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왓 - 누가 만들었다고?
앙코르 왓을 누가 만들었다꼬?
모든 유적 안내자료에는 수리야바르만 2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웃기는 소리지...
민초들인 앙코리안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건축물이다.
그라고 대를 이어 목숨까지 바쳐가며 만든......
수리야바르만 2세는 "우리 심심한데 사원 하나 지어볼까?"하고 말만 했고 죽도록 더운날 뙤약볕 밑에서
채석하고 운반하고 정으로 돌을 쪼아가며 조각하고 여기에다 만들며 고생한 사람들은 민초들이다.
그런데 왕은 폼만 잡고도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이런게 세상 일이다.
누구나 수리야바르만 2세는 기억해도 민초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앙코르 왓이 완공된 후 수리야바르만 2세는 비쉬누에게 바치는 헌정식을 하며 소리친다.
"오~~ 위대하고도 거룩한 비쉬누 신이시여~~ 제가 정녕 이 사원을 만들었나이까?"
"어이~~ 미스터 수리야바르만 2세!!!! 정말 자네가 만든게 아니라니까.......
왜 자꾸 자네가 만들었다구 그래.."
캄보디아 국기를 장식하고 있는 저 탑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지방의 영주였단다.
그런 그가 왕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하룻만에 왕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는다.
왜 빼앗었느냐고 물어보면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양위를 받았다고 하겠지?
아니면 선왕께서 제발 왕위를 맡아달라고 간청을 해서 마지못해....
그렇지~ "인샬라"라고 했을꺼야...
결과적으로 그전까지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 있던 크메르는 강력한 수리야바르만 2세 덕분에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이룬다.
뭐~ 사실 선왕을 힘든 제왕의 업무에서 쉬게 만들어 주었으니 보호한게 맞기는 맞다.
행복이란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라고 했다.
이곳도 따프롬 처럼 반 정도가 한국 사람들이다.
돌아 다니다 보면 한국의 어느 유명 관광지에 외국 관광객들이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부분 유적은 입구가 동쪽인데 이곳은 서쪽이다.
힌두교에서 동쪽은 현 세상이고 서쪽은 사후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울러 서쪽은 저녁이며, 동시에 차거움이며, 가을이며, 죽음이며, 끝이며, 어두움이다.
그래서 이곳을 왕궁이 아니고 신전이나 왕릉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나 그건 아무도 모른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역사란 이렇게 거대한 유적의 의미도 정확히 제대로 모른다.
그래서 세계적인 불가사의란 말인가?
사실 왕궁에서 이곳을 오기 위해서는 지름길이 북쪽이나 서쪽인데 북쪽은 출입문이 없고 동쪽은 날씨도
더운데 한참 돌아가야 하고 그래서 서쪽으로 드나들었는지 알게 뭐람....
왜 산 사람들이 죽은 세상을 통하여 드나든단 말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자신이 비쉬누의 화신이라는 데자뷰 현상에 빠진 수리야바르만 2세가
과연 죽은자의 세상을 통하여 드나 들었을까?
아니면 혼자 멀리 돌아 동문으로만 다녔을까......
공연히 후세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때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로 김부식에 의한 삼국사기가 편찬되어 글로써 역사를 남기는 위대한 작업을
했으며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만주지역에서 몰래 힘을 키워 요나라와 송나라
를 차례로 격파하고 금나라를 세웠던 시기이고 유럽에서는 제 2차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다.
입구 탑문을 향하여 들어 간다.
탑문 입구에는 해자 입구에서 부터 연결 되었을 나가상이 있고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세개가 있다.
가운데 문이 가장 큰 것으로 보아 왕의 전용문이 아닌가 생각한단다.
지금도 출입이 제한된다.
우리도 오른쪽 작은 문으로 들어 간다.
지금 아래 사진에 보이는 기둥의 흔적은 예전 크메르 루즈와의 내전에서 이 안에 루즈군이 주둔했고
신 정부군이 진격을 해 왔을때 생긴 총격 흔적이란다.
