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향기로 다가온 태국(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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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향기로 다가온 태국(둘째날)

타논 2 1311

둘째날 (2006.10.4)

아침시장, 파쑤멘요새
그 동안의 여행 경험에서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은 시각은 현지 도착 후 다음날 이른 아침이다. 첫날은 도착 직후의 절차적인 문제로 시간과 정신을 빼앗길 뿐 아니라, 문화적 충돌의 시작으로 인해 평상심을 갖기 어려운 까닭에 찬찬히 관찰할 여유가 없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이미 현지인이 다 된 것 같은 교만함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으며 더욱 강한 호기심으로 똘똘 무장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날씨까지 받쳐준다면야.. 기고만장이다.

두터운 커텐을 열어젖히니 여명이 와락 밀려 들어온다. 빡빡하게 잡아놓은 일정에 마음이 급해진다. 시답잖아 보이지만 1,000 바트에 포함되었으려니 생각하니 먹어줘야겠다는 욕심이 일어 1층 레스토랑에서 폼잡고 아메리칸블렉퍼스트를 먹는데, 오픈식으로 된 레스토랑 밖으로 영업준비로 바쁜 길 건너편 노점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엔 이미 도시의 여러 소음이 한덩어리가 된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다.
끄라이시 거리에 어제 낮에 볼 수 없었던 재래시장이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친다. 좌판에 올려 놓은 형형색색의 열대과일과 수산물이 상인들의 열기를 닮아 싱싱해 보인다. 포장마차 식당에서 아침거리를 사는 사람들, 과일광주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과일을 썰어 비닐봉지에 담아 파는 행상 여인네들.. 시장 바닥은 하루를 준비하는 움직임으로 왁자지껄하다. 탁발을 나선 맨발의 주황색 승복을 입은 스님에게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아침 공양을 받치는 아낙네 모습이 참으로 경건하게 다가온다. 불심이 일상 속으로 건강하게 자리잡은 증거일 터인데..

동대문을 지나 사원 담벼락을 따라 가는 길은, 카오산 쪽과는 방음벽으로 완벽히 차단된 듯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들뜬 마음을 기분좋게 순화시킨다. 게스트하우스의 나지막히 엎드린 건물들과 넓은 보도블록이, 담을 따라 우거진 초록빛 수목들과 어우러져 더없이 평온한 느낌을 준다. 파아팃선착장 통로 계단과 잇대어있는 파쑤멘요새에는, 강 상류에 많은 비가 내린 듯 연신 계단을 핥아대는 제법 거친 물살이, 공원화 되어 있는 일대의 정갈한 녹색띠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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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아룬
마치 대홍수가 난 듯 누런 황토빛으로 넘실대는 강물이 선착장 연결통로 바닥에까지 들어와 찰랑찰랑하다. 그런 강물을 딛고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치솟은 끄롱톤 다리가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제왕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강변의 억제된 건축물 고도 덕분에, 삔까오 다리를 지나며 한자락 물굽이를 돌아드니 멀리 엎어놓은 종 모양의 왓아룬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원의 첨탑을 정점으로 나지막하게 이어져있는 강변의 스카이라인은, 과연 1000만 명이 사는 대도시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태초적인 느낌으로까지 다가온다.

푸미폰 국왕의 대형사진이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있는 선착장 입구를 빠져나오니 정면으로 왓아룬의 부속 사원과 연결된다. 우리네의 험상궂은 사천왕에 비해 다소 희화적인 느낌을 주는 수호신이 사원 높이 만큼의 거대한 몸짓으로 출입구에 버텨서 있다. 온통 금박으로 장식된 사원의 기둥과 벽체에서 풍겨져나오는 강렬한 색감은 금새 사람들의 얼굴도 금박을 입혀 놓는다. 죽은 신자들의 유골을 부처상 아래에 뭍고 사진으로 표식을 해놓은 것은, 흡사 우리 식의 절에 모시는 것과 닮았다.

