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24 아그라의 아그라 포트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7월 30일(토요일)
붉은성 아그라 포트
아그라 포트(Agra Fort)로 가기위해서는 서문(西門)으로 나가야 한다. 서문 밖에는 소지품검사를 받기 위한 입장객의 줄이 남문보다 더 긴 것 같았다. 문밖에 마련된 주차장, 기념품 판매소 같은 것을 보아도, 남문 보다는 서문이 더 번잡한 것 같았다. ‘퉁가’라고 불리는 말마차를 타고 아그라 포트(Agra Fort)로 갔다. 타지마할에서 아그라 포트까지의 길은 아그라 시(市)의 다른 길과는 달리 매우 깨끗하고 넓게 정비되어 있다. 양쪽으로 가로수도 운치 있게 늘어져 있고, 길을 달리는 자동차들도 깨끗하였다. 사실 타지마할을 중심으로는 오토릭샤도 전기로 움직이는 ‘일렉트렉 릭샤’를 운행 시키고 있다. 물론 깨끗한 아스팔트위에 퉁가를 끄는 말들이 덩이덩이 싸놓은 말똥이 있지마는.
아그라 포트(Agra Fort)는 하나의 관광지로, 부근에는 관광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또한 손에손에 물건을 들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관광객들 보다 조금 더 많이 있지만. 아그라 포트(Agra Fort) 또한 250Rs의 입장료를 받으며, 소지품 검사를 하였다. 그러나 왜 그런지 소지품을 보자고 말만 하고 그냥 들어가라 한다.
해자로 둘러 싸여있는 ‘아그라 포트’ 인도에서 만나는 성들은 대부분 붉은 색의 돌로 지어져 ‘붉은 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16세기 몽골의 후예인 바부르(Babur)에 의해 이슬람대제국인 ‘무굴제국’이 건설되고 나서, 위대한 악바르(Akbar)황제는 수도를 아그라로 정하고 아무나 강가에 이 성을 쌓았다. 아그라 포트(Agra Fort)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 지어지기는 전투를 위한 군사들의 성채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城)을 둘러 흐르는 해자(垓字)를 건너야 한다. 그러나 아그라 전성시대에 황제 ‘샤 자한(Shah Jahan 1627∼1658까지 30년간 재위)’은 이 성을 자신의 왕자들을 위한 궁성으로 개조를 하였다고한다. 그래서 호화스러움을 더한 접견실 ‘디와니 암(Diwani Am)’과 귀빈들을 위한 휴식공간인 ‘디와니 카스(Diwani Khas)’, 이슬람 모스크인 ‘모티 마스지드(Moti Masjid)’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은 1631년 출산 중에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마할이 죽자, 더 이상 아그라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것 같다. 그는 타지마할 건설을 시작하며 1638년 수도를 델리로 옮겼다. 그 뒤 1658년 막내아들 아우랑제브(무히우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Muhiuddin Muhammad Aurangzeb) 1618 ~ 1707, 재위 1658∼1707 50년간)에 의해서 폐위되어 8년 동안 아그라 포트(Agra Fort)의 ‘무산만 부르즈(Musamman Burj)’라는 곳에 유폐되어 있다가 1666년 죽었다고 한다.
타지마할의 성벽이나 아그라 포트(Agra Fort)나 모두 붉은색의 돌을 다듬어서 지었다. 인도에는 특히 붉은색의 돌이 많이 나는지 인도에서 본 많은 성(城)들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긴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며 몇 개의 문을 거치면 넓은 정원이 나오는데 성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서를 구할 수 없어서 되는대로 찾아가다 보니 일관성 없이 구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로(迷路)같이 얽힌 내부의 길이나,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들은 이 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하는데 이의(異意)를 달 수 없을 만 하였다. 특히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몇 개의 관망탑(觀望塔)에서의 경치는 정말 일품(逸品)이었다.
산이 없는 아그라에서 아그라 포트는 그래도 높은 위치에 속한다. 전망탑에 오르면 아그라 시내 전부가 눈에 들어오며, 야무나 강을 따라 멀리 타지마할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궁궐(宮闕)의 장식은 그 수법이 타지마할의 묘역(墓域)에서 본 것과 다를 바 없는 흰 대리석에 보석을 상감한 것이었다. 그러나 밝은 곳에서 봐서 그런지 타지마할 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흔히 가이드북 같은 곳에서는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의 마지막 삶을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悲運)의 황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은 언젠간 물려주게 되어있고, 당시 ‘무굴제국’이 세계 최대의 제국 원(元)의 영향을 받은 나라라면 왕위의 승계도 ‘가장 힘 있는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元)의 스타일을 계승했을 터이니, 힘 있는 ‘아우랑제브’가 왕위를 차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용히 흐르는 야무나강과, 그 강변에 세워진 타지마할을 잘 관망(冠網)할 수 있는 이곳에서 왕위를 물려준 ‘샤 자한(Shah Jahan)’은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마할’과 영혼의 대화를 원(願)없이 나누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삶의 마지막을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면 결코 불운(不運)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물론 다른 곳에 보면 ‘샤 자한(Shah Jahan)’은 강 건너에 검은색으로 타지마할과 똑 같은 자기의 묘역을 건설하고 두 곳을 다리로 잇고자 했었다고 하는데, 그 계획에 황제의 생각이 얼마나 진실되게 들어있는지 확인 할 수는 없다. 나 같은 소시민적인 마음으로는 아내 곁에 묻히기를 더 원했을 텐데…
궁전으로 사용된 아그라 포트는 화려한 모습으로도 타지마할에 뒤지지 않는다. 타지마할과 같이 대리석에 값비싼 보석으로 상감을 넣었다.
