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05 뭄바이 엘리펀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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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의 인도로 가는 길-05 뭄바이 엘리펀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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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7월 20일(수) 유네스코 등록 세계문화유산 엘리펀트섬



종민이와 오늘 일정을 계획했다. 일단 우리의 목적지인 ‘엘리펀드’섬을 가는 것을 첫 번째로 했다. 앞선 사람들의 기행문을 보니 약 4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다음에 ‘웨일즈왕자 박물관’ 그리고 ‘봄베이대학’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곳은 모두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새벽부터 하늘은 비를 뿌린다. 그러나 비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변덕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단 게스트하우스 근처의 아침 식당을 물어 아침을 먹었다.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간다. 대부분은 짜이 한잔에 짜파티 몇 장, 또는 카레 같은 것 한 가지를 추가한다. 우리는 ‘탈리’와 버터난 등을 주문했는데 결과는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비하여 그렇게 먹지 못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짐을 꾸려 체크아웃 했다. ‘래귀지 패킹’서비스를 부탁하자 돈을 내라고 한다. 그것도 짐 한개당 30Rs씩이나 내라고 한다. 자기 집에서 숙박(宿泊)한 손님인데 이런 서비스도 못해 주냐! 항의를 해도 소용이 없다. 싫으면 가지고 나가라고 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 까말맨션에 있는 이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예정이라면 다른 곳으로 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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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의 얼굴 ‘인디아 게이트’와 ‘타지마할 호텔’




잠깐 비가 그친 사이에 인도문 까지 걸어갔다. 벌써 먹이를 발견한 삐끼가 달려온다. 엘리펀트섬 왕복 110Rs, 어제 보았던 인도 문 앞쪽의 선착장은 오늘 파도가 세어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가장 안쪽에 있는 선착장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출발 시간을 물어보니 한 15분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묻고, 또 대답해준 말을 믿은 내가 아직도 인도를 모르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인도인의 대답은 아무런 의식이 없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을 뿐 인 것 같다. 그러니 책임이란 것은 당연히 있을 수가 없다. 30분이 지나도 배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까 15분 뒤에 간다고 했는데 왜 가지 않느냐 빨리 출발하자!’ 이렇게 항의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아까 그 말은 벌써 잊은 뒤니까?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뱃사람들을 다그친 뒤에야 10시 40분 경 배는 출발했다. 잔잔하지만 안개 속에 비가 오락가락하는 뭄바이 앞바다는 복잡하기 말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과 그 중간에 해상플랜트 그리고 뭄바이 항구 왼쪽으로는 해군기지가 있는지 그쪽으로는 군함이 보인다. 10여분 정도 가니, 마치 영화 워터월드에 나오는 난민(難民)들의 요새(要塞) 같은 것이 앞바다에 떠있다. 작은 섬 같기도 한 것이 처음에는 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완벽하게 생긴 시멘트 구조물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옛날에는 죄수들의 감옥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요즈음은 해군들의 기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석유 해상 플랜트를 조금 빗겨 지나가니 바로 앞에 있는 섬의 방파제 끝에 배를 댄다. 이때 한 여성이 큰 소리로 자기를 소개하는데 인도에서 여자가 이렇게 대중 앞에 나오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여자의 말인 즉 자기가 이 배의 공식 가이드이며 이제부터 ‘엘리펀트섬 안내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엘리펀트섬에 가는 ‘고급관광선’을 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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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섬에 오르면 만나는 ‘토이트레인’에서 이것을 타게하려고 배를 방파제 끝에다 정박시킨다.



배에서 내리니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방파제 끝에는 조그만 ‘토이트레인’이 대기하고 있다. 끝까지는 한 400m가량 될까.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가운데 트레인을 탄 사람들이나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게 된다. 조금 걸어가니 또 돈을 받고 있다. 명목은 ‘입도(入島)료’라는 것 같다. 섬에 상륙하는 대금이란다. 조금 더 올라가니 돈 받는 게이트가 또 한개 있다. 관광지 엘리펀트 동굴 입장료다. 이제 부터는 산 중턱에 있는 동굴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 모두 계단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옆으로 물건 파는 사람들의 좌판이 이어져 있다. 올라가는 거리는 약 10분이 못되는데 의자를 대나무로 고정하여 네 사람이 메고 갈 수 있도록 한 교자(轎子) 같은 것이 있다. 올라가기 어려운 사람이 이용하는 것 같은데 그 요금은 알아보지 못했다.


드디어 한구비만 돌아가면 동굴이 되려는 순간.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돈을 받는다. 이름하여 고고학 발전기금인가 뭐 문화재 보호기금인가 하는 것이다. 무조건 250Rs 미국 달러로는 5달러를 내야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15세 미만은 이 요금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종민이는 내지 않는다. 그러나 섬에 도착해서 모두 네 번 돈을 내자니 화가 나기도 했다.


