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뻰 - 중화 문화권에서 인도 문화권으로 들어오다.
베트남은 지리학적으로도 동남아시아 지역인데다가 동남아국가연합인 아세안의 회원국이긴 하지만, 문화권을 기준으로 나눠보자면 동남아 문화권이 아닌 중화 문화권에 속하는 곳이라고들 한다. 하긴 달랑 보름밖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내가 그 나라 문화의 전반을 어찌 꿰뚫어 보겠는가...
문화 전반은 커녕, 아침에 걸었던 길도 기억 못하는 통에 요왕한테 길눈 어둡다는 면박만 실컷 얻어먹고 의기소침해서 다니는 주제에 말이다. 그냥 많이 연구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수긍할밖에...
그러고 보니 하노이 시내의 문묘가 예전에 국자감 역할을 했었고, 한때 한자를 쓰기도 했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형식적이나마...) 조공국가의 일원이었다고 하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전반에 유교 사상이 남아 있어서 마인드가 우리랑 좀 비슷하다나... 베트남 처녀와 국내 아저씨들을 연결해주는 국제결혼 정보회사에서 내세우는 슬로건이 ‘베트남 신부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니 그 원인이 유교 때문 인거 같다고 나름 어설픈 추측까지 해본다.
어쨌든 호치민에서 단돈 5달러에 산 조인트 버스는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출발하더니 오후 4시 반쯤 우리를 프놈뻰에 떨구어 주었다.
일 년 중 가장 강수량이 높아진다는 10월의 날씨답게, 프놈뻰에 입성하는 날 엄청난 폭우 때문에 앞이 다 안보일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다리가 끊어지거나 길이 유실되는 재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그나마 시간이 좀 지체 된 걸로 그쳤다. 이만하면 운이 좋다고 해야지...
자 그럼~ 처음 와본 프놈뻰의 분위기를 살살 느껴봐야지...
베트남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프놈뻰에서의 모또 기사들이나 뚝뚝이 기사들의 귀찮은 호객행위와 손짓도 상당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젓는 것도 시간이 지나니 지쳐버려서 그냥 완전 신경 끄고 걷기로 작정해버렸다. 누가 뭐라 하든 왕무시 모드로 일관한다는 건데... 바람직한 태도라곤 할 순 없지만 대안이 없는걸... 쩝...
프놈뻰 시내 중심가는 인도를 차와 짐들이 가로막고 있어 사람은 차도로 다녀야 한다
사실 심심하고 별 특징이 없어 뵈는 태국 역사에 비해서, 그 주변 국가들은 근래에 들어서 겪었던 그야말로 선명하고 고통스런 세월이 있는 바, 그런 사건들이 영화와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꽤 전달되어서 좀 더 관심이 가기도 한다.
베트남 - 베트남 전...
미얀마 -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이랑 아웅산 수지여사...
캄보디아 - 폴폿 정권의 킬링필드...
고등학교 때(그때만 해도 전두환 체제...) 단체 문화교실로 지정된 킬링필드를 관람하기 위해 학교 정규수업까지 일시중지하고 모든 학생들이 다 허접한 극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캄보디아 하면 듣기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킬링필드랑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첫번째 입양아가 이곳 캄보디아 출신 이란 것 밖에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아참...그리고 동남아로 향하는 배낭여행자들의 식지 않는 로망 ‘앙코르 왓’이 있었지...
전쟁이 이렇게 할퀴고 지나갔으니 분명 사람들이 못되고 거친 심성을 가졌으리라 예상하고 약간 긴장한 채로 발을 들여놓았건만, 그런 내 맘가짐이 부끄럽게도 이 곳 캄보디아 사람들은 참 순하고 약한 구석이 있었다.
전쟁이 이곳을 다 긁어놓고 지나간 흔적은 엄청나게 빈약한 인프라와(한나라의 수도에 시내버스가 없다) 무진장 남루한 사람들의 외모, 팔다리가 잘린 채 구걸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사람들이 타인을 대하는 얼굴이나 태도에는 분명히 부드럽고 순진한 그 뭔가가 있어서 우리는 꽤나 의아했다.