크메르 건축양식에서 파생된, 태국의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다는 톡특한 예술품, 왓아룬.. 거의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 계단 위로 뻗어올라간 74m 높이의 대 프랑은 올려다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그러나 존재의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보여 주기위해 만들었다는 그 가파른 계단은 아쉽게도 출입금지가 되어있다. 혹시 그런 조처의 배경에 해외여행 개방 이후 이십년 가까이 물밀듯이 태국에 밀려온 우리 관광객도 일조를 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왕조를 이루어낸 이성계가 경복궁에 쏟아부은 정성에 비해질까.. 버마에게 함락된 아유타야를 피해 동틀 녘 이곳에 도착했다는 탁신은, 아마 새 왕조의 수호사원과 왕궁의 건설에 비장한 마음으로 대들었을테다.
불탑 전체의 모자이크 처리된 채색 자기 조각에서 발하는 우아한 빛깔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불탑의 계단 중간에서 내려다 본, 강 대안 쪽의 풍광은 뜻하지 않은 횡재였다. 거기서 마눌님도 한 점의 자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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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차이나타운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 황금색 첨탑들로 번득이는 왕궁은, 매표소로 이르는 주출입로부터 많은 인파로 넘쳐났다. 태국 왕실의 권위를 일깨워주려는 듯한 예상 외의 높은 입장료를 내고 왼쪽의 왕실사원인 에메랄드 사원으로 들어선다.
황금 타일로 덧붙였다는 프라시랏타나 체디를 비롯, 사원 안은 온통 황금색과 주황색, 그리고 에머랄드 빛으로 출렁대고 있었다. 열대의 작약하는 태양과 너무나 호흡이 맞는 화려하고 강렬한 색깔이라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제대로 쳐다보려니 눈이 너무 부신다.
건물 지붕선을 따라 달려있는, 힌두교 영향을 받았다는 초파는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치 신령이 지붕을 통해 하늘로 너울너울 빠져나가는 듯 하기도 하고, 일제히 기립해 두 팔을 들고 환호성을 울려대는 것 같다. 우리네의 건축에도 취두와 잡상이 있지만 차분하고 담백한 느낌의 그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갑자기 태국이라는 큰 바다에 풍덩 빠진 느낌이다.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 찬 듯한 본당 안은 단체 참배온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불전을 놓고 잠시 소원을 빌어본다.

라마 5세가 왕세자의 거처로 지었지만 근세에 와선 주로 왕실의 중요한 손님의 숙소로 쓰인다는 보롬피만 저택. 1966년 박대통령, 그리고 영화 '왕과나'에 나오는 영국 미망인 안나가 여기서 묵었다는 이야기에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짜크리 왕조 100주년을 기념해 라마 5세가 1882년 영국인 건축가에 의뢰해 지었다는 짜끄리 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에 타이식의 지붕을 얹음으로써 아주 특이한 외관을 지녔다. 혹시 시암의 근대화를 본 궤도에 올려놓은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는 출라롱코른의 유연한 사고가, 유럽을 데려다 와 태국식으로 녹여버린 것이 아닐까 ..

어제 뜻을 이루지못한 차이나타운이 뇌리를 떠나지않아 저녁 어스름이 짙게 내려앉은 선착장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삔까오 다리 건너편 쌍둥이 빌딩 뒤로 검붉은 노을이 다해가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 듯 친숙해 진 수상버스는, 어둠으로 뒤덮힌 밤 하늘에 휘황한 호박색의 불기둥이 되어 도발적으로 솟아 오른 왓아룬을 지나며 랏차웡 선착장에 도착한다. 랏차웡 거리를 직선으로 한동안 따라 가다 야왈랏 거리로 접어드니 네온사인이 요란한 본격적인 차이나타운이 시작된다. 좁은 인도를 수없는 노점이 차지하여 걸음을 제대로 뛸 수가 없다. 마침내 파둥다오 거리와 교차하는 길 주변에 늘어선 해산물 노상 식당들.. 테이블 접시들마다 가득한 꿍파오, 그리고 준비해 간 초고추장...

다시 되돌아 온 카오산 거리에는 어둠이 주는 해방감에 취한 인파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 동안 찍은 사진을 CD로 굽기위해 골목 안에 있는 한 인터넷카페를 찾아 들어갔는데, 넉넉해 보이는 여직원이 나를 보더니 누굴 많이 닮았다면서 인터넷 화면을 찾아 보여준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니 저건 축출당한 탁신 총리가 아닌가 ... 순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니 여직원은 웃으며 자긴 그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치는 않는다고.. 막상 그러고 보니 내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짧았지만 카오산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아쉬움이 감돈다. 석별의 한 잔이 간절해져 실크바 야외 가든 깊숙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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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시골길 2006.11.24 08:29  
  매우 깔끔하게 정리된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저도 공감 합니다..현지도착후 다음날 이른아침의 그 기분을..
순진무구녀 2006.11.25 12:15  
  타논님 글을 읽으면 마치 그곳에 있는것 마냥
상상이 다 됩니다. ㅎㅎㅎ
잘 읽었어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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