세계적인 유산이니 뭐니 하면서도 망나니 폴 포트 한 사람에 의하여 생긴 상처는 이곳에도 남아 있다.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된 이상한 내전은 100년 정도가 지나면 이웃간의 아픔이 잊혀질까?
폴 포트는 한 사람을 체포하고는 고문을 통하여 그 사람이 3명의 사람을 더 죄인으로 불어야 했단다.
이건 완전히 지금의 피라미드 영업방식이다.
한 마을에 한 명만 체포하면 며칠 후에는 그 마을주민 모두가 죄인이 되는 피라미드 영업의 원조다.
그러면 이웃간에 서로 모두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는 이상한 마을이 된다.
정겹게 함께 살았던 이웃 처자가 우리 아들의 이름을 대면 우리 아들은 또 그 집 아낙을 불었을게다.
킬링필드라는 영화에서 흐르는 음악....
바로 존 레논의 "이메진"이라는 노래다.
그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말 "You may say I'm a dreamer...."
그렇다 몽상가... 수리야바르만 2세나 폴 포트는 아마 몽상가였을지도 모른다.
지독한 데자뷰현상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낸.....
이 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부처상이 우리를 반긴다.
그런데 부처님 팔이 각각 4개씩?
예전에 변신의 귀재인 비쉬누상이었는데 재활용을 하다보니 그리 되었단다.
보통 비쉬누는 팔이 4개로 묘사되는데 이곳은 따블이다.
이곳은 처음에는 비쉬누신을 모신 사원이었단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비쉬누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우유의 바다 휘젓기에서 현장 감독이었던 비쉬누에게 제일 많은 공간을 내어주고 비쉬누 얼굴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워낙 비쉬누신은 변신을 자주 하다보니 왕들 자신도 혹시나 비쉬누의 화신이 아닌가 하고 착각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통 인간이 아니고 신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었을테니.....
벌써 한국말이 크게 들린다.
"아지매! 어디 있능교~~"
"와 그라는데?"
베트남에서 산 저 모자 쓴 사람의 99%가 한국 사람들이다.
꽃을 든 부처님~
"하이~~"
들어 가라신다.
"어꾼~~"
부처님은 힌두교에서 비쉬누신의 9번째 화신이란다.
그러니 다른 형태로 인간들에게 보여주나 사실 형태만 틀릴뿐이지 하나의 같은 신이다.
이 탑문을 돌아 내벽을 보면 이제는 이곳에 몇 천개나 되는 압사라가 우릴 반긴다.
그런데 그 압사라가 표정이 모두 다르다고 하는데 확인 불가....
서안의 진시황 병마용에 있는 도용도 10.000여개가 있으나 거기도 모두 얼굴 모습이 다르다.
나신에 가까운 볼륨감 넘치는 몸... 석벽에다가 양각으로....
이곳의 압사라는 발끝을 모두 밖으로 하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 하고는 엄지 발가락 끝을 살짝 들었다.
그러면 덜 피곤하지~~~
그리고 여기에 있는 압사라들은 가슴은 보여주어도 배꼽은 부끄럽다고 모두 손으로 가렸다.
모두가 벗고 있으면 사실 챙피할 일이 전혀 없다.
목욕탕에서 옷을 입고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캄보디아 사람들은 얼마전까지도 남녀가 상의를 입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벽지에 가면 아직도 상의를 입지 않고 사는 부족들이 있단다.
치마속에 드러난 하체에서 그들의 조각 솜씨는 과연 일품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가 위대한게 아니고 바로 이렇게 돌 위에다 조각을 한 장인들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이곳에 있는 압사라들은 다른 곳의 압사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어설픈 가짜 박사들에게 압사라를 만들라고 하면 데바타스를 만들고 데바타스를 만들라고 하면
압사라를 만든다.
갑자기 조지훈님의 "승무"라는 시가 떠 오른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 고와서 서러워라...."
