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자의 수어스다이 캄보디아(11)
- 뚜얼슬렝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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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수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거리로 나왔다.
숙소 앞에서 바라본 St. 136의 아침 풍경이다. 아침식사는 어디 가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숙소에서 해결했다. 오늘은 프놈펜 시내관광을 하는 날이다. 먼저 뚝뚝부터 섭외. 오전에 뚜얼슬렝 박물관과 킬링필드 기념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20불에 합의.
뚜얼슬렝 학살 박물관 (Toul Sleng Genocide Museum). 원래는 <뚜얼슬렝 쁘레아 고등학교>였던 곳을 크메르 루주가 제 21 보안대 본부 건물로 사용하면서 악명을 떨치게 된 곳이다. 입장료는 2불. 표를 구입하면 이곳을 설명하는 흑백 프린트를 준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기념비가 보인다. 그리고 뒤편에 보이는 것은 희생자의 무덤들이다. 사진의 오른쪽으로는 분향소와 기부함도 있다.
밖에서 보면 이렇듯 평범하고 낡은 학교 건물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상황이 다르다.
잡혀온 사람들을 심문하는 책상과 의자. 사람들은 철제 침대에 묶어 놓았는데, 침대 위에 놓인 것은 변기통이다.
이곳에 잡혀 온 사람들에게는 보안 수칙(Security of regulation)이 적용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내 질문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 거부할 수 없다. (You must answer accordingly to my question. Don't turn them away.)
2.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서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 마라. 네가 나와 논쟁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Don't try to hide the facts by making pretexts this and that. You are strictly prohibited to contest me.)
3. 너는 감히 혁명을 훼방하는 놈이니 바보로 있지 마라. (Don't be fool for you are a chap who dare to thwart the revolution.)
4. 너는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내 질문에 즉각 대답해야 한다. (You must immediately answer my questions without wasting time to reflect.)
5. 너의 부도덕함이나 혁명의 본질에 대해 내게 말하지 마라. (Don't tell me either about your immoralities or the essence of the revolution.)
6. 채찍질이나 전기고문을 당하는 동안 너는 절대 울지 말아야 한다. (While getting lashes or electrification you must not cry at all.)
7.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가만히 앉아서 내 명령을 기다려라. 만일 명령이 없으면 조용히 있어라. 내가 무언가를 네게 하라고 할 때, 너는 거역하지 말고 즉시 해야 한다. (Do nothing, sit still and wait for my orders. If there is no order, keep quiet. When I ask you to do something, you must do it right away without protesting.)
8. 너의 비밀이나 반역자를 숨기기 위해 캄푸차 크로민에 대한 핑계를 만들지 마라. (Don't make pretext about Kampuchea Kromin in order to hide your secret or traitor.)
9. 만일 네가 위의 규칙들을 따르지 않으면, 너는 전기줄 채찍을 많이 맞게 될 것이다. (If you don't follow all the above rules, you shall get many lashes of electric wire.)
10. 만일 네가 나의 규정들 중 어느 하나라도 복종하지 않으면 너는 10대의 채찍질이나 5번의 전기고문을 받게 될 것이다. (If you disobey any point of my regulations, you shall get either ten lashes or five shocks of electric discharge.)
* 혹시 번역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이것도 고문에 사용된 도구이다. 원래 크로스바에 있는 고리에는 줄이 매어져 있었고 이것은 학생들이 사용하던 운동기구였다. 크메르 루주는 수감자들의 팔을 뒤로 해서 줄에 묶은 다음, 줄을 끌어당겼다. 그러면 사람의 몸은 거꾸로 뒤집히게 되고 그들은 사람이 줄에 매달려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와 같은 고문을 자행했다. 이윽고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아래에 있는 오물이 잔뜩 들어있는 항아리에 사람의 머리를 집어넣어 의식이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면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사진. 사진 속의 주인공 뒤로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독방으로 생각되는 감옥이다. 이곳에는 학살이 자행되던 당시의 여러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인터뷰도 볼 수 있다. 물론 학살에 가담했던 주역들에 대한 소개도 있다.
