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씨판돈 (시판돈)]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을 하면 필연적으로 사서 실려 다니게 되는 이런 육로+배 조인트 티켓 !! 독고다이 기질이 있더라도 빡쎄(팍세)에서 씨판돈(시판돈)으로 갈 땐 여행사 조인트티켓으로 이동하는게 암만 요모조모 생각해봐도 제일 낫다 싶었어요. 시내 숙소에서 터미널까지 – 터미널에서 반 나까상까지 – 반 나까상 선착장에서 배표 따로 구매... 건건이 신경만 쓰이고 돈도 더 절약될 것도 없고 말이죠.
1인당 60,000낍이라고 적힌 영수증을 들고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봉고 기사가 우리를 데리러옵니다. 우리는 맨 처음에 타게 되어서 제일 좋은 자리에 앉게 되었어요. 이런 봉고에서는 운전사 바로 뒷좌석이 제일 편해요.
출발시간은 오전 8시반이고 도착은 11시반이랬는데, 원래 여행사에서 말해주는 도착시간은 그다지 믿을게 못됩니다요.
긴 다리의 서양인 여행자들이 봉고 뒷좌석에 콩깍지속의 콩들마냥 옹기종기 올라타는데... 도대체 저들이 둘러메고 있는 저 큰 배낭엔 뭐가 들었을까? 6~7킬로 정도 되는 제 배낭은 그들의 배낭 옆에 있으니까 무슨 손가방 같이 보였어요. 진짜 그중에는 제가 들어가도 될 만한 배낭도 있어요.
근데 여행자들 꼴은 넝마주이에 가까운 집시스타일이어서, 배낭에 든 게 옷이나 생필품 같은 게 아닌가? 당최 뭐가 들었길래 짐은 저렇게 많은데 외양은 후리한 홈리스 같을까...? 속으로만 궁금했습니다. 도미토리 같은데 묵으면 살짝 구경이나 하겠지만 것도 아니니까...
혹시 아시는 분들은 좀 알려주세요. ^^
우리 차는 짬빠싹(참파삭)에 가는 여행자들을 중간에 내려주고는, 남쪽으로 제법 속도를 내서 달려요. 가끔 소가 길을 가로막긴 하지만 이 정도 교통체증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반나까쌍에 내리자 기사는 무뚝뚝하게 손가락으로 우리가 갈 선착장 방향을 가르키는데, 이미 이곳에 와본 여행자 몇몇이 씩씩하게 선두에 서서 우리는 개미들 행렬처럼 줄지어 갑니다. 거리가 좀 되던데 선착장 안까지는 안 데려다 주나봐요. 힝...다리 아픈데...
반나까쌍 선착장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4천개의 섬 중 하나인 돈뎃...
지금은 6월 비수기... 12월에서 3월까지 이어지는 성수기에는 인기 있는 숙소들이 풀이 되겠지만 지금은 널널할 게 분명해요. 실제로도 섬에 여행자들이 그다지 없었어요.
돈뎃에서 위치로 보나 시설로 보나 제일 좋은 곳은 리틀에덴(이곳은 무려 수영장도 있다)인거 같은데, 여기는 우리에게 너무 과하고... 우리는 섬 동쪽에 있는 바바게스트 하우스로 향합니다. 지도에서 가늠 한 것과는 달리 선착장에서 걸어서 금방이에요.
오~~ 이곳은 홀로 사는 프랑스인 아저씨가 운영하는 곳인데 숙소 전경도 아름답고 정원에 화초도 잘 가꾸어져 있고, 비수기에는 영업을 안 하지만 강변 데크에 근사한 식당도 마련해놓고... 첫인상이 좋은데요. 맘에 쏙 들었어요.
예약사이트에는 1박에 22만낍에 올라왔길래 예약을 하고 갈까 말까 하다가 비수기라 그냥 갔어요. 얼마를 부를까 했는데? 쿨하게 20만낍~
방을 구경하러 2층에 올라갔더니 다른 숙소는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침대위에서 바로 강이 보입니다. 베란다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넓은 욕실에 에어컨도 잘나오는 깨끗한 방이에요.
예전에 요왕 혼자 왔을 때는 대략 4만낍 정도 되는 헛간 같은데서 묵었던 모양인데, 아~ 그런 곳은 생각만해도 피부가 가렵고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를 것만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린 이 바바에서 4박 했습니다. 4박이나 하는 동안 뭘 했냐면... 별거 안했어요. 이곳은 뭐 하려고 들어오는 동네가 아닌 거 같아요. 그저 흘러가는 메콩강 물결을 보면서 내 마음에 있는 그 어떤 것들도 사라지길 바라는 그런 상태랄까...?
물론 나중에 돈콘 섬으로 놀러가서 리피폭포랑 그 섬의 북쪽 언저리에 있는 숙소촌도 보고 나름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유적 비스무리 한 거는 다 둘러봤지만... 거의 아무것도 안하면서도 돈뎃에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던건, 전적으로 이 바바 게스트하우스 덕분이었어요.
