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25 무굴제국의 역대 왕들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 잠깐만! 아그라를 관광하다가 무굴제국에 대하여 정리가 되어있으면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쓰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하여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물론 내가 가진 자료가 완벽한 것이 되지 못하여 제대로 정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만 알고 있으면 아그라나 텔리에서 무굴제국을 만났을 때 아쉬운 대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굴제국의 역대 왕
1대 바부르(Babur, 재위 1526 -1530)
아그라 델리를 중심으로 세력을 잡고 있던 로디(Lodi)왕조를 물리치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1526년 마지막 싸움에는 후마윤(Humayun)의 활약이 컸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투에 시달렸다. 아그라에 수도를 정하고 ‘구이에 아프간(Gui-e-Afghan)’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했으며, 후에 이 정원은 ‘아람박(Aaram Bagh)’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래서 바부르는 죽은 뒤 ‘아람박’에 매장되었다가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의 카불(Kabul)로 옮겨졌다.
2대 후마윤 (Humayun, 재위 1530 - 1556)
바부르의 사망으로 후계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후마윤은 제국보다 학문을 좋아하였다.
1539년 아프간 지배자인 세르사 수리(Shershah Suri)의 공격에 의해 후마윤은 인도를 떠나 아프카니스탄의 카불(Kabul)로 망명하였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아프카니스탄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인도의 아그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다시 왕위에 오른지 6개월만에 델리에 있는 자기의 도서관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망하게 되었다. 아내와 자식에 의해 묻혔으며 그의 무덤에는 많은 보물과 예술품이 부장(副葬)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후마윤 묘(Humayun's Tomb)의 관은 허관(虛棺)이고 진짜는 그 아래에 있다고 한다.
3대 악바르 (Akbar the Great, 재위 1556 - 1605)
잘라우딘 모하메드 악바르(Jalauddin Mohammad Akbar) 는 1542년 10월15일에 인도의 아마르콧트(Amarkot)성에서 태어났다. 후마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왕위가 비게 되었을 때 스승인 바이람 칸(Bairam Khan) 장군의 도움으로 칼란누르(Kalanoor)성에서 14살에 왕위를 계승했다. 델리를 확장하여 방어선을 굳건하게 하고, 아그라를 발전시켰으며, 아프칸세력을 공격하여 완전히 패배시겼다.
악바르는 아그라의 야무나 강둑의 서쪽편을 따라 도시를 확장했으며 도시의 방어를 위해 6개의 높은 성문과 성 주위를 흐르는 해자를 만들었으며, 하루만에 아그라의 모든 성곽이 봉쇄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악바르 이후 아그라는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종교에 관대하여 자기는 무슬림이면서도 힌두교 등 타 종교를 인정하여 계급과 신앙의 차별이 없이 관료를 기용하였다. 그 시범으로 자신이 직접 라자스탄의 지배계급의 공주인 ‘조다 바이(Jodha Bai)’라는 여인과 결혼하기까지 하였다.
악바르는 잠시 1569년부터 1586년 까지 수도를 ‘파테푸르 씨크리’로 옮겨 새로운 도시 건설을 하였으나 끝내 심각한 식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해 다시 아그라로 돌아왔다. 50년간의 통치 후 1605년 사망하여 아들 자르항기에 의해 생전에 자신이 마련한 ‘시칸드라’의 무덤에 묻혔다.
4대 자항기르 (Jahangir, 재위 1605 - 1628)
자항기르는 1569년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머리로 페르시아어와 터키어, 아라비아어, 힌디어를 배웠으며, 역사, 지리, 수학 등에 정통했다. 1605년 아그라에서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누르 마하이(Noor Mahai)와 결혼한 뒤 여자와 술에 빠져 통치를 게을리 하고 권력은 왕후 ‘누르 마하이(Noor Mahai 또는 누르 이 자항Noor I Jahan라고 불림)’이 휘두르게 되었다. 누르 마하이(Noor Mahai)는 자기 아버지를 위해 야무나 강(江) 동쪽 편에 ‘이티마드 웃 다울라(Itmad ud Daulah)’라는 흰 대리석의 무덤을 지었는데 타지마할과 닮아 ‘베이비 타지마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5대 샤자한 (Shahjahan, 재위 1628 - 1658)
어린시절이름은 꾸람(Khurram)이었는데 1592년 라호르(Lahor)의 꾸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다. 장인인 아사프 칸(Asaf Khan)과 모하밧트 칸(Mohavat Khan)의 도움을 받아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1628년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아사프칸은 수상에 오르고 모하밧트칸은 7000의 군사와 7000의 기마병을 거느린 장군이 되었다. 샤자한은 특히 건축에 관심이 있어 아그라를 찬란한 도시로 재건축 하였으며 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겼다.
