쫓겨 내려가는 거 같아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나마 우리가 원하는 기차표가 있어서 다행이다. 중국 같았으면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 겨우 얻을 수 있었을텐데, 당일 날 바로 표를 구할 수 있다니...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로해야 하나...
이제 슬슬 베트남에 대한 워밍업이 끝나고 ‘좀 돌아다녀볼까...?’하며 신발끈을 조였건만... 그동안 루즈하게 보냈던 하노이에서 9일간의 시간이 너무 아쉬워져 버렸다. 누가 이럴 줄 알았겠냐고!!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도읍지였다던 훼도 못보고 가는 구먼...
그동안 우리가 하노이에서 본 게 뭐였더라...
호치민 묘와 문묘 그리고 민족 박물관을 비롯한 몇몇 개의 박물관 관람...그리고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던 수상인형극 관람(난 지루했지만 요왕은 두 번째 보는 것인데도 꽤 감동적이었다한다...) 우리 발로 걸어 다니며 했던 시내 투어 등등... 뭐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아직 이곳의 많은 식당들과 야경들을 즐기지도 못했건만... 폭풍마저 비와 바람을 세차게 쏟아 부어 우리의 갈 길을 더 칙칙하게 만들었다.
밤 11시에 사이공을 향해 출발하는 기차는 꼬박 31시간 반을 달려 모레 새벽 6시쯤에 우리를 사이공에 내려다 줄 것이다. 논스톱 31시간의 이동이라니... 단일 종목으로는 완전히 기록 경신이구만...
이곳 베트남은 기차의 폭이 중국에 비해서 꽤 좁은 편이었다. 복도에 앉을 좌석도 없고(그래서 젤 아래 침대에 다들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침대 넓이도 중국 것 보단 좁고, 머리를 펴고 앉기도 곤란할 정도로 아래 위 침대 사이의 간격도 꽤 낮았다. 총 3번의 식사도 제공하는데, 화장실 가야 되는 게 겁나서 잘 먹히지도 않고 음식도 꽤 입에 맞지 않는 것 일색이라 몇 숟가락 뜨다 말았다. 요왕은 싹싹 잘도 먹는다.
기차 안에서 살짝 들여다 본 베트남 현지인들은 예상외로 꽤 다정다감한 편이었다고 느껴진다. 우리 칸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먹을 것 있으면 서로 나누거나 권하고 워낙 긴 시간을 같이 가야 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잘 나누고, 서로 금세 친해지는 듯... 여행자를 상대로 하지 않는 일반적인 시민들은 그저 우리나라랑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 같다.
아...그나저나...사이공에 수요일 새벽에 도착해서, 일요일 아침에는 캄보디아로 넘어가야 하니 사이공을 둘러볼 시간이 고작 나흘밖에 되지 않네~ 하롱에서 만난 베트남 아저씨의 ‘USA 스타일’이란 게 어떤 걸까... 하노이에서 사이공까지 거의 1800km에 이르는 길을 기차는 덜컹덜컹 쉬지 않고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