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31 푸쉬가르의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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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의 인도로 가는 길-31 푸쉬가르의 이것저것

Lucky 2 2910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8월 4일(목요일)

푸쉬가르에서 그냥 빈둥댄 하루


오늘은 델리로 가는 날이다. 어제 호텔 지배인에게 기차표를 부탁했다. 이미 매진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도에서 마지막으로 2등 SL이 아니라 1등 3A를 타 보려고 했다. 지배인은 구해 보겠다고 하며 예약비와 약간의 커미션을 요구했다. 그랬는데 오늘 오후 8시30분표를 구해왔다. 그런데 웨이팅 3,4번으로 구해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지금과 같이 매진된 경우에는 이런 방법으로 밖에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새벽 5시, 한 떼의 사람들이 씨끌벅적하게 푸쉬가르 가트 쪽으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해 뜰 때가 되었다. 새벽의 가트에 나가니 공기가 제법 상쾌하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조금 있을 뿐 불이 켜져 있어 분주한 곳은 호수건너 사원의 가트뿐이다. 다리를 건너 사원으로 가는 사람도 꽤 있다. 가트 아래 물가에는 서너 마리의 소가 한가하게 물을 마시고 있다. 사람들은 가트아래까지 내려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런데 소는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나보다. 아니 벗을 신발이 없던가.


인도에 오니 특이한 것 중의 하나가 신발을 벗는 것이다. 특히 ‘아잔타’석굴에 갔을 때 몇몇의 석굴은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고 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신발을 신고 신(神)앞에 가면 불경(不敬)스러워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그 더러운 거리를 맨발로 걸어온 사람은 왜 그냥 들어갈까? 우리의 예절이라면, 높은 사람을 만나거나, 신을 만날 때는 오히려 의관을 정제(定制)하는 것이 예의인데. 신발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기(氣)싸움을 하는 걸까?


한 사람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며 무엇인가 내민다. 푸쉬가르에 와서 벌써 여러 번 당하는 일이다. 이미 인터넷 정보사이트와 학생들의 소문에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꽃을 건네주고, ‘당신과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해 주겠다.’하며 물가에 내려가 여러 가지 축도를 하고, 돈을 요구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800Rs를 빼앗겼다가 경찰에 신고하여 다시 돌려받았다는 무용담을 올려놓기도 했고, 보통은 100Rs 전후를 주게 되는 것 같다. 론니플레닛에는 이들이 매어주는 붉은 색의 실을 ‘푸쉬가르 여권’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관찰해 보면,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 중에 서양인 인듯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동양인이다. 그리고 푸쉬가르의 동양인은 거의 다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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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가르 사두들이 축도를 해 준다고 하며 가트 아래에서 행사를 하고 있다. 이 행사가 끝나면 이마에 점을 찍어주고, 팔목에 붉은 색실을 매어주어 다른 사람이 또 축도행사를 하지 않도록 표시한다.




왜 한국인이 이들의 주요 고객이 되는 것일까? 이들은 왜 한국인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인들은 특정의 종교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어는 신(神)에게 소원을 빌던 큰 거부감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기독교’의 범주에 속하는 종교를 믿고 있고, 그들의 신은 매우 배타적이어서 ‘나 외에 다른 신(神)은 모두 우상(偶像)이므로 섬기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하나님’이외의 신(神)에게 예배드린 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이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하면 많이 귀찮게 굴지 않는다. 그러나 그냥 싫다고 하면 물건 파는 상인들과 똑 같이 아주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강요를 한다.


아침 8시,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호텔 앞 골목길은 한산했다. 마주보이는 ‘마하라타 낙타 사파리’아이들이 사파리 간판을 골목에 내다놓고 있고, 다른 상점들은 아직도 한밤중이다. 깨끗이 치워놓은 식당 앞에 소 한 마리가 똥을 떨어트리고 있다. 누구도 가만히 보고만 있다. 관찰해 보면 큰 상점이건, 좌판 한개짜리 구멍가게이건 한 10쯤 되어서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면 벌써 태양은 이글대고, 더위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새벽 6시면 벌써 흥성거리는 방콕의 골목이나 인도네시아에 비하면, 인도인들의 행동에는 훨씬 삶에 대한 의욕이 없다. 덥기 전에 그날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더울 때 일을 시작하고, 더 더워지면 덥다고 쉬는 인도인들, 내가 인도에 대하 부정적인 모습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도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드물다. 아니 ‘인도에는 일하는 여성이 없다.’ 낙타 몰이꾼 ‘라주(Raju)’에게 부인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 봤다. ‘라주(Raju)’는 ‘우리 카스트는 여자가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라주의 카스트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로서 어느 카스트는 여자의 노동을 금지하고 있고, 지금도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뭄바이 같은 대도시에서는 당당한 직업여성이 있다. 그들은 아마 카스트가 낮아서라기보다, 개방(開放)내지는 개화(開化)되어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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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사파리의 가이드 ‘라주’