엘리펀트동굴은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가장 번듯하게 입구가 눈에 띄는 것이 중앙동굴이다. 이 동굴의 좌우로 부속의 동굴인 듯 작은 동굴이 있는데, 이 좌우편의 동굴은 밖에서 보아서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즉 출입구는 우선 중앙동굴을 통하여 들어간 다음, 중앙동굴의 현실에서 좌우편으로 나누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우편의 동굴은 입구에 물이 떨어지고, 왜 그런지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중앙동굴의 전실 좌측으로 나가면 좌편의 동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작은 광장이 나타나는데, 그 광장도 바위를 파서 만들었는지 바닥이 온통 바위며, 광장의 중심을 표시하는 둥근 원이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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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섬의 상징이다 시피한 뜨리무르띠(Trimurti 三面相 도는 三位一體상)-브라흐마 시바 비쉬누의 얼굴을 조각했다고 하는데 이 신상의 높이는 5m가 넘는다고 한다.



중앙 동굴의 입구는 우리가 흔히 그림책에서 보는 서양 신전의 입구와 같이 생긴 것으로 보아, 앞으로는 ‘서양(西洋)’이란 말을 빼어야 겠다. 아래는 네모나고 위쪽은 둥글며 적당히 배가 부른 기둥이 6열로 벌려져 있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줄지어 7열인가를 서 있는데 약 300평가량 되는 공간을 웅장하게 천정의 들보를 받치고 있다. 기둥은 중간 아래쪽은 사각형으로, 위쪽으로는 원형으로 멋을 내고, 호박 같은 파임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있다면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양인(東洋人)의 전통적인 사고를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인도의 이 양식은 서양의 건축기법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다. -


한 점의 인공조명도 없이 입구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빛에 의지해선 동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제부터 석굴에 대하여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상식(常識)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의 석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이 상식을 어떻게 한 순간에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참 어려웠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석굴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커다란 공동(空洞)의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무엇인가를 깍고 조립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공간이 존재하고 있고, 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둥이 필요한 것이고, 또 이미 벽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장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엘리펀트섬의 석굴부터는 이러한 상식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공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공간을 만들고, 벽을 만들고 장식을 만든 것이다.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기둥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둥이 그 자리에 있어야 공간이 공간다워지기 때문에 만들어 진 것이다. 즉, 전체적인 공간 설계가 이루어져야 석굴을 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석굴의 필요성이 먼저 결정되어야 석굴의 설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엘리펀트섬에 석굴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완성된 석굴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었을까?


인터넷 자료에서 보니 석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한 가지는 예배(禮拜)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석굴과, 또 다른 것으로는 거주(居住)와 수련(修鍊)의 장소로서의 석굴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엘리펀트 석굴은 두 가지 중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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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자의 파괴흔적이라고 하는 신상, 총탄에 의해 파괴된 자국과 낙서라고 한다



엘리펀트 석굴의 조각상들은 많이 파괴되어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사실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있다. 그것은 이곳을 처음 발견한 포루투갈 군인들이 이 석굴의 조각상을 대상으로 사격연습을 하는 등 파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부는 외세의 침략에 돌릴 수 있지만, 엘리펀트섬 자체가 뭄바이 앞 바다에 있을 뿐 아니라, 산중턱에 넓게 열려져 있는 석굴의 입구는 자연적인 풍화작용(風化作用)을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도인 자체가 그렇게 이 석굴의 자원을 보존하려고 않았었을 것 같다. - 이것은 인도인을 깔보거나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다른 유물들을 보면 인도인들 자체가 그것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은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유적보호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풍화작용으로 약해진 조각상에 무심코 손을 댄다면 쉽게 파괴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조각상의 파괴된 부분들이 부서지기 쉽게 조각된 팔다리 부분과 얼굴부분 등인 것을 보면 그렇다.


또한 벽면의 조각상들은 처음의 모습에서 마모(磨耗)가 많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것은 꼭 파괴된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조각의 섬세한 맛이 우리의 조각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서로 표현하려고 하는 예술성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조각상의 재질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조각품 속에서 많은 표정을 읽어낼 수 있는 우리의 조각예술과는 달리, 엘리판트섬의 조각은 한 가지 표정만을 확실하게 전달하고자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동굴 안쪽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검은색의 ‘링가’상을 모시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석굴은 ‘시바’신에게 바쳐진 사원인가? 그 왼쪽 - 동굴의 중앙부분 -에는 상반신의 삼면상(三面相)이 크고 장엄하게 조각되어 있어 이것이 이 석굴의 주신(主神)인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의 정면 상 옆에 두개의 측면상이 있는 조각을 누구의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심히 고민스러웠다. 물론 가이드가 있었으니 물어보면 좋으련만. 혼자 생각 끝에 ‘브라흐마’상이 아닌가 짐작하였다. 그것은 ‘브라흐마’는 창조주로, 혼자만의 사원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다른 신을 모신 사원에 빠지지 않고 모셔져 있는 것이며, 또한 브라흐마의 모습은 네개의 얼굴(四面相)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라고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와 ‘100배’를 보니 이러한 조각상을 ‘뜨리무르띠(Trimurti 三面相)’라고 부르며, 이 얼굴은 ‘브라흐마’ ‘비쉬누’ ‘시바’의 얼굴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이드북에도 ‘어느 얼굴이 어느 신의 얼굴인지’ 구분하는 구절이 없어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 였다. 자료에 의하면 이 ‘삼면 시바신 흉상은 그 높이가 약 5.5m가 된다고 한다.