타지마할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보석 상감무늬
아직도 남아있는 금을 넣어 무늬를 만들었던 흔적, 타지마할에 비해서는 관리가 소홀한지 파손된 흔적이 많이 보였다.
사이클릭샤를 타고 타지마할 서문(西門)으로 돌아왔다. 릭샤꾼은 종민이보다 두 세살 정도 더 먹은 소년이다. 대부분의 ‘사이클릭샤 왈라’들은 나이가 많은데 - 최소 40이상 보통은 60정도 되 보인다. - 어린 아이는 처음이다. 힘이 있어 잘 달리기는 하는데 릭샤 운전에도 요령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샤워한 후 식사를 하러 ‘티벳키친’으로 갔다.
티벳음식중에 ‘모모’라 불리는 음식은 우리의 만두와 거의 같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티벳식당의 ‘모모’를 추천한다. 우선 틀림없는 ‘까우Caw'고기라고 주장하는 ’고기모모‘를 주문했다. 2층이랄까 옥상이랄까한 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모모‘를 기다렸다. 이 남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로터리에는 옆에는 ’굴산로지‘ 건너편에는 ’조이플레이스‘등 한국인이 잘 가는 식당들이 있다.
‘모모’, 왜 티벳의 모모가 한국의 ‘만두’와 비슷할까? 이미 바라나시에서 ‘뚝바’를 경험해 보았는데. 한참뒤에 주인이 직접 들고 온 ‘모모’는 깍두기 같이 썰은 삶은 고기를 밀가루반죽으로 싸놓은 것이었다. 정말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던 ‘모모’일까? 아니면 ‘티벳키친’이란 식당에서 처음 만들어본 티벳 음식일까? 여러 가지 의문 속에 얼마 되지 않는 1인분의 ‘모모’마저 다 먹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주변의 기념품가게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 어느 것이 기념품인지 알 수 없었다. 환전을 하러 간 상점에서는 환전은 뒷전이고 목걸이 반지 등 악세사리 기념품만 내어 놓는다. 거의 다 보석들이 박혀 있는데, 진짜 값어치 있는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 물건들의 대부분이 새 물건이 아니라, 때 끼고 찌그러지고 한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것이었다. 마치 몇 백년 전 누군가가 사용하던 골동품(骨董品) 같이…
아그라의 특산이라는 대리석(大理石)으로 만든 물건들은 기념품으로 구입 할 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지마할에서 본 것 같이, 대리석에 상감(象嵌)을 넣은 흰색 보석상자는 주인의 말과 같이 대리석이 아니었다. 주인은 틀림없는 대리석(大理石 marble)이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연약한 활석(滑石 talc)이었고, 진짜 대리석을 내놓으라고 주문하니 쑥색의 상자를 내놓는다. 대리석은 여인네 살결같이 희고 매끄러워야 제 맛인데 이것은 아주 하급품(下級品)이다. 게다가 값은 왜 그렇게 비싸게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열개를 제값에 팔아서 나오는 이익보다, 한 개를 비싸게 팔 작정인 것 같아 손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그라 포트에도 있는 ‘별 무늬’ 흔히들 이런 무늬를 ‘시온의 별’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왜 이슬람교의 장식으로 있는지?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혹은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인도(타지마할)=金鍾冕·金明國특파원]의 글 -인터넷에서
중앙으로 길게 뻗은 분수의 물에 어린 타지마할의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분수를 지나 샤 자한과 황비의 유해가 묻힌 타지마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레이스 모양의 격자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오는 부드러운 빛이 신비한 기운을 더해줬다. 본당 한 가운데에는 투조(透彫) 대리석 칸막이로 둘러싸인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의 빈 분묘가 놓여 있다. 진짜 관을 보기 위해서는 본당 대리석 마루 밑으로 내려가야 했다. 정원과 같은 높이의 6평 남짓 한 지하 납골당에는 1층의 모조관과 똑같은 모양의 석관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1층의 호화로운 전시용 관과는 달리 그것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어 초라함마저 안겨 줬다. 샤 자한은 철저한 회교도였다. 그의 치세 때는 가혹할 만큼 이교도를 배척 했다. 건물도 물론 이슬람풍 일색이었다. 그러나 타지마할에는 이슬람과 힌두 두 문화가 절묘하게 혼합돼 있다. 아라베스크나 갈매기형 무늬, 그리고 창과 문 테두리의 뾰족한 아치는 이슬람색을 짙게 풍긴다. 그런가하면 벽면에는 힌두교의 만신상(萬神像)이 가득 조각돼 있다. 타지마할은 기단부(基壇部)의 크기가 사방 95m, 본체는 사방 57m·높이가 67m에 이른다. 또 네 귀퉁이의 탑도 높이가 43m나 되어 남성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웅장한 규모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타지마할은 어느 건축물보다도 여성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후미진 앨코브(alcove)의 벽에 상감기법으로 아로새겨진 갖은 형상의 꽃문양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타지마할은 1631년부터 짓기 시작,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됐다. 2만명의 기술자와 노동자가 인도는 물론 아시아와 멀리 유럽으로부터 동원됐다. 인도의 라자스탄에서 채취한 대리석, 중국의 비취, 버마의 루비, 다마스커스의 진주, 터키산 옥 등이 건물 장식을 위해 운반됐다. 이 타지 마할을 완성하는 데 4천만 루피의 돈이 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뒤 공사를 맡은 장인들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한다. - 물론 기자니까 제대로 보고 썼겠지요…
* 다음은 잠간 외도를 하여 ‘무굴제국의 역대 왕’을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