나의 직업이 교사(敎師)라고 하자, ‘한국에서는 얼마나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본다. 자기는 11살까지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이런 ‘라주(Raju)’에게 얼마라고 이야기 해 주어야 한국의 입시지옥(入試地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또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얼마나 크냐고 물어본다. 45개 학급에 교사가 100명 학생이 1500명이 넘는다고 하니 ‘너 그 말 뻥이지?’하고 믿지 않는 눈치다. 잡아다 놓으면 도망가 구걸을 하고, 또 잡아다 놓고 하는 인도의 보통 학교들은 얼마만한 크기일까? 본의 아니게 ‘라주(Raju)’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체크아웃한 뒤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한국학생들과 이스라엘 식당이라고 불리는 ‘세번째의 눈(the third eye)’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3층은 주방 겸 당구대를 한개 가져다 둔 휴게실이고, 4층 옥상이 식당이다. 역시 사방이 탁 트인게 바람만 불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 식당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이스라엘 요리를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인 내가 알 수 있겠는가? 엉터리 한국식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좋은 한국요리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여튼 버르장머리 없는 이스라엘 아이들이 많이 온다. 하기야 이스라엘 아이들이 ‘예절(禮節)’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그 밖에 ‘히피’들도 해롱거리고 있다. 물론 이들이 진짜 히피인지, 히피가 없는 곳에서 히피 흉내를 내보는 짝퉁인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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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가르의 시장골목길, 인도의 다른 골목과 마찬가지로 온갖 것들이 한테 어울려 있다. 그래도 사이클릭샤와 오토릭샤가 다니지 않아 한결 낳다.




이스라엘 아이들은 그들 특유의 겁 없고, 예의 없고, 끼리끼리 뭉치기 잘하고, 소란스럽고 등등 별로 좋지 않은 인상으로 가끔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들의 이런 행동 때문에 또한 어디에서건 눈에 뜨인다. 학생들이 전해준 말로는 이스라엘 아이들은 일단 군복무를 마치면, 넓은 세상을 구경하도록 정부에서 비용을 지불하여 휴가를 보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를 배울 뿐 아니라, 군인 생활에서의 해방(解放)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세한 가이드북을 따로 가지고 다닌다.


이스라엘식 빵, 이스라엘식 샌드위치 등으로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내며 놀았다. 어디 가서 씨끄러운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반성의 자세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을 ‘이스라엘인’과 같은 레벨에 놓고 있다고 개탄(慨歎)하기도 한다.


1시 30분 경 다 같이 일어나 시장구경을 가기로 했다. 그때 모인 사람은 남자가 네 명, 여자가 두 명, 그리고 우리 이렇게 꽤 많은 인원이었다. 이들이 한꺼번에 푸쉬가르의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으니 상인들이 긴장할 만도 했다. 유명하다는 ‘캐쉬미르 숄’을 기념품으로 사겠다는 학생이 있어 흥정을 했다. 상인은 제일 좋은 상품이라며 여려가지를 펼쳐 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1600Rs에서 시작한 물건을 900Rs까지 깍았다. 상인은 진짜 100%의 고급의 ‘캐쉬미르 숄’이라고 더이상 깍아 줄 수 없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마지막으로 500Rs를 불렀을 때, 공교롭게도 그 상점에 들어가 구경하던 일행들이 다른 것에 흥미를 느껴 모두 빠져 나가게 되었다. 그 숄을 사려고 했던 학생은 ‘잠시 뒤에 다시 오겠다.’며 친구를 쫓아 나오려 하니까 끝까지 잡고, 마지막에는 200Rs에 가져가라고 사정을 하더란다. 그러며 안사기를 잘 했다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또 학생들과 낙타가죽제품을 팔고 있는 상점에 들어가 며칠전 부터 눈독을 들여 놨다는 가방, 지갑 등의 소품을 샀다. 어떤 것들이 좋겠느냐고 물어 와서, 인도의 냄새가 물신 풍기는 디자인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종민이도 거들어 무엇인가 마련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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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칙 ‘사이클릭샤’ 틀림없이 ‘릭샤’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Hotel V K’ 옥상으로 와서 음료수를 마시며 짐을 챙기고 앞으로의 일정들을 서로서로 조언해 주었다. 몇몇 학생들이 방콕을 경유해서 서울로 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방콕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또 몇몇 학생은 오늘 또는 내일 델리로 가게 돼있어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5시경에 자리에서 아쉽게 일어나 배낭을 메고 버스스탠드로 갔다. 이번에는 ‘아즈메르 버스스탠드’에서 버스를 타서 많이 걷지 않아도 되었고, 버스도 많이 있어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갔다.