킬링필드를 배경으로 다룬 한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는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거 크메르루즈 군인으로서 가해자)이 계속 하는 말이... 바로 ‘카르마’... 우리말로 하면 ‘업’ 때문이라며 고개를 숙이고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걸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다. 당시 인구 700만명에서 200만명이 휘리릭 사라져 버린 4년간의 시간...
“누구 잘못도 아니여요... 그게 다 업 때문이죠... 그들(피해자), 우리들(가해자) 모두 업이 안 좋았어요... 우리는 악마가 아니에요. 악마는 우리의 지도자였지요. 우리는 악마의 명령을 따라야 했어요.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죽고 난 뒤가 두려웠어요... 하루 종일 아프기도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무서워요...”
도저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 엄청난 일을 겪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여전히 함께 살면서, 실제로 그 둘 간의 사정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것이, 다 그 종교 때문이지 싶다가도,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나마 종교가 주는 위안과 자기기만이라도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인내하며 참아 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흠...
여하튼지 간에 사람들이 순하고 좋다는 건, 우리 같은 떠돌이 여행자들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일은 아니어서 우린 편안한 맘으로 이곳 캄보디아를 다닐 수 있었다.
프놈뻰에 온 여행자들이 거의 들리는 몇 개의 관광 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뚜얼슬랭 박물관이랑 시내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름하야 ‘킬링필드’라는 곳이다.
그 당시 발견된 시신들의(무슨 고문들을 당했는지 기록으로 남겨져 보여지는 시체들의 상태가 도대체 말이 아니다) 사진과 죄수들의 증명사진들로 꽉 찬 뚜얼슬랭 박물관(구, S21 수용소)은 이곳에 방문한 모두의 얼굴을 우울하고 침울한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가난한 나라에서 도대체 권력을 잡은들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랬을까? 권력욕이 아니라 정말로 신념에 차서 그랬었나? 싶은 게 상당히 혼란스러운데, 거기다가 마침 일본에서 방문한 승려단이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염불을 외우며 온 건물 안을 왱알왱알 거리며 돌아다니는 통에 오히려 더 오싹해져 버렸다.
정말 이 낡은 건물 구석 어디에선가 그 승려들이 외워대는 염불소리에, 희생자들의 혼이 가만히 위로 받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이 되자 얼른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이곳 S21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다
고문실. 발견당시의 시신 사진이 걸려있다
영혼을 달랜다
그 담날 찾아간 킬링필드(사실 캄보디아 전국이 킬링필드지만 프놈뻰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묻혔기 때문에 이곳에 위령탑을 세우고 기리고 있다)에는 아직도 다 수습하지 못한 뼈들과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이 땅 구석구석에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뼈를 밟고 서있는 기분이라니...
뒤이어 이어지는 가이드의 설명은 우리의 감정과 얼굴을 우중충하게 만들고도 남아서 우리는 가끔 한숨을 쉬거나 눈꼬리를 늘어트린 맥없는 표정을 지으며 잔인했던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었다. 유리관 안에 높게 쌓여진 해골들을 보니 한낮의 햇빛이 쨍쨍한데도 불구하고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이곳 역시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땅 곳곳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위령탑
탑 안에는 유골이 들어있다
거리로 나오면 거리 모습은 또 맘 편한가...
기후로 봐서는 벼도 이모작 할 수 있고 하다못해 바나나 잘 키워서 입에 밥을 못 넣는 절대빈곤은 없을 줄 알았건만, 시내에는 삐적 마른 아기 거지들이 종종 보이는 걸 보니 먹고 사는 것도 해결이 안됐나 보다.
나라꼴을 절대빈곤도 못 면하게 요 모양 요 꼴로 해놓고 낯짝도 두껍게 시리 뭐가 잘났다고 군데군데 자기네들 사진으로 도배해 놓은 국왕부부의 면상을 보니(돈에도 국왕사진이다...) 정말 그 얼굴이 무능의 극치처럼 보여서 절로 미워질 뿐이다.
