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6년만의 배낭 여행 #15 - 앙코르 왓 [두번째]
압사라- 다양한 표정을 지닌 크메르의 여인들
부조의 바다에서 헤엄치기
해자 밖에서 앙코르왓 전경을 볼 때 이미 감을 잡았다.
'아....여길 다 보려면 오늘 하루를 모조리 투자해도 부족하겠구나'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에서도 서둘러보면 3시간이면 둘러본다고 적혀 있는데 그러면서 붙어있는 말이 '체력적으로 여유가 없다면 제 3회랑의 우유의 바다 휘젓기 부조만큼은 꼭 보라' 아닌가. 그러니까 이 말인 즉 '마음 먹으면 다 둘러볼 수는 있지만 니 체력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중요한 것만 선별해보는 것도 한 방법' 이라는 뜻. 부실 체력하면 또 어디가서 뒤지지 않는 나인지라(...) 가이드북의 조언을 따르기도 했다. 그래, 너무 욕심내지 말고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자. 정 아쉬우면 내일 또 와도 되니까.
가이드북을 펼치고 지도를 보며 방향을 잡았다. 앙코르왓은 크게 사각형 네 개가 겹쳐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큰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이 하나 더 있고, 그 안에 더 작은 사각형이 하나 더 있다. 그 각 사각형 벽마다 다양한 부조 및 불상들의 볼거리가 있는데, 중앙에 마지막 사각형이 앙코르왓의 핵심 중앙성소이다. 잘 상상이 안간다면 러시아 인형 마트로쉬카를 떠올려보자. 큰 인형 안에 똑같이 생긴 작은 인형이 들어있고, 그 안에 또 작은 인형이 들어있는 바로 그 인형. 앙코르왓이 바로 그런 형태로 생겼다고 생각하면 된다. 단지 모양이 사각형일 뿐.
책에서는 오른쪽 그러니까 서쪽회랑 남쪽방면으로 꺾어 '쿠륵세트라의 전투' 부조를 시작으로 하여 건물을 한바퀴 빙 돌며 각각의 부조를 감상한 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건물 안쪽으로 한 칸 들어간 후 다시 한바퀴 돌아가고 이런 식으로 반복하여 중앙의 마지막 사각형, 즉 중앙 성소를 구경하도록 추천하고 있다.
몸을 오른쪽으로 꺾으니 거대한 부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보물찾기 시작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부조가 '쿠륵세트라의 전투' 중 일부분이다.
- 말의 갈기, 장식품부터 무기, 군인들 표정까지 압도적이란 표현만으론 부족할 정도로 세밀하다.
심지어 왼쪽 마차에 탄 군인은 적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까지 내밀고 있다. (아니 진짜로-_-;;)
'수리아바르만의 행렬' 중 왕비와 공주, 궁녀의 행렬
- 나무와 숲의 표현에서 장인들의 집념이 느껴진다.
괜히 보물찾기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니다. 보통 한 면에 100m가 넘는 길이의 벽면에 위의 사진과 같은 부조가 벽면 꼭대기까지 빽빽하게 채워져있다. 모든 부조들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고, 그 중 특히 중요한 부조들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는데 가이드가 없는 이상 내가 스스로 가이드북을 보며 그 중요한 부조들을 찾아보고 부조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해야한다. 첫 부조인 '쿠륵세트라의 전투'를 처음 봤을땐 그야말로 신이 났다. 가이드북이 설명하는대로 전투하는 크리슈나도 찾고, 카일라사 산을 뒤흔드는 악마왕 라바나도 찾았다. 입을 딱 벌린채 열심히 눈으로 훑으며 스토리를 짜 맞추는데 좀 있으니 박쥐 똥 냄새가 나서 입을 열고 있을수가 없었다. 흠....익숙한 냄새로군. 인도에 있을땐 박쥐가 참새처럼 날아다니는 동네에서 살았던지라 박쥐에 대한 공포감이 없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100 미터가 지나갔다.