- 킬링필드 기념관 -
마음이 무거워진 우리는 다시 뚝뚝을 타고 킬링필드 기념관으로 향했다.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뚜얼슬렝>과 달리 <킬링필드>는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다. 작열하는 열대의 태양 아래에서 한참을 달렸다.
드디어 입구. 쯔응 아익 학살 센터(Cheoung Ek Genocidal Center) 라고 적혀 있다. 여기는 프놈펜 근교와 뚜얼슬렝의 사람들을 고문한 다음 처형한 곳으로 8,900여 구의 시신이 집단 매장된 곳으로 지난 1980년에 발견되었다.
입장료는 5불. 표를 구입하면 헤드셋을 빌려주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우리말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렇게 각 유적에는 헤드셋 표시와 함께 번호가 붙어 있고, 녹음기에서 해당 번호를 누르면 설명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말을 하지 않게 되므로 보다 경건한 분위기에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사탕수수나무. 하지만 이것의 줄기를 보라. 검은색 부분을 자세히 보면 톱니처럼 날카롭게 되어 있다. 원래 캄보디아 사람들은 저것을 이용하여 닭을 잡곤 하였다는데, 크메르 루즈는 저것으로 사람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 호수는 크메르 루즈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매장된 곳이다. 따라서 저 물은 사실상 시체가 썩은 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캄보디아의 어느 원주민 아줌마가 저 호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허리 깊이까지 들어가서는 커다란 물통으로 저 물을 긷는 것이 아닌가... 물 한통을 가득 담더니 어깨 위에 걸머지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이 근처에 있는 논에 물을 가져다 붓는 모양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정수기의 물통이 10킬로그램이니 저 아줌마의 물통은 나무로 만든 물통의 무게까지 감안하면 30킬로그램이 넘어 보였다. 그런 무거운 물통을 들어서 어깨 위에 얹는 것도 대단하고, 우리는 학살의 현장이라고 견학하는 곳에서 물을 퍼다가 농사를 지어야 하는 그녀의 삶도 참으로 고단해 보인다. 그녀라고 “몰라서” 여기서 물을 긷겠는가?
평범해 보이지만, 내 기억 속에는 가장 끔찍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크메르 루즈 시절의 피해자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저 나무에 머리를 짓찧어서 죽이고, 지금은 울타리와 지붕이 있는 바로 옆의 웅덩이로 던졌다고 한다.
이것이 <보리수> 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석가모니는 바로 저렇게 생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학살의 현장에 서 있는 보리수... 정말 아이러니컬하니 않나?
기념관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위령탑이다. 크메르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의 높이는 80여 미터. 17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에는 해골을 전시해 놓았다. "17"이란 숫자는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으로 쳐 들어온 날이 1975년 4월 17일인데서 유래하였다.
위령탑 안에 있는 해골들이다. 킬링필드 기념관은 단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캄보디아 전역에서 학살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기념관은 곳곳에 있으며 이들은 모두 킬링필드인 것이다. 다만 그 중 이 기념관이 규모가 가장 큰 것일 뿐이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것은 이곳에서 수감자들이 겪은 생활이다. 낮에는 하루 종일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밤이 되면 처형이 이루어졌다. 따로 전기 시설이 없어서 발전기를 이용해 불을 밝혔고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갔다. 희생자들의 비명소리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밤낮없이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발전기 소리와 뒤범벅이 되고, 어둠 속에서 밝혀진 등불아래서 자행되는 잔혹한 학살들...
사족:
1) 뚜얼슬렝과 킬링필드를 보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저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알아야 합니다.
2) 9세기에 등장한 자야바르만 2세부터 시작된 크메르 제국의 융성은 13세기 초의 자야바르만 7세를 끝으로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여 이후에는 태국(아유타야 왕조), 미얀마(퉁구왕조), 베트남 등의 틈바구니에서 수도인 앙코르를 함락당하기도 하는 등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1863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됩니다.