혹시 조지훈님이 이곳을 오셔서 보셨더라면 이런 시도 짓지 않으셨을까?
제목 : "압사라"
"얇은 사 투명한 치마는 고이 포개서 잠자릴레라...
희끄무리한 허벅지는 꽃무늬 치마에 감추오고
두 가슴에 흐르는 나신이 정작 글래머라서 두근거려라..."
마치 앏은 사(紗)를 입은 듯 두 다리가 치마 속에서 선명히 비친다.
그럼 만약 비가 오면 압사라의 젖은 옷이 어떻게 변할까?
왜 佳人은 그런게 궁금할까?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
여행을 떠난지 7일 째인데 처음이다.
그래~~ 나올때 두고보자.....
그런데 아래 사진의 압사라는 왜 까맣게 되었나?
젖의 바다 휘젓기에서 흰 우유로 저으라고 했는데 이건 초코 우유로 저었구먼....
佳人은 앙코르 예술의 최고는 압사라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치마 속으로 비치는 다리를 돌에다 표현 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초기 유적의 투박한 치마의 처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속이 훤히 비치는 앏은 모시옷을 입은 듯....
그리고 바람이 불어 치마가 몸에 착 달라 붙어 있는 모습으로....
이곳에서 볼거리 중 처음은 압사라의 모습이다.
엄지 발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모습에서도.....
아마도 석공은 글래머를 몹시도 사랑했고 한이 맺혔나 보다.
이곳의 압사라 모두는 놀라우리만치 글래머로 만들어졌다.
사실 크메르 여성들이 모두 이렇게 글래머일까?
모두 단체로 실리콘 성형수술을 한 듯 어쩌면 이리도 풍만할까?
잘룩한 허리의 선 하고는.... 나 원 참!!!!
만약 여기서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한다면 압사라를 쳐다보고 마눌님을 번갈아 쳐다보는 우를 범하지 마시라
그랬다가는 남편은 적어도 1주일간 구박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냥 돌이라 생각하시고 마눌님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시라....
우리 한국인들 보다 얼굴은 확실히 작다. 이건 佳人도 인정한다.
비너스 상이 완벽한 8등신이니 뭐니 하지만 이곳에도 대부분 8등신이다.
우리 한국인은 그 놈의 큰 바위 얼굴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대부분 6등신인데....
미인의 기본은 8등신이란다.
그건 누가 만든 규칙인가?
8등신의 나라에서 만든 규칙이니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생긴대로 살아가자.... 6등신 홧팅~~
이곳 아래에 있는 압사라들...... 너희들은 왜 이번에는 배꼽을 가리지 않았는가?
특히 왼편의 두번째 너 말이야!!
배꼽이 밖으로 튀어 나왔잖니~~
그리고 제일 왼쪽에 있는 압사라는 유두함몰인 압사라이다.
치마의 여밈이 왼편이 오른편 위로 올라가 있으며 치마의 옷감에 꽃 무늬 마져 선명히 살아있다.
압사라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8등신의 몸매와 개미처럼 가느다란 허리와 그리고 가슴에서 풍기는 넉넉함.....
앏은 치마와 치마 속으로 비치는 허벅지....
그리고 치마에 새겨진 꽃무늬까지......
또 머리에 쓴 관을 어떤가?
우리의 조선시대의 여성들도 몸 단장을 할 때 다래라고 하는 가체를 머리에 얹었다.
이것 오래 쓰면 목 디스크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더 무거운 관을 쓰고 있다.
천년을 무거운 관을 쓰고 있다면 아마도 이곳의 압사라들은 모두 목 디스크 환자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압사라는 앞쪽의 엄지 발가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얼굴의 표현은 조각 솜씨가 좋지 않은 압사라가 옥의 티로 자주 보인다.
특히 입술의 표현은 한국인들의 앵두같은 입술이 아니라 심술난 툭 불거진 입술이다.
압사라의 머리에 쓴 관은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똑 같다.