시내버스도 없고 미터 택시도 없고 시내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란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뚝뚝을 타거나 오토바이 한 대에 3명이 타고 달리는 수밖에 없어서 우리는 상당한 거리를 제 발로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이곳 프놈뻰의 전경이란 참 뭐랄까... 어딘가 언발란스 한 면이 있어서 세게 최빈국 중 하나답게 거리에는 더 이상 꼬질꼬질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꾀죄죄한 걸인들이 유럽식 무드가 강하게 풍기는 건물 앞에서(아마 프랑스 영향이었겠지...)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다. 가장 선진적이고 잘 나가는 국가의 냄새가 멀멀 풍기는 건물들 앞에 세상에서 가장 초라해 뵈는 사람의 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 떡하니 있는 걸 보니, 인생 참 아이러니 하다 싶기도 하고 어째 한편으로는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면서 화도 좀 나고 그러다 울적해지기도 하는 게... 맘이 쬐금 복잡해진다.
더위에 지쳐 이런 저런 깊은 생각들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그냥 배고프고 다리 아프다는 생각밖에는 안날 즈음 우리는 독립 기념탑 근처의 쑤끼집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해산물들을 건져 먹고는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크메르 탑 양식으로 지어진 독립기념탑
싸구려 노점식당에서 밥을 먹다 입맛이 없어 남긴 몇 숟가락 의 밥을 향해 눈독 들이고 있던 거지아이가, 우리가 자리를 뜨자마자 얼렁 그 접시를 기울여 자기의 까만 비닐봉지 안에 쓸어 넣는 것도... 아직 30도 안되어 보이는 젊고 바짝 마른 엄마가 주렁주렁 세 명의 자식의 손을 잡고 동냥을 하는 모습도... 이곳 프놈뻰에서는 그저 매우 일상적인 모습일 뿐이어서 급기야 며칠 지나니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태연히 오늘 저녁을 어디서 먹어야 맛있게 잘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주절거렸다.
동남아시아 나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이 감상에 젖어 눈빛을 부드럽게 만들며 하는 말이 있는데...
‘가난하지만 행복한 그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고... 어쩌구 저쩌구... 불라 불라...’
그러면서 마치 세상 끝까지 가본 냥 우아를 떠는데... 그런 말 해대는 사람들 볼 때 마다, 저 인간이 거기서 약을 피우고 왔나..? 웬 헛소리람 하는 냉소가 절로 나온다. 그 가난한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며 자기가 믿고 싶은 개똥 철학을 환상적으로 풀어놓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은 간다만...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의 기억 같은 건 그 후 자수성가해서 크고 안락한 아파트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지, 가난이 현재 진행형으로 쭈욱~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냥 지긋지긋함 그 자체일 뿐일거란 생각이 쬐끔 들었다.
무척이나 궁핍한 이곳 캄보디아에서도 제법 번듯한 상점의 주인이나 있어 뵈는 차림새의 사람들은 중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화교 들이었다. 여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화교들이 어느 정도 상권과 재력을 지니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은 많이 바뀌긴 했다만... 이렇게 천부적으로 상업적 기질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이 어케 중국 땅에선 공산주의를 유지하며 살아왔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프놈뻰 시내 안에서 제일 큰 볼거리로 꼽혀지는 왕궁과 국립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몇몇 개의 사원들을 구경하고 나니, 이제 딱히 뭔가를 볼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이곳의 왕궁의 양식이나 전체적인 인상은 태국의 그것과 비슷(물론 규모는 훨 작지만...)해서 방콕에서 왕궁을 이미 본 사람들이라면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할 듯 했다. 나름 아담하고 이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청출어람이랄까... 태국인들이 지금의 땅으로 들어 왔을 때 선주민이었던 크메르인들의 여러 가지를 받아 들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문화는 태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하긴 전통이고 뭐고 모두 파괴해 버리고, 그것을 전승할 만한 사람들도 모두 죽여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 유명한 압사라 춤도 태국 왕실로부터 전수 받았다니 말 다했지 뭐...
왕궁은 방콕에 있는 태국 왕궁과 구성과 배치, 형식, 외관 등이 매우 흡사하다. 왕궁 안의 사원 왓 쁘레아 께오. 왓 쁘레아 께오의 본당은 바닥이 은으로 되어있어 서양인들은 Silver Pagoda라고도 한다.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시장 역시, 늘 생동감을 주어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지만 시장 구경이 하루 이틀이 지나니 다 시들해 지고... 어느 시장을 가 봐도 다 그 물건이 그 물건이지 싶은 게 심드렁해질 즈음...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깜뽓으로 무거운 등짐을 메고 떠났다. 어차피 깜뽓과 시하눅빌을 거쳐서 다시 프놈뻰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루트라서 떠나는 발걸음이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프놈뻰의 대표시장 프싸 트마이
벙깍 호수 근처 골목에는 작은 배낭여행자 거리가 있다
문화 전반은 커녕, 아침에 걸었던 길도 기억 못하는 통에 요왕한테 길눈 어둡다는 면박만 실컷 얻어먹고 의기소침해서 다니는 주제에 말이다. 그냥 많이 연구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수긍할밖에...