그 다음은 '수리아바르만의 행렬'. 크메르 왕국을 통일시킨 수리아바르만 2세의 행렬 모습을 새긴 부조인데 이 부조에서 내 눈을 끈 건 이파리 하나 하나가 모두 다른 숲과 나무의 묘사. 그야말로 장인들의 집념이 느껴지는 부조들이었는데, 문득 이 부조들을 새긴 장인들에게도 계급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크리슈나나 왕, 또는 각각의 신과 같이 중요한 부조들은 경력 20년 이상의 인간 문화재급 장인들이 새기고, 그 밑에 잔챙이 군인들의 부조는 경력 10년 이상, 그리고 숲이나 나무 등의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반복되는 부조는 경력 10년 이하의 초짜(?)들이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나무 하나를 다 새기고 나면 다음엔 군인 두어명을 너한테 주마' 뭐 이런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이 벽면에 새겨진 부조들이 얼마나 많은 장인들의 땀과 노력과 분노(...)와 일생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작품인지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또 그렇게 100미터가 지나갔다. 부조 두 개를 보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계속 천천히 걷다가 서다가 하며 보다보니 벌써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벌써 이럼 안되지. 아직 600미터가 더 남았는데. 마음을 다잡고 다음 부조로 넘어가는데....아.....눈 앞에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드디어 나왔다. 앙코르왓 부조들 중 가장 쇼킹한 부조인 '천상과 지옥'
- 죄인들에게 소처럼 코뚜레를 해 가차없이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는 모습.
지옥에서 행해지는 형벌들
-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모습들 -_-;;
개인적으로 가장 끔찍했던 형벌
- 사기를 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영혼에게 쇠못을 박아 죄를 다스리는 지옥의 32개 형벌 중 하나
(출처: 도서 '앙코르왓,캄보디아'의 설명)
무지하게 찔릴 사람들이 요새 TV에 자주 나오던데 -_-
얘나 지금이나 위정자의 입장에서 가장 대중을 다루기 쉬운 방법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를 보면 명언이 나온다. 악당 팔코네를 찾아간 애송이 브루스 웨인에게 팔코네는 말한다.
"This is a world you'll never understand. And you always fear what you don't understand."
(여긴 네가 모르는 세계야.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선 언제나 공포심을 느끼지)
정치가들과 종교인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하여 대중을 다루어왔고 그 중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최고의 효과를 가져왔다.
'내 말을 들어라. 우리의 말을 들어라. 우리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넌 죽어 네가 모르는 세계에 떨어질 것이다. 네가 상상도 못할 고통이 있는 곳이지.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보여줄까?'
어느 세계의 어느 문화권에서든 지옥도에서의 형벌은 잔인하면 잔인할 수록 좋다. 사람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줄수록 사람들을 다루기는 더욱 쉬워진다.
그래서 성경에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인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고, 그리스 신화에선 신의 뜻을 거역한 이가 산채로 새에게 심장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고 이 곳 앙코르 왓의 벽화에선 산채로 온몸에 대못이 박힌다.
누가 그들의 말을 거역할소냐.
앙코르 왓 부조 중 백미 중의 백미 - 우유의 바다 휘젓기
나가(뱀)의 왕 바수키의 몸통을 비슈누가 잡고 양쪽으로 92명의 악마들과 88명의 신들이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다.
위쪽의 붙여넣기 한듯한 작은 인간들은 우유의 바다에서 태어난 압사라들.
우유의 바다 휘젓기 부조는 장대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부조 전체에 깔려있는 유머 감각이 대단하다.
- 1천년 동안이나 지속된 우유의 바다 휘젓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강이 나 죽은 물고기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해태처럼 생긴 생물들
소용돌이에 휘말려 만다라 산까지 가라앉는걸 막기 위해 비슈누 신은 거북이 쿠루마로 변신해 가운데를 떠받치고 있다.
- 비슈누의 화신임을 표현하는 귀여운 왕관이 포인트
위정자들의 야욕과 백성들의 애절한 바램과 (저 놈은 죽어서라도 벌을 받아야해!!), 장인들의 집념이 여과없이 드러난 '천상과 지옥'을 지나니 드디어 '우유의 바다 휘젓기'가 시작된다.