1612년 아르주마나드 바노 베굼(Arjumanad Bano Begum)과 결혼했으며 그녀를 뭄타즈 마할(Mumtaj Mahal)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죽으면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 하였는데, 1631년에 죽자 상당한 충격에 빠졌다. 2년 뒤 그는 약속했던 대로 하얀대리석의 꿈으로 불려지는 타즈마할을 건축했으며 그것은 세계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로 불리게 되었다.
아내의 죽음이후 국정에 뜻이 없는 샤자한은 형제들을 살해한 막내아들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하고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이란 딸과 함께 아그라 성의 ‘무산만 부르즈(Musamman Burj)’유폐되었다가 1666년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알려진 것과 같지 않게 ‘마지막 소원이 자신의 사랑과 함께 뭄타즈 옆에 묻히는 것’이라고 하여 시종들에 의해 타지마할의 뭄타즈 옆에 묻혔다.
샤자한의 부인 뭄따즈 마할 (Mumtaj Mahal 1592 - 1631)
그녀의 이름은 아르주마나드 바노 베굼(Arjumanad Bano Begum)이며 19살에 왕자 샤자한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야민우다울라 아사프 칸으로서 그는 자항기르의 낮은 직위의 관료였으나 딸이 샤자한과 결혼한 후 샤자한이 왕위에 오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뒷날 수상의 직위까지 오른다.
그녀의 독특한 매력과 진실에 반한 샤자한은 뭄따즈 마할 (Mumtaj Mahal)이라고 불렀다. 샤자한과 18년의 결혼 생활동안 남편을 도와 많은 행정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했고, 사회 복지 활동을 하여 국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14째의 해산에서 심각한 병을 얻었는데, 이때 샤자한은 ‘칸 자한(Khan jahan)’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뭄따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딸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에게는 샤자한을 잘 보필할 것을, 샤자한에게는 재혼하지 말 것과 아이들을 잘 돌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1631년 6월 17일에 사망했으며 그때의 나이 39살 이었다. 뭄따즈의 죽음에 온 제국이 수의를 입었고 애통해 하였다.
샤자한은 뭄따즈의 유언을 지켰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뭄타즈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다고 한다. 지금도 타즈마할은 금요일에는 왕을 위해 개방하지 않는다. - 전에는 무료로 개방했었다고 한다.- 딸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도 어머니의 유언을 받아 샤자한이 죽을 때 까지 같이 있었다.
6대 아우랑제브 (Aurangzeb, 재위 1658 - 1707)
무히우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Muhiuddin Muhammad Aurangzeb)는 1618년 도하드(Dohad)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학업에 열중하여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경전학자가 되었다. 1637년 ‘딜라스 바노베굼(Dilras Bano Begum)’이라는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을 했으며 1649년과, 1652년에 칸다하르를 정복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으나 실패를 했다. 이후 샤자한은 그의 직위를 빼앗고 데칸의 ‘수베다르’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고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아우랑제브는 1655년부터 1706년까지 51년간의 통치기간에 확고한 수니 무슬림 신자로서 다른 종교에 대하여 무척이나 배타적이었다. 힌두교에 대하여 자지야(Jazia)라고 부르는 종교세를 부과하고, 마투라(Mathura)와 바라나시(Varanasi)등의 유명한 신전들을 파괴하여 회교사원을 건축했다. 힌두인들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으며 시크교(Sikh)의 구루(Guru)인 태그바하두루(Teg Bahaduru)와 고빈드씽(Gobind Singh) 그리고 두 아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산채로 매장했다. 이런 혹독한 종교정책의 결과 시크교와 힌두교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무굴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707년 90살의 아우랑제브가 아흐마드나가르(Ahmad Nagar)에서 죽은 이후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 ‘쿨다바드’에 묻혔다. 아흐마드나가르(Ahmad Nagar)는 이후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다음은 핑크시티 자이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