그러고 보니 하노이 시내의 문묘가 예전에 국자감 역할을 했었고, 한때 한자를 쓰기도 했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형식적이나마...) 조공국가의 일원이었다고 하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전반에 유교 사상이 남아 있어서 마인드가 우리랑 좀 비슷하다나... 베트남 처녀와 국내 아저씨들을 연결해주는 국제결혼 정보회사에서 내세우는 슬로건이 ‘베트남 신부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니 그 원인이 유교 때문 인거 같다고 나름 어설픈 추측까지 해본다.
어쨌든 호치민에서 단돈 5달러에 산 조인트 버스는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출발하더니 오후 4시 반쯤 우리를 프놈뻰에 떨구어 주었다.
일 년 중 가장 강수량이 높아진다는 10월의 날씨답게, 프놈뻰에 입성하는 날 엄청난 폭우 때문에 앞이 다 안보일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다리가 끊어지거나 길이 유실되는 재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그나마 시간이 좀 지체 된 걸로 그쳤다. 이만하면 운이 좋다고 해야지...
자 그럼~ 처음 와본 프놈뻰의 분위기를 살살 느껴봐야지...
베트남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프놈뻰에서의 모또 기사들이나 뚝뚝이 기사들의 귀찮은 호객행위와 손짓도 상당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젓는 것도 시간이 지나니 지쳐버려서 그냥 완전 신경 끄고 걷기로 작정해버렸다. 누가 뭐라 하든 왕무시 모드로 일관한다는 건데... 바람직한 태도라곤 할 순 없지만 대안이 없는걸... 쩝...
프놈뻰 시내 중심가는 인도를 차와 짐들이 가로막고 있어 사람은 차도로 다녀야 한다
사실 심심하고 별 특징이 없어 뵈는 태국 역사에 비해서, 그 주변 국가들은 근래에 들어서 겪었던 그야말로 선명하고 고통스런 세월이 있는 바, 그런 사건들이 영화와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꽤 전달되어서 좀 더 관심이 가기도 한다.
베트남 - 베트남 전...
미얀마 -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이랑 아웅산 수지여사...
캄보디아 - 폴폿 정권의 킬링필드...
고등학교 때(그때만 해도 전두환 체제...) 단체 문화교실로 지정된 킬링필드를 관람하기 위해 학교 정규수업까지 일시중지하고 모든 학생들이 다 허접한 극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캄보디아 하면 듣기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킬링필드랑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첫번째 입양아가 이곳 캄보디아 출신 이란 것 밖에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아참...그리고 동남아로 향하는 배낭여행자들의 식지 않는 로망 ‘앙코르 왓’이 있었지...
전쟁이 이렇게 할퀴고 지나갔으니 분명 사람들이 못되고 거친 심성을 가졌으리라 예상하고 약간 긴장한 채로 발을 들여놓았건만, 그런 내 맘가짐이 부끄럽게도 이 곳 캄보디아 사람들은 참 순하고 약한 구석이 있었다.
전쟁이 이곳을 다 긁어놓고 지나간 흔적은 엄청나게 빈약한 인프라와(한나라의 수도에 시내버스가 없다) 무진장 남루한 사람들의 외모, 팔다리가 잘린 채 구걸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사람들이 타인을 대하는 얼굴이나 태도에는 분명히 부드럽고 순진한 그 뭔가가 있어서 우리는 꽤나 의아했다.
킬링필드를 배경으로 다룬 한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는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거 크메르루즈 군인으로서 가해자)이 계속 하는 말이... 바로 ‘카르마’... 우리말로 하면 ‘업’ 때문이라며 고개를 숙이고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걸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다. 당시 인구 700만명에서 200만명이 휘리릭 사라져 버린 4년간의 시간...
