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이름은 스위스, 실상은 난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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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이름은 스위스, 실상은 난민촌

고구마 1 690
(2003년 글입니다.)



그래도 좀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나 부다. 자기네 숙소 이름을 스위스 호텔이라고 지은걸 보면 말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와 방에 누워 있으니 어디선가 중국 귀신이 홀연히 나타날 것만 같았다. 프론트의 직원들은 무뚝뚝하고 축~ 쳐져있었다.
좁고 긴 복도는 어둡지도 않고 그러나 밝지도 않은, 이상하게 흐릿한 불빛을 비추고 있고 천장은 시커멓게 금이 죽죽 나있다.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라면 이력이 붙을 만큼 붙었지만, 이곳 말레이시아의 싸구려 숙소들은 그야말로 적응이 안 된다. 태국은 싼 숙소라도 이렇지는 않은데..... 햇볕이 안 들어 오는 방이 대다수이고, 어둡고 침침한 방에는 빈대가 살고 있을 확률이 높은데다가 침울한 내부 분위기는 정신마저 피폐하게 만들 지경이다. 낡고 때가 낀 거울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낮선 얼굴이 비칠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를 돌리게 된다.
“으으... 내일 당장 여기서 나가야 겠다... 25링깃 밖엔 안내긴 했지만 진짜 너무한걸...”
“이런 방에선 남자인 나도 혼자 자라면 못자겠다. 우리 오늘 불 켜놓고 자자....”
“아... 우울해... 그냥 태국에 있을 걸 그랬나..... 여기 빈대는 없겠지?”
매트리스 침대 솔기를 뒤져보니 빈대 잡은 자국은 없는 듯했다. 우리는 밤새 뒤척이며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여차 하면 그냥 이대로 태국으로 돌아가 버릴까도 생각했었지만, 첫날의 실망감과는 달리 그럴듯한 숙소(홍핑 호텔)로 옮긴 후 제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페낭은 그 나름의 매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각 민족 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태국과는 달리 이곳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족, 화교, 그리고 인도계가 그들만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나 이곳 출리아 거리 옆 차이나타운은 그야말로 빽빽한 한자 간판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중국말로 마치 중국의 혼잡한 거리로 갑자기 퉁~ 하고 내던져진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슬람식 두건을 뒤집어 쓴 아가씨들과 사리를 입은 뚱뚱한 인도 아줌마, 그리고 우리와 많이 닮은 화교가 같은 거리를 활보하고, 몇몇 건축양식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다 모스크와 중국 절 그리고 총천연색의 힌두 사원이 넓지도 않은 거리에 함께 존재한다.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폭 또한 넓고도 넓었다.
우리가 페낭에 간다고 할 때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그다지 볼 것도 없고 엄청 지저분한데....’라는 반응을 보여서 내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속소만 말끔한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저 놓쳐버리기엔 아까운 곳이다. 역시 누구에게나 같은 느낌을 주는 여행지는 없는 듯하다.
아침은 마일드하게 중국식 죽과 딤섬을... 점심은 말레이식 덮밥으로.... 저녁은 탄두리 치킨과 난을 곁들인 근사한 인도식.... 우리는 이걸 한국에서 제대로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즐겁게 수저를 놀렸다.
페낭에서 3박 4일을 보내긴 했지만 첫날은 늦게 도착하고 마지막 날은 카메론 하이랜드로 일찍 출발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이틀만을 온전히 보냈을 뿐이다.
극락사의 독특한 분위기와 페낭힐에서의 아름다운 야경은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우리는 오후 내내 더운 날씨 속에서 이곳저곳을 너무 열심히 걸어다닌 탓에 페낭힐에 도착했을때는 거의 넉 다운 직전이었다. 페낭힐에서 근사한 야경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낮에 너무 진을 빼지 말았어야 했는데....
페낭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숙소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보니 다리가 후덜덜~ 떨릴 지경이다. 여행경비를 아낀다는 이유로 이날 아침 홍핑 호텔에서 나와 ‘러브 레인 인’이라는 싼 숙소로 옮겼던 우리는 낡고 지저분한 침대위에서 피곤한 밤을 보낼 생각이 하니 둘  다 어깨가 축 쳐졌다.
“여기엔 왜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가 없을까... 워낙 여기 숙소들이 드러워서 여기다가 깔끔하게 만들어 놓으면 장사 잘될 거 같은데..... 그치 않냐?”
“우리가 만들까?”
“아서라..... 우리는 여행이나 하고, 사업은 다른 누군가가 잘 해내겠지...”
아... 우리집 안방의 푹신하고 포근한 침대와 이불이 너무너무 그리운 밤이다.

사진1 : 페낭의 차이나타운
사진2 : 페낭힐에서 바라본 조지타운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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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얼음시집 2021.02.12 00:49  
말레이시아의 싸구려 숙소들은 대부분 제3국 노동자들을 타깃으로 하고, 태국보다 퀄리티가 낮습니다. 저가인력인 합법적인 제3국 노동자의 수가 3백만명(말레이시아 인구 대비 10%)이 넘거든요. 여기에 유동인구와 불법체류자들도 더 있고요.
여행기 시점인 2003년 시세는 제가 모르겠으나, 그래도 25링깃이면 로컬이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숙소 수준은 아닐 듯하네요.
참고로 말레이시아는 1인당 ppp 기준 태국의 2배가 넘기에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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