佳人의 머리에는 앙코르 왓의 성소탑을 얹어 놓았다.
압사라들이 머리에 쓴 관하고는 차원이 다른 최고의 관이다.
그래봐야 6등신이다.... 어휴~~ 佳人 머리 위에 올려 놓으니 마치 아수라의 뿔 같다.
이곳을 찾는다면 모두 압사라의 관보다 더 좋은 앙코르의 성소탑을 한 번씩 써보자.
이제 떠들썩한 한국관광객들의 뒤를 따른다.
베트남에서 사서 쓰고 온 저 모자.... 틀림없이 한국인들이다.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뒷짐까지 지고 8자 걸음에 여유있게 걸어간다.
다시 탑문에서 신전으로 다리로 만든 보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양쪽으로 장서각이라고 추정되는 용도의 건물이 대칭으로 각각 한 개씩 있다.
그곳도 가 보았지만 볼게 별로 없다.
아무 부조도 없는데 무슨 장서각이야?
더운데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겠다.
우리는 중간에 있는 나가상이 잠시 길을 열어 놓은 계단을 통하여 풀 밭으로 내려 간다.
그곳에는 이런 개미집도 있다.
이 개미집이 옛날 그들이 부조를 벽에 붙일때 사용한 접착제 원료의 일부분이다.
탑문에서 사원 본관 건물로 이어지는 보도의 양쪽에는 나란히 대칭으로 이런 연못이 있다.
정면에서 보도를 따라 걸어가며 신전을 바라보면 세개의 탑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값을 내고 들어와도 이곳에 오면 두개를 더 본다.
그런데 물 위에 비친 탑 까지 모두 열개를 보니 얼마나 이익인가.....
나올때 반대편으로 돌아 그쪽 까지 바라 보자.
그러면 본전 뽑고도 남는 장사다.
그런데 사진 오른쪽 위가 심상치 않다.
검게 나타난다.
그리고 연못 물위에 금방 물방울이 번진다.
그래 왜 아니겠니?
비가 퍼 붓는다.
순식간에 비가 퍼 붓는다.
오늘 여행 7일째....
혹시나가 역시나로 변하는 순간......
그래서 사진이 갑자기 중간이 비었다.
비 맞으며 사진을 찍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가장 안타까운게 지금 이 순간 비를 맞고 있는 압사라의 얇은 치마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못 보는 일이다.
지금 밖에 보이는 테라스가 영예의 테라스란다.
비가 와도 정몽주님의 시조인
<봄비는 가늘어 방울이 맺히지 않고
조용한 밤중에서야 어렴풋이 들리는구나.
눈 녹아 남쪽 개울에 넘실넘실 흐르면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 나겠네.... >로 끝나는 시상이 저절로 솟아나는 비가 아니고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듯 구멍이 뜷어진 듯 내리 퍼붓는다.
어제는 프레아 칸에서 비를 피했다.
오늘은 이곳.....
그리고 내일은 어디서 절묘한 타이밍에 비를 피할꼬....
그러나 걱정 없다.
우리는 이미 갤러리라고 하는 회랑 안으로 날래 뛰어 들어 왔다.
푸~ 하하하하하~~
비야 퍼 부어라...
딱 오후 네시 까지 2시간 동안만......
비를 관장한다는 인드라신이 시샘을 하나 보다.
그래서 우유 바다 휘젓기에서 佳人도 인드라신을 휘저어 버려야겠다.
이제부터 앙코르 왓의 두번째 볼거리인 석벽에 세겨진 장대한 부조물들을 차례 차례 살펴본다.
글쓴이 : 佳人
사진도 : 佳人
큰 사진은 개인 블로그로 : http://blog.daum.net/nhk2375
오늘의 佳人 생각 : 후세 사람들은 돌 하나 옮기지 않고 釘 한번 손에 들지 않은
수리야바르만 2세는 기억하나 피와 눈물과 땀을 바친 민초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은 와서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잔소리는 하고 갔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