“누구 잘못도 아니여요... 그게 다 업 때문이죠... 그들(피해자), 우리들(가해자) 모두 업이 안 좋았어요... 우리는 악마가 아니에요. 악마는 우리의 지도자였지요. 우리는 악마의 명령을 따라야 했어요.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죽고 난 뒤가 두려웠어요... 하루 종일 아프기도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무서워요...”
도저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 엄청난 일을 겪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여전히 함께 살면서, 실제로 그 둘 간의 사정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것이, 다 그 종교 때문이지 싶다가도,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나마 종교가 주는 위안과 자기기만이라도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인내하며 참아 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흠...
여하튼지 간에 사람들이 순하고 좋다는 건, 우리 같은 떠돌이 여행자들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일은 아니어서 우린 편안한 맘으로 이곳 캄보디아를 다닐 수 있었다.
프놈뻰에 온 여행자들이 거의 들리는 몇 개의 관광 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뚜얼슬랭 박물관이랑 시내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름하야 ‘킬링필드’라는 곳이다.
그 당시 발견된 시신들의(무슨 고문들을 당했는지 기록으로 남겨져 보여지는 시체들의 상태가 도대체 말이 아니다) 사진과 죄수들의 증명사진들로 꽉 찬 뚜얼슬랭 박물관(구, S21 수용소)은 이곳에 방문한 모두의 얼굴을 우울하고 침울한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가난한 나라에서 도대체 권력을 잡은들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랬을까? 권력욕이 아니라 정말로 신념에 차서 그랬었나? 싶은 게 상당히 혼란스러운데, 거기다가 마침 일본에서 방문한 승려단이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염불을 외우며 온 건물 안을 왱알왱알 거리며 돌아다니는 통에 오히려 더 오싹해져 버렸다.
정말 이 낡은 건물 구석 어디에선가 그 승려들이 외워대는 염불소리에, 희생자들의 혼이 가만히 위로 받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이 되자 얼른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이곳 S21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다
고문실. 발견당시의 시신 사진이 걸려있다
영혼을 달랜다
그 담날 찾아간 킬링필드(사실 캄보디아 전국이 킬링필드지만 프놈뻰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묻혔기 때문에 이곳에 위령탑을 세우고 기리고 있다)에는 아직도 다 수습하지 못한 뼈들과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이 땅 구석구석에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뼈를 밟고 서있는 기분이라니...
뒤이어 이어지는 가이드의 설명은 우리의 감정과 얼굴을 우중충하게 만들고도 남아서 우리는 가끔 한숨을 쉬거나 눈꼬리를 늘어트린 맥없는 표정을 지으며 잔인했던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었다. 유리관 안에 높게 쌓여진 해골들을 보니 한낮의 햇빛이 쨍쨍한데도 불구하고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이곳 역시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땅 곳곳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위령탑
탑 안에는 유골이 들어있다
거리로 나오면 거리 모습은 또 맘 편한가...
기후로 봐서는 벼도 이모작 할 수 있고 하다못해 바나나 잘 키워서 입에 밥을 못 넣는 절대빈곤은 없을 줄 알았건만, 시내에는 삐적 마른 아기 거지들이 종종 보이는 걸 보니 먹고 사는 것도 해결이 안됐나 보다.
나라꼴을 절대빈곤도 못 면하게 요 모양 요 꼴로 해놓고 낯짝도 두껍게 시리 뭐가 잘났다고 군데군데 자기네들 사진으로 도배해 놓은 국왕부부의 면상을 보니(돈에도 국왕사진이다...) 정말 그 얼굴이 무능의 극치처럼 보여서 절로 미워질 뿐이다.
시내버스도 없고 미터 택시도 없고 시내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란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뚝뚝을 타거나 오토바이 한 대에 3명이 타고 달리는 수밖에 없어서 우리는 상당한 거리를 제 발로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이곳 프놈뻰의 전경이란 참 뭐랄까... 어딘가 언발란스 한 면이 있어서 세게 최빈국 중 하나답게 거리에는 더 이상 꼬질꼬질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꾀죄죄한 걸인들이 유럽식 무드가 강하게 풍기는 건물 앞에서(아마 프랑스 영향이었겠지...)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다. 가장 선진적이고 잘 나가는 국가의 냄새가 멀멀 풍기는 건물들 앞에 세상에서 가장 초라해 뵈는 사람의 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 떡하니 있는 걸 보니, 인생 참 아이러니 하다 싶기도 하고 어째 한편으로는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면서 화도 좀 나고 그러다 울적해지기도 하는 게... 맘이 쬐금 복잡해진다.