중앙동굴의 사면(四面)에는 중요한 듯한 조각상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주요한 대상은 ‘시바’신상인데 각각 모습이 다른 것으로 보아 시바신의 상황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변에 데리고 있는 권속(權屬)들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신앙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동굴에서 특이한 조각상 중의 하나는 암소인지 황소인지 하여튼 소를 타고 있는 신상이다. 소를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바’신의 조각인 것 같다. 그러나 가슴이 도톰하게 강조된 것을 보거나, 허리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간 것으로 보면 여성적인 신으로 보인다. 과연 이 신상은 어느 신을 표현한 것인가? 시바신의 변형(變形)이라면 왜 여성적인 육체로 변형된 것일까? 또 다른 여신의 표현이라면 어찌하여 시바신이 자기만이 탈 수 있는 ‘난디’를 양보한 것일까?


좌측 동굴의 크기는 중앙동굴의 1/4정도다. 안쪽 가운데 신성소(神聖所)를 따로 만들고 그곳에 링가를 모셔놓고 있다. 그 외에는 중앙동굴에 비하여 조각상도 간소하고 화려하지 않다. 신성소는 매우 간결하고 간소하여, 신성소 앞에 호위하는 동물도 매우 간략하게 만든 해치(사자인듯)상이다. 신성도 뒤쪽으로는 바위를 다듬은 흔적이 매우 거칠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하게 석굴의 건축이 끝난 것이 아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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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신의 상징이라고 하는 ‘링가’ 엘리펀트섬의 링가는 다른 곳에 비하여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좌측동굴의 ‘링가’는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보통의 링가는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링가는 두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위쪽 부분은 보통의 링가와 같이 생겼지만, 매끈하게 잘 다듬어 진 것이 아니다. 세로줄의 홈이 파여져 있는데 인공(人工)을 가하지 않은 자연적으로 생긴 모습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래쪽은 사각형의 다듬어진 돌로 되어 있다. 생각ㅎ건데 이 링가는 자연적으로 생긴 링가를 모신 것 같다. 단지 그 길이가 짧아서 기술적으로 늘여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링가를 받치고 있는 ‘요니’또한 보통의 요니와는 다른 모습이다. 자연석을 비스듬하게 놓고 그것의 부분부분을 조금 다듬어서 요니를 만든 것이다. 결국 좌측동굴의 신앙의 대상인 ‘링가’와 ‘요니’는 자연에서 만들어진 그대로의 것을 모셔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엘리판트섬의 석굴사원을 하나로 본다면 중앙에 주굴(主窟)을 두고, 좌우에 부속의 굴을 만든 3굴형식의 사원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 굴은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어 구경하지 못했는데, 왼쪽 굴의 어느 부분은 시멘트를 사용하여 교묘하게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명이 없이 어두워서 제대로 구분해 내지 못했을 뿐이지 부분적으로 수리를 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이 동굴은 AD450~750년에 걸쳐 조성된 석굴사원이라고 한다. 이 시기의 인도라면 역사적으로 ‘굽타(Guptas)’ 왕조가 인도를 통일하고 대표적인 국가로 성장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굽타왕조 시대에는 문화예술이 많이 발전하여 우리가 흔히 ‘굽타양식’이라고 부르는 특징적인 조각품들을 만들었다. - 소위 불교조각상도 서양인의 모습을 기본으로 한 조각양식을 특징적으로 굽타양식이라고 한다 - 또한 ‘아잔타’석굴이 조성된 시기도 굽타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뭄바이는 굽타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원래의 섬 이름은 가라뿌리(Gharpuri)라고 불리웠는데 1534년 포르투갈 군인들이 이 섬에 상륙하고 나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엘리펀트’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우월한 문화를 자랑하고 싶어 했던 당시의 서양인들이 현지발음을 신경 쓸 일이 있겠는가? 자기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힘없는 나라의 설움 아니겠는가!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이 석굴 앞에 실물크기의 코끼리 상이 있었기 때문에 포루투갈 군인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이 코끼리 상은 지금 ‘빅토리아(Victoria) 공원 안의 박물관 앞으로 옮겨져 있다.’고 소개해 두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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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이 없어져 뒹굴고 있는 석재



석굴 앞에는 틀림없이 석굴에 사용되었던 부속품 일턴데 이제는 소용이 없어진 듯, 황폐하게 뒹굴고 있는 석재(石材)가 있어 마음이 애틋했다. 옛날에는 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나 보란 듯이 자기의 역할을 다 하던 것들인데, 뒷날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찾아 주지 못하고 한낱 쓰레기로 취급하고 있으니, 어제의 옥돌(玉石)이 오늘에 와서 쓰레기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 다음은 웨일즈왕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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