아즈메르에 도착해 오토릭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역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수많은 삐끼들이 여러 가지를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일단 창구로 가서 웨이팅으로 되어있는 표의 좌석을 받았다. 기차에서 저녁으로 먹을 빵과 과일을 조금 사고, 웨이팅 룸에서 기다렸다. 아즈메르의 웨이팅 룸은 지키는 사람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감시한다. 뒤쪽으로 어설프나마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설도 되어있다. ‘기차역 100배 …’에 나와 있는 대로 되어있는 유일한 웨이팅 룸이다. 아니 사실 그렇지도 않다. 에어콘이 아니라 선풍기였으니까.


아즈메르역의 또 하나 놀라운 점은 ‘기차역의 전광판’이었다. ‘델리’가는 기차가 몇번 플랫홈에 정차하겠다는 안내는 기본이고, 기차가 올 시간이 가까워오자, 플랫 홈 전광판에 각 기차 칸의 번호가 뜨는 것이었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우리나라 보다 더 선진서비스라고 하겠다. 코치번호를 알기위해 이리저리로 뛰어 다닐 필요도 없다. 전광판을 보고 그 아래 서 있으려니까 기차가 들어와 딱 맞게 선다. 바라나시에서 기차 타는 것이 지옥(地獄)의 기차타기였다면, 이즈메르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인도의 기차는 보통 30량 이상, 지하철 1호선 플랫홈의 세배의 길이다.


기차 시간이 되어 플랫 홈에 나가니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학생 두 명이 있다. 마침 우리와 같은 코치였다. A3(1등석 에어콘 슬리퍼 코치)는 밖에서 보아 창문이 선팅이 되어 안이 보이지 않는다. 2SL이 철창으로 되어있는 것에 비하면 외부의 모습부터 틀리다. 그러나 3A의 내부는 2SL과 똑같이 생겼다. 선풍기 대신 에어콘이 시원하다 못해 춥게 나온다. 물론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다르다. 여기서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인도 10대 소녀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도 들린다. 잠잘 시간이 되니 ‘룸메이트(?)’가 다니며 깨끗한 시트를 2장씩 놓아주고, 베개와 담요를 준다. 시트 두 장을 깨끗하게 깔고, 담요를 덮고 잤다. 담요가 없으면 추워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정말 여행이 너무 힘들다면 세배의 가격을 주고서라도 타 볼만 하다. 그러나 건강한 여행자에게는 약간의 사치(奢侈)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종민이는 학생들 칸에 가서 늦게까지 놀다가 왔는지 오는 것을 못 봤다.


* 다음은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와 국립박물관
2 Comments
olivia 2005.12.14 06:01  
  -저는 가트에서 뿌자를 하고왔어요.
제가 무교라 그런지 별 거부감은 안들더라고요..^^

론리에서 보면 20Rs에서 40Rs면 된다고 했는데..
가트주위를 걷고 있는 저에게 다가온 분이(본인을 사제라 지칭..) 100Rs를 원하더군요..ㅡㅡ;;
허나, 신선한 새벽 공기와 왠지모를 경건함이 느껴지는 아침 분위기가 좋아서 깎을까 하다가 "에잇.."하는 기분으로 했는데..하고나서 참 기분이 좋더라고요..^^

가족을 비롯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분의 안녕과 평화를 빌자는 그 사제라는 사람..빌었습니다.
(순간 그리워지는 가족.친구들..)
또 세계 평화를 위하여 빌자고 하더군요.
(순간 이라크가 생각났어요..)
암튼 저는 좋았단 얘기..^^

인도 사람들의 행동 이해가 되지않으면서도
이해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 같아요..^^
그립네요..
Ducky 2006.03.23 13:04  
  좋은 경험 하신것 같습니다. 가트에서 뿌자 올리는 것 너무 멀리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뿌자 올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판다스'라고 부르는데 타 종교의 '목사님'이나 '스님'같이 힌두교의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약간의  기부금으로 안녕과 행복을 빌 수 있다면 그것도 추억이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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