만약 나무오두막 헛간 같은 곳에 묵었으면 ‘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다가 못 참고 금방 이 섬에서 탈출했을 듯...
근데 우기라서 그런지 강물색이 너무 완연한 똥물색이야. 앗~ 커피색이라고 해야하는구나...
예전에 요왕이 왔던 건기 때의 사진을 보니 푸르스름 한 게 좀 서정적으로 보이두만.., 지금은 너무 격한 황토색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수돗물도 연하긴 하지만 갈색이 살짝 비치긴 합니다. 오전에는 뿌연물이 나오다가 오후에는 그래도 좀 맑은 물이 나와요. 아마도 아침에 물탱크에 물을 담은 직후에는 누렇고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흙이 가라앉으면 맑은 물이 나오는 듯... 개인적으론 별 불편이 없었어요.
하긴 그런거 다 감안하는 성격이라면 아예 이 돈뎃은 무척 불편한 곳이겠고 여정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서 이 섬에서 할게 없느냐... 그건 절대 아니었어요. 한나절짜리 카약 투어도 있고, 강물 따라 커다란 자동차 튜브에 올라타 강물따라 흘러가는 튜빙도 할 수 있어요. 해질녘에 배를 빌리거나 투어로 메콩강과 작은 섬들사이로 지는 노을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돈콘 섬 맨 끝으로 가서 거기서 배를 한 두시간 빌려 강을 배회하다가, 운이 좋다면 이 부근에서 산다는 분홍 돌고래를 볼 수도 있고요. 마치 이집트의 공주 이름처럼 들리는 ‘이라와디 돌고래’가 그 분홍이의 이름입니다. (이라와디는 미얀마의 강 이름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미 카약을 저어봐서 제 능력을 알아요. 카약은 노 잡은 지 딱 5분만 흥미가 돋고 그 이후부터는 ‘고통-노동-관절통-근육통-후회’입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하루종일 카약 투어를 했다가는 아마 내내 끙끙 앓거나 반좀비처럼 침대에 누워만 있게 될 것 만 같아요.
그리고 튜빙은... 이 거친 물살에 튜브 하나 의지해 강위로 둥둥 떠다니는 건 이미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 강물에 그게 뒤집히기라도 한다면...? 내겐 너무 격하고 위험해보였어요.
사실 이 섬에선 매년 튜빙 사고로 사람이 죽어나간다고 바바 아저씨의 사이트에 경고가 되어있기도 했고요.
그리고 석양은 저녁나절 우리 숙소 반대편 쪽인 섬 서쪽길을 걸으면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 그래서 딱히 배를 빌려 타고 나갈 맘은 들지 않았지만, 그 투어를 한 여행자들 사진을 보니 엄청 즐거워 보이긴 했어요. 지는 해를 지상에서 보는 거랑 배 타고 마주하는 거랑은 느낌이 확실히 다르겠죠. 이건 좀 해보고 싶었는데... 흐린날도 많고해서 강변 식당에서 저녁 먹는 걸로 패스~
이게 다 게으름뱅이의 자기최면인건가?... 나 왜 자꾸 변명하는거 같지...? 하긴 내 여행을 누구한테 변명하겠어요. 그냥 그런거지...
우리 숙소인 바바 아저씨는 www.dondet.net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섬에 대한 애정이 꽤 깊은 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데 왠지 맘은 안 그럴 거 같은 느낌이랄까... 하여튼 겉으로 사근사근하고 친밀한 스타일은 아닌 게 분명해요.
그래도 매일 방값 낼 때마다 물과 휴지도 챙겨주고 객실도 넓고... 정원 관리도 잘되어있고... 객실이 달랑 7개밖에 없어서 아마 성수기에는 방 잡기가 힘들게 분명해요.
그때는 요금도 20만낍(800밧 또는 28,000원)이 아니라 좀 더 올라갈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돈뎃이 작은 섬이긴 해도 여행자가 필요한 건 다 있어요. 인터넷이 좀 불안하기는 해도 와이파이가 지원되는 가게가 많고, 선착장 입구에는 상점도 있어서 육지에서 미리 구하지 못한 생필품은 섬에서도 별 어려움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 더 비싸긴하지만, 그렇게 많이 올려 받진 않았어요.
게다가~ 놀랍게도~ 이 돈뎃에서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겸 카페인 뱀부 까페가 있었습니다. 진짜 한국인은 개척정신과 실행력은 대단한 거 같아요. 여기에서도 업장을 열수 있다니... 이런 동네에서는 매우 한정적인 재료밖에 없을텐데... 그럼에도 한식을 만들고 말이에요. 홀로 온 여행자분들은 저녁에 한인업소 가시면 올 만에 우리말로 대화도 나눌 수 있어서 좋겠어요.
저랑 같이 섬을 좀 둘러보던 요왕은 7-8년전의 돈뎃 모습이 겹쳐지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어요. 전 그 시절에 이곳을 만나지 않고, 이렇게나마 시설이 갖춰진 후에 만나게 되어서 그나마 씨판돈의 첫인상이 좋았다는 안도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