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하는 일
읽을 책이 없어지면 금단현상까지는 아니어도 허전하고 맥이 빠진다. 눈썹도 빼놓고 가야하는 배낭여행자가 아이 책, 내 책, 가이드북까지 배낭과 캐리어에 나누어 넣으니 더 이상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장거리 이동 중 일기 쓰기, 생각하기, 아이와 대화하기만으로는 여행이 궁색해지려는 순간, 루앙프라방의 빅트리 카페에 들렀다. 우리나라 책들이 벽면에 한 가득 있는 걸 보고 허기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들을 읽었다.
식당에 와서 음식보다 책에 더 관심을 갖고, 종일토록 붙어 있는 여행자를 안주인은 꺼릴 법도 한데 오히려 맘 편하게 대해주신다. 우리 아이를 당신 첫째와 놀게 해주신다며 이층 살림집에 올려 보내놓고 마치 이웃에 놀러 온 친구나 진배 없이 대해주심에 여독이 저절로 풀린다.
게다가 주문한 음식은 어떠한가? 제육덮밥과 참치김밥은 지금껏 한인식당에서 먹어본 한식 중에 최고였다. 옆 테이블에서도 친정 엄마가 차려준 밥상 같다며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가장 바쁜 시간은 점심 무렵이다. 밀물처럼 단체손님이 들이닥쳐 저마다 다른 주문으로 정신을 빼고, 오후에도 주문이 밀려 북새통을 이루는데도 여주인은 식사가 끝난 테이블로 찾아가 잘 익은 망고를 후식으로 내놓는다. 여행자들과 눈 마주쳐 인사하며, 어떤 경우에도 휘둘리는 법 없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카페를 운영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준다.
책을 읽는다고, 며칠 카페에 앉아 있다 보니, 숨 가쁘게 돌아가는 매일의 나날 속에 문득 질문이 솟는다. 만약 나라면 이렇게 바쁜 삶을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성업 중인 카페와 어여쁘게 자라나는 아이들, 그리고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진작가 남편을 지닌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 그녀 입을 통해 직접 듣지 않았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바로 아이들 교육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쓰는 우리 아이를 보자마자 당신 아이와 놀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고단한 여행자에게 기쁨을 주는 카페 일이 보람도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러하듯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육아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이 그녀라고 왜 없을까?
하지만, 그녀의 음식솜씨와 카페의 분위기가 없었다면 루앙프라방의 여행은 내게 반쪽 짜리나 다름 없다. 그만큼 절대적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차기 계획을 세우고, 재투자와 확장을 모색하며 점점 더 발전하여 나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어느 때는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미덕일 때도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동료들이 하나 둘 승진에 관심을 갖거나 아니면 육아에 몰입하기 위해 휴직할 때, 나의 비전 없음과 열악한 경제사정에 대해 가볍게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변치 않고 학교현장에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는 것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리라. 매일 하는 일이라 가벼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일 해야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박찬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삶이란 설거지와 같다고. 밥을 먹기 위해서는 설거지를 끝내야 하는 것처럼. 그러한 일의 반복이 바로 삶이라고.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왔을 때, 부디 그녀가 내놓는 음식을 다시 먹으며 향수에 젖을 수 있길 소망해 본다. 매일 그녀가 해낸 일처럼, 나 역시도 매일 나의 일을 해내다가 이곳에서 극적으로 해후하고 싶다. 메콩강가의 더 무성해진 나무 아래서 싱그러운 미소를 주고 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