더위에 지쳐 이런 저런 깊은 생각들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그냥 배고프고 다리 아프다는 생각밖에는 안날 즈음 우리는 독립 기념탑 근처의 쑤끼집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해산물들을 건져 먹고는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크메르 탑 양식으로 지어진 독립기념탑
싸구려 노점식당에서 밥을 먹다 입맛이 없어 남긴 몇 숟가락 의 밥을 향해 눈독 들이고 있던 거지아이가, 우리가 자리를 뜨자마자 얼렁 그 접시를 기울여 자기의 까만 비닐봉지 안에 쓸어 넣는 것도... 아직 30도 안되어 보이는 젊고 바짝 마른 엄마가 주렁주렁 세 명의 자식의 손을 잡고 동냥을 하는 모습도... 이곳 프놈뻰에서는 그저 매우 일상적인 모습일 뿐이어서 급기야 며칠 지나니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태연히 오늘 저녁을 어디서 먹어야 맛있게 잘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주절거렸다.
동남아시아 나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이 감상에 젖어 눈빛을 부드럽게 만들며 하는 말이 있는데...
‘가난하지만 행복한 그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고... 어쩌구 저쩌구... 불라 불라...’
그러면서 마치 세상 끝까지 가본 냥 우아를 떠는데... 그런 말 해대는 사람들 볼 때 마다, 저 인간이 거기서 약을 피우고 왔나..? 웬 헛소리람 하는 냉소가 절로 나온다. 그 가난한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며 자기가 믿고 싶은 개똥 철학을 환상적으로 풀어놓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은 간다만...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의 기억 같은 건 그 후 자수성가해서 크고 안락한 아파트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지, 가난이 현재 진행형으로 쭈욱~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냥 지긋지긋함 그 자체일 뿐일거란 생각이 쬐끔 들었다.
무척이나 궁핍한 이곳 캄보디아에서도 제법 번듯한 상점의 주인이나 있어 뵈는 차림새의 사람들은 중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화교 들이었다. 여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화교들이 어느 정도 상권과 재력을 지니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은 많이 바뀌긴 했다만... 이렇게 천부적으로 상업적 기질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이 어케 중국 땅에선 공산주의를 유지하며 살아왔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프놈뻰 시내 안에서 제일 큰 볼거리로 꼽혀지는 왕궁과 국립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몇몇 개의 사원들을 구경하고 나니, 이제 딱히 뭔가를 볼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이곳의 왕궁의 양식이나 전체적인 인상은 태국의 그것과 비슷(물론 규모는 훨 작지만...)해서 방콕에서 왕궁을 이미 본 사람들이라면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할 듯 했다. 나름 아담하고 이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청출어람이랄까... 태국인들이 지금의 땅으로 들어 왔을 때 선주민이었던 크메르인들의 여러 가지를 받아 들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문화는 태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하긴 전통이고 뭐고 모두 파괴해 버리고, 그것을 전승할 만한 사람들도 모두 죽여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 유명한 압사라 춤도 태국 왕실로부터 전수 받았다니 말 다했지 뭐...
왕궁은 방콕에 있는 태국 왕궁과 구성과 배치, 형식, 외관 등이 매우 흡사하다. 왕궁 안의 사원 왓 쁘레아 께오. 왓 쁘레아 께오의 본당은 바닥이 은으로 되어있어 서양인들은 Silver Pagoda라고도 한다.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시장 역시, 늘 생동감을 주어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지만 시장 구경이 하루 이틀이 지나니 다 시들해 지고... 어느 시장을 가 봐도 다 그 물건이 그 물건이지 싶은 게 심드렁해질 즈음...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깜뽓으로 무거운 등짐을 메고 떠났다. 어차피 깜뽓과 시하눅빌을 거쳐서 다시 프놈뻰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루트라서 떠나는 발걸음이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프놈뻰의 대표시장 프싸 트마이
벙깍 호수 근처 골목에는 작은 배낭여행자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