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18 카주라호 동부사원군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7월 26일(화요일)
카주라호에서 바라나시 가는 길
5시 30분 일어나 버스 스탠드 쪽으로 나갔다. 히끄므레한 여명(黎明)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개, 소, 그리고 우리들 밖에 없었다. 큰 도시의 릭샤들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데 비해 카주라호에서는 릭샤의 그림자도 없다. ‘동부사원에 가서 일출을 보겠다.’는 계획은 야무진 꿈으로 돌아갔다. 잠시 서성거리고 있으니 저 멀리 사이클릭샤 한대가 출근?을 한다. 소리쳐 불러 동부사원으로 갔다.
동부사원을 가기 전 게스트하우스에서 앞선 한국인이 써 놓은 메모를 보았다. 동부사원에 가면 사람들이나 어린 학생들이 가이드를 해 주고 나중에 학교를 구경시켜 주며 ‘기부금’을 요구한다고 한다. 기부금 명단에 보면 앞선 사람들이 100달러 500달러 이렇게 써 놓았는데 전혀 상관하지 말고 무시하라고 써 있다. 또한 여성들은 한두명이 가지 말고, 남자와 같이 가던지, 여럿이 가라고 충고한 글이다.
자인교의 16대 ‘터탕기르’의 입상(入相) 4.5m의 크기
과연 동부사원에 가니 첫 번째 사원 입구에 서너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여기가 샨띠나뜨사원.’이라고 알려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들어가도 된다’고 당연한 소리를 한다. 그러며 쫓아 들어와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첫 번째 사원은 자인교 사원으로 많은 양의 조각과 불상 그리고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자인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사두들의 사진이 있다. 두 번째 ‘아디나뜨’ 사원으로 가는 길에 담 밖으로 학교 같은 건물이 있었으나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척은 없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에 나오는 학생이 있을 수가 없다. ‘아디나뜨’ 사원과 ‘빠르스바나뜨’ 사원은 자인교와 힌두교가 혼재된 사원으로 앞서 본 서부사원군의 사원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단지 그 규모나 조각상의 수준이 조금 떨어질 뿐이다. 그 외 입구쪽으로 나오며 작은 부속건물 같은 것들이 있었으나 수리를 많이 하였다던가하여 보지 않고 나왔다. 앞에 ‘자인아트뮤지엄’이 있다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나,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기다릴 만한 흥미도 없어서 동부 사원을 떠났다. 세 개의 사원을 모두 보는데 불과 몇 십분 걸리지 않았다. 특별히 사원에 관심이 있거나, 또는 필요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구태여 들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도에 보면 동부사원군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에 남부사원군에 속하는 ‘두라데오사원’이 있다. 릭샤왈라와 10Rs를 더 주기로 하고 이 사원을 들렀다 가기로 했다.
동부사원군 칫트라굽다 사원안의 자인교 사두의 사진, 의복을 입지 않는 사두를 ‘공의파’ 사두라고 하며, 그는 평생 쇠 솟단지 한 개와 쓸이개 빗자루 하나로 모든 소유를 삼는다. 극도의 무소유를 주장하는 청렴한 수행을 실행한다.
두라데오 사원은 강(江)이라고 부르기에는 낮 간지러운 개울(川)가 밭 가운데 덩그마니 자리 잡고 있다. 시기적으로 카주라호 사원들 중 가장 늦게 조성된 사원이라고 한다. 부근은 밭으로 개간되었으며 입구와 사원 주변만 잔디를 심어놓았다. 크지 않은 사원외부에는 서부사원에서 본 것 같은 조각상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카주라호 사원들의 특징인 ‘미투나 상’도 조금 있다. 신성소의 천녀(天女) 압살라상(像)이 이 사원의 백미(白眉)라고 하는데 이미 ‘앙코르 왓’에서 아름다운 ‘압살라’를 봐서 그런지 큰 느낌은 없었다. 전체적인 모습이랄까 조각상들은 서부사원과 같고 뛰어난 것은 없다. 따라서 일정이 빠듯한 사람들이라면 역시 생략해도 좋을 듯한 사원이다.
날씨는 계속 ‘살인적인 더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다시 침대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꼼짝 못하고 있다가 12시에 겨우 일어나 고향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식사를 주문했는데 종민이 것을 주문할 때 깜빡 잊고 ‘계란이 들어가면 빼 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음식을 돌려보내고 다시 주문해야 하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저녁에 먹을 토스트 2인분을 주문해 포장해 가지고 나왔다.
가네샤는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신상인듯, 카주라호 사원군에서도 가네샤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신상중의 하나다.