3) 1953년 11월9일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합니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은 시소왓 모니봉 국왕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왕위를 아버지(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주고, 스스로 수상(지금의 총리)이 됩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여전히 시하누크였습니다. 시하누크 수상은 처음에 중립주의 외교노선을 걷습니다. 좌, 우 양쪽의 급진주의자들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캄보디아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에서 번영을 누립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동남아 공산세력과 제휴하게 되고 마침내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하기에 이릅니다.
4) 시하누크가 소련을 방문하고 있던 1970년 3월18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 장군이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고, 나라 이름을 <크메르공화국>으로 바꾼 후 스스로 대통령이 됩니다. 캄보디아가 친미국가인 크메르였던 시절에는 박스컵이라는 우리나라의 축구대회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당시 한국과 캄보디아의 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5) 권력을 잃은 시하누크는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합니다. 그는 이 시기에 북한에 머물기도 하는데, 김일성 주석이 망명객인 그를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나중에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프놈펜에 “모택동의 거리”, “김일성 대원수의 거리” 등의 이름을 붙입니다. 아울러 작년 12월 17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시하누크의 아들인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조전을 보내면서 “나와 나의 부모님은 김정일 최고지도자 원수 각하께서 서거했다는 소식을 가장 커다란 슬픔 속에 접했다”고 애도하며, 김정은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위대한 영도자 대장각하’로 극존칭 하였습니다. 또한 훈센 총리는 내각평의회 장관, 내무장관, 재무장관 등의 고위 관료 6명을 대동하고 직접 북한 대사관까지 “걸어가서” 조문하였습니다. 이렇듯 북한과 캄보디아의 관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6) 시하누크는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크메르 루주(Khmer Rouge)와 손을 잡습니다. “붉은 크메르”라는 뜻을 가진 크메르 루주는 농민을 가장 이상적이고 순수한 집단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국가의 목표도 <농민이 주인이 되는 이상국가의 건설>이었습니다.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크메르 루주는 시하누크의 인기에 힘입어 그 세력이 급성장합니다. 더욱이 베트남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미국이 동남아에서 발을 빼자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으로 진격하여 불과 48시간 만에 수도를 함락시킵니다. 이 날이 1975년 4월 17일입니다.
7) 론놀은 미국으로 도망가 버렸고, 크메르 루주의 동반자였던 시하누크는 왕궁 내에 유폐됩니다. 그리고 폴 포트(Pol Pot)가 권력을 잡습니다. 그는 캄보디아 내에서 반동세력에 대한 숙청을 시작합니다. 과거 론놀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와 군인 그리고 지식인을 처형했으며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농업국가 건설을 위해 농촌으로 강제 이주를 당합니다.
8) 시간이 갈수록 크메르 루주의 광기는 점점 심해집니다. 농업생산량의 목표를 “작년보다 3배”같은 식으로 비현실적으로 정한 다음, 사람들을 강제노동에 내 몰았습니다. 아울러 멀쩡한 사람들을 “KGB 또는 CIA의 첩자”로 몰아세워 처형합니다. 목표로 정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지도자와 간부도 처형하였습니다. 이런 현실에 공포를 느낀 크메르 루주의 군인들은 탈출하여 베트남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들 중에는 찌어 심, 훈 센(현 총리), 헹 삼린과 같은 정권의 실세도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9) 이들 탈출자들은 베트남에서 폴 포트 저항세력을 결성하고, 마침내 베트남군과 함께 캄보디아를 침공합니다. 1979년 1월 7일. 구국민족통일전선(NUFSK)은 베트남군과 함께 프놈펜을 함락하고, 크메르 루즈 잔당은 태국-캄보디아 국경의 남서부 산악지대로 도망갑니다. 이로써 크메르 루주의 시대는 끝납니다. 만 4년이 채 안 되는 동안에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명이 죽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