자세히 말하자면 길지만 요약해보자면 기나긴 전쟁에 지친 악마와 신들은 일종의 휴전 협정을 맺고 싶어하지만 서로가 불신하는 상황에서 먼저 협정을 요청하는 것조차 눈치보는 상황. 이 와중에 불노장생을 할 수 있는 명약 암리타를 우유의 바다에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된 신들은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암리타를 만들자고 악마들에게 제안하고, 이 제안을 거절하면 신들만 불노장생이 될 것을 염려한 악마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우유의 바다 휘젓기라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무려 1천년 동안이나 삽질을 하게 된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바로 이 부조의 내용.
이 이야기에서 최대 피해자는 나가(뱀)들의 왕 바수키인데 바수키는 자기 몸통을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밧줄 내지는 살아있는 숟가락 쯤으로 내주고 1천년이나 혹사 당하다 결국 마지막엔 너무나 힘든 나머지 푸른 독(이라 쓰고 마지막 진액이라 읽는다;;)까지 토해낸다. 이 1천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인상적인 사건은 역시 압사라들의 탄생. '물위에서 태어났다'라는 뜻의 압사라는 아름다운 천상의 무희. 이 1천년의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시간 동안 태어난 압사라가 무려 6억명이라 하니.....크메르인들은 힌두 신화를 받아들이며 인도인들의 장대한 뻥이야~ 정신까지 같이 받아들인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1천년에 6억명이면 1년에 60만명이고, 그럼 한 달에 태어난 압사라의 수가 5만명이란 소리. 당시 크메르 왕국의 1년 인구 성장률도 그정도는 안되겠다.;;)
하긴....기왕에 신화인거 스케일은 크면 클수록 좋은거 아니겠나. 어디한번 더 가보자.
'우유의 바다 휘젓기'를 지나니 '악마와 싸워 승리한 비슈누'가 나오고 '그 뒤를 이어 악마 바나에게 승리한 크리슈나'가 뒤를 따른다. 이쯤되니 벌써 2시간 가까지 시간이 흘렀다. 발바닥이 저리고 다리가 아파와 어디 한 군데서 쉬었다 오고 싶은데.....일단 이 부조 탐방을 시작하면 중간에 쉬는 시간이란 없다. 사각형 벽면을 빙~ 둘러싼 부조의 총 길이가 800 미터가 넘다보니 어디가서 쉬었다 다시 찾아오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휴게소와 같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중앙의 유적지에서 벗어난 외곽에 자리하고 있어 갔다가 다시 오는 것도 움직이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 즉, 죽으나 사나 이 부조들을 다 감상 해야만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 셈.
오냐 해보자. 흘러내리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다시 부조 탐방을 시작하는데......
더이상 기억이 없다. -_-;;
꽤나 힘들었던지 분명 한바퀴 다 돌아 8개의 부조들을 모두 감상했는데 자세한 기억도, 사진도 없다. 그렇게 여행 내내 그렇게 열심히 찍어댄 사진이 뚝 끊어진거 보면 이 후부터는 허기와 피로에 지쳐 카메라 들 힘도 없었던 모양.(허허;;) 그러고보니 가이드북에서 참배로를 중심으로 왼쪽이 아닌 오른쪽부터 돌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차피 세세하게 보며 한바퀴를 한 방에 다 돌기는 힘드니 그냥 제일 중요한 '우유의 바다 휘젓기'나 초반에 열심히 보며 기억에 남겨두라는 뜻이었던듯.
눈 앞에 빙빙 도는 군사들과 신들과 압사라들과...압사라들과....또 압사라들....을 애써 뿌리치며 식당으로 향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갈증에 목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물을 그렇게 마셔대도 화장실 한 번 안가고 싶더라.
식당이 저 앞에 보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빠르게 걸어오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올 게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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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보기 및 수정은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simplecode81)를 참고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