사트나로 가는 버스는 2시 버스와 3시 버스가 있으며, 사트나에서 기차는 7시 45분 출발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2시 버스가 안정적이라 사트나로 가는 한국학생들은 거의 2시 버스를 타고 갔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버스표를 예약하니 ‘2시 버스는 로컬 버스로 불편하다. 3시 버스가 딜럭스 버스로 편안하니 3시 버스를 타고 가기를 권한다.’라고 했다.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겠느냐?’니까 문제없단다, 그러나 버스 스탠드에서 3시 출발 버스는 여러번 독촉을 받고 3시 15분에 출발하였다. ‘우리는 기차표를 샀다. 기차를 타야한다. 빨리 가자.’라고 말해도 ‘문제없다’는 인도사람들의 특유의 말만 들었다.
처음에는 꽤 빨리 가는 듯 했다. 어떤 때는 추월 경쟁도 벌리고, 좁은 길에서 운전수는 계속 경적을 울리며 잘 가더니만, 어느 곳에 가서는 영 ‘아니올씨다’였다. 한 시간 가량 평지를 달리던 버스는 언덕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한참동안 내려가 계곡 밑바닥에 닿더니 이번에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런 운행을 계속 하면서 조금씩 해발고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카주라호를 빠져 나가는 방법은 다시 ‘잔시’로 가서 기차를 타는 방법과, ‘사트나’로 나가는 방법이다. 사트나쪽을 선택하면 거리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카주라호에서 사트나까지 거리는 약 120키로 정도로 나와있다. 그러나 사트나 쪽은 도로가 험하다. 또 중간에 엄청난 홍수로 도로와 농토와 가옥이 쓸려 나간 곳이 있어 그곳을 지날 때는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는 도로가 우리 버스가 갈때까지 견디어 주기를 바랄 뿐 이었다. 그래서 두 도시를 갈때 걸리는 시간으로 보면 불과 1시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느 곳인지 모를 시골 마을에 차를 세우더니 이번에는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한다. 운전수는 가끔씩 버스 근처에 와서 곧 떠날 것 같이 시동도 걸어보고 했지만 결국 30분 이상을 정차해 있다가 출발했다. 그러는 가운데 처음에는 기차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더니 점점 시간이 빠듯해 온다. 주위는 어두워오고,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상황에 - 인도는 도로 이정표가 거의 없다. - 앞서 연착(延着)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찍 오는 기차를 경험했던 터라 몸이 달았다. 드디어 7시 10분을 조금 넘어 차를 도로 한켠에 세우더니 ‘사트나’ 내리라고 한다. 정신없이 내리니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버스 지붕에 올렸던 배낭을 꺼내 준다. 아마 기억했다기 보다 외국인 여행자는 우리뿐이니 당연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별로 흥정할 여유도 없이 오토릭샤를 타고 사트나 역으로 갔다. 역은 릭샤를 타고도 꽤 가야 할 정도의 거리였다. 도저히 걸어서 갈 거리는 못되었다. 역 앞에 내리니 30분이 조금 못 되었다. 물어물어 플랫홈을 찾아가 기다리려니 우리학생 10여명이 먼저 와서 인사를 한다. 이들은 2시 버스를 타고 나온 학생들로 역 앞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고 한다. 한국인이 뭉쳐지니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바라나시로 가는지 - 사실 이 시간에 기차를 기다린다면 바라나시 가는 기차 밖에 없을 테니까. - 역무원이 오더니 ‘바라나시행 기차가 이곳이 아니라 옆 플랫홈으로 조금 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플랫홈을 옮겨 기다리다 기차를 탔다.
우리자리는 두개가 마주 보는 윗칸(업퍼)자리다. 그중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자리였다. 내 자리 바로 아래는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와 인도인 할아버지가 있다. 이 인도인은 나이 육십이 조금 넘었을까 한데 작은 체구지만 골격이 굵직한게 여간 성깔 있고 난폭하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큰 눈에 힘을 주어 사방을 경계하는듯 항상 두리번거렸다. 같이 동행하는 여자는 20전후쯤 되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에 체구가 작았다. 손가락마다 화려한 반지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발가락에도 몇 개의 반지를 끼고 있고, 또 붉은 색으로 발에 그림도 그렸다. 세살 정도되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있는데 눈치로 보아서 그녀의 아들인 듯 했다. 인도남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여자가 조금만 자세를 흐트리거나 하면 눈을 부라리며 쥐 잡듯이 한다. 내가 뭐 어떻게 할까봐 그러는지 무척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아 밤새 편하지 않았다. - 맨 아래 의자 밑에 놓아둔 짐이 잘 있는가를 보려면 고개를 빼서 아래를 내려다 봐야 하는데 그때마다 이 여자를 볼 수밖에 없다.
몽골리안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신상을 찾다 겨우 발견한 신상(神像) 과연 가이드북에서 말하고 있는 몽골리안의 얼굴인지는 자신이 없다
* 다음은 바라나시를 거쳐 사르나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