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ta kinabalu 여행기 2-b)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바람아래의 땅. 코타 키나발루 ,,,
버스는 9번 버스였고 우리나라의 마을버스 크기의 Non 에어콘 미니버스였다.
버스는 서너정거장을 서며 몇몇사람을 내려주고 태우고 하더니
탑승한지 10분만에 우리를 종점인 City Terminal에 내려 주었다.
그곳은 코타키나발루에서 가장 큰 규모의 쇼핑몰인 Wawasan Mall 근방이며
우리가 묵고 있는Beverly Hotel과도 아주 가까운 곳이다.
*City terminal*
(사진속의 파란 벽의 건물이 와와산 . 그 뒷편이 증권회사 빌딩)
우선 시원한 쥬스나 뜨커운 커피라도 한잔하며 점심도 해결 할 생각으로
와와산 몰에 들려 Ali cafe 한잔과 감자샐러드, 웻지포테이토와 생과일 칵테일
그리고 시원한 오렌지쥬스 두잔으로 점심을 때웠다,
(커피 1링깃.감자,,4링깃.웻지,,4링깃.쥬스 1링깃.생과일 4링깃 총15링깃)
간단한 식사후 호텔에 들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오후에 갈 곳을 정리를 했다.
전망대와 시계탑, 갤러리, 중국인거리, 위스마 메르데카 공원,
그리고 오전에 출입제지 당했던 주립 모스크 말고 또다른 모스크,
시립모스크에 가기로 하고 호텔을 나왔다.
북위 4-8도에 위치한 보르네오섬의 코타 키나발루는
적도가 가까워서 인지 태양볓이 정말로 강렬하다.
특히 오후 2시의 태양은 우리의 호흡마저도 태워 버리려는듯,,,
숨조차 쉬기 버거울 정도로 후--욱 숨이 막혔다.
늙고 친절한 벨보이 Stephen이 콜 해준 택시를 20링깃에 Deal을 해서
우선 전망대에 들린후 시계탑에 가기로 했다.
전망대는 Jalan Street에 있는 Wisma Merdekah공원에서 아주 가까우며,
안내책자에 씌여진 정보와는 너무나 다른 곳이었다.
말이 전망대 이지 그냥 현지인들의 가벼운 아침 산책길 정도였다.
늘,,,,"여행정보 책자를 50%만 믿자,,,"하는 마음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무겁게 들고 다닌 그 책자를 집어 던져버릴 정도로
전망대는 정말 전망대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였다.
이 전망대에게 관광지로서의 점수 20점을 주었다.
차를 돌려 2분거리에 시계탑이 있었다.
그리 고풍스럽지도, 그리 아름답지도, 그리 잘 관리되어 있지도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목제 시계탑.
잠시 코타 키나발루의 역사를 이해 해 보기로 했다.
코타 키나발루는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엔 영국령으로 제셀톤이라 불리었지만,
1940년대 초, 전쟁이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지리적으로 태평양의 마지막 보루로서 일본군과 연합군의 주요 격전지였고
2차대전이 종결되며 모든 철도와 도로와 건물이 완전히 파괴된 도시였다.
그래서 코타 키나발루엔 오래된 유적지나 건물이 없으며
모든 기간시설들은 전쟁 종료후 재 정비 또는 재 건설 된 것들 뿐이다.
그래도,,,그래도 좀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을 꼽으라면
80년 정도의 풍상을 견딘 시계탑이 유일하게 오래된 유산이라고 보아야 겠다.
*Etkinson Clack Tower*
* Stone of Clack Tower *
뜨거운 적도의 태양빛 아래에서 역사탐방이라도 하는 역사학자 처럼
꼼꼼히 시계탑을 둘러보고, 시대적 배경과 건축동기도 읽어보고
너무 더워서 지쳤지만 기념으로 사진도 몇장 찍은후
시내에 위치한 China town으로 향했다.
*China town*
*Cafe in China town*
*Restaurant in China town*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중국인거리는 꼭 있다.
1962년,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외국인의 국내거주및 경제활동에 아주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으며,
특히 중국인에 대해서는 거의 강제출국에 가까운 강경정책을 펼쳤었다.
중국인은 자기 명의의 전화 조차도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아마 박 정권은 중국인들의 놀라운 응집력과 생명력을 미리 염려 했었나 보다.
다른건 다 차치 하고서라도 그 부분에있어서 만큼은
박 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 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박정권이 중국인의 국내거주와 경제활동을 인정하고 수용했다면,
우리나라도 동남아시아의 여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경제 문화등 사회전반에 걸쳐 모두 침식 당했을거라 생각 해 본다.
코타 키나발루의 화교의 역사는 약 3-400년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明이 망하고 靑이 정권을 잡으며 明 왕조에 충성했던 정치가와 권문세도가들과
忠臣은 不事二君이라는 儒學에 세뇌된 선비들이 靑의 숙청을 피해
혈혈단신 또는 식솔을 데리고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살길을 찾아 나섰다.
몇몇은 조선땅에, 몇몇은 일본땅에, 필리핀의 비간이나 이푸가오 지방에,
대만의 단슈이나 까오슝에, 싱가폴에, 보루네오섬의 아띠아띠,,
지금의 코타키나발루에 그들은 정착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개처럼,,아니 개 보다 더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 해가며
기득권에 기대어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터전을 넓혀갔고,
그에 반해 서민 혹은 빈민층에 머물러있던 원주민들은
조금씩 조금씩 자기네들의 혈통과 땅과 음식과 문화와 상권을 잠식당해 갔다.
*Apartment in China Town*
굳이 코타 키나빌루가 아니더라도,
화교의 세력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태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Kampung Ayru in China Town*
*Antiqe shop in Chian Town*
약국에서 레모나 같은 비타민정제도 사고 반창고도 사고....
차이나 타운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보니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적도와 가까운 곳이라서인지
어느쪽이 동쪽이고 어느쪽이 서쪽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비타민1 타블렛 0.6링깃. 반창고 1곽10개 2.5링깃)
Inanam에 위치한 시립 모스크는 "오후 다섯시 이후엔 출입이 되지 않는다"
는 택시기사의 안내에 우린 또다시 모스크 순례를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 시원하게 씻고 모처럼 풍성한 저녁식사를 위해
코타 키나발루의 최대의 식당街 Waterfront로 가기로 했다.
*석양의 Wismah Merdekah Park*
차 안에서 본 위스마 메르데카 공원은 조금씩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 . .
**시내 관광 이야기...2-c 에서 마저 쓰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