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
“라오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저장하는 법이 없어요. 내일은 또 내일 먹을 것이 생긴다고 생각하지요. 인도나 베트남, 이집트의 바가지는 악명 높지만, 이곳 사람들 바가지는 기껏해야 1000원 2000원이지요. 귀여운 수준입니다.”
블루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온다. 어줍은 영어실력으로 여행을 하다보면, 사기꾼의 목표물이 되기 십상이다. 옛말에 ‘헛똑똑이’란 말이 딱 이와 같다. 현지 언어를 몰라 당황할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영어로 말을 시키며 자기가 아는 호텔이나 여행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면 영락없다.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다. 방비엥에 도착할 때도 그랬다. 딱 봐도 아들과 엄마 사이인데, 작은 아이보고 ‘brother'냐며 내 기분을 띄워주면서 카약킹 가격을 제시한다. 라오스 물가를 모르니, 그것이 싼지 비싼지도 가늠이 안 된다. 흥정이란 정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기껏 깎아놓고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한국인게스트하우스를 가겠다고 했다. 그는 불쾌한 기색 없이 블루게스트 하우스 약도를 상세히 그려준다. 땡볕에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긴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보고 짐을 지키라 해놓고 숙소부터 찾았다. 사장님께 투어비를 여쭤 봤다. 그 청년이 제시한 가격은 만 낍(1400원)정도 비쌌다. 그 때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순박한 라오스 사람들은 속여도 귀엽게 속인다고. 약도를 그려주고 아이가 여행사에서 짐을 맡고 있게 해준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젊게 봐 준 것에 높은 점수를 줬나보다. 결국 그 청년에게 투어를 신청했으니 말이다.
자기 짐을 숙명처럼 지고 다니는 배낭여행객은 생수병을 하나씩 갖고 다녀야 한다. 동남아에서는 까딱했다간 배탈 나기 일쑤인 곳이라 물 값이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식당에 가면 음료 값을 따로 지불해야 하기에, 아이가 몸에도 안 좋은 탄산음료를 먹으려는 찰라,
“그냥 물 마셔!”
하면서 내놓는 비장의 무기다. 어느 땐 그 물마저 저장하려 한다. 작은 생수병은 더위에 금방 동이 나고 큰 생수병은 들고 다니자니 모양이 안 난다. 호텔에서 주는 생수를 깜빡 잊고 그냥 나오면 편의점에서의 고민은 극에 달한다. ‘큰 거로 살까? 작은 거로 살까? 내일을 위해 저장하는 법 없는 라오스에 와서 참으로 라오스와는 어긋나는 여행방식으로 여행을 하는구나.’ 실소가 나온다. 넘치는 법도 없고, 모자라는 법도 없는 화수분 같은 물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되도 않는 걸 소망해본다.
쏭태우를 타고 동굴체험을 위해 길을 나설 때 긴팔, 긴바지는 아니라도, 하다못해 스카프나 한 장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간절했다. 방콕의 호텔에 겨울옷을 맡겨놓고 혹시 몰라 가디건 하나는 챙겨왔는데, 아이는 맨투맨 티 하나가 고작이다. 아무리 긴팔이라 하더라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가디건을 벗어주려 하니, 기어이 괜찮다고 사양한다. 엄마는 속에 반팔이면서 그걸 벗어주면 어쩌냐고 하면서. 크로스백에 손수건 두 장이 있길래 그걸 아이 다리위에 감싸주었다. 짐이 되지 않고, 적재적소에 추위까지 막아주는 화수분 같은 옷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까와 같은 그 바람이 또 솟아난다. 그 날 저녁 동굴체험을 끝내고 방갈로로 돌아와 잠이 오지 않는단 아이에게 전영택의 ‘화수분’을 들려주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자식마저 남에게 보내야 했던 ‘화수분’은 돈을 벌려고 형님에게 갔다가 소식이 끊어지게 된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내는 젖먹이를 안고 남편을 찾아 나선다. 아내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선 ‘화수분’은 극적으로 아내를 만나지만, 눈 쌓인 산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자 둘이 꼭 끌어안고 동사하고 만다. 다음날 햇볕이 나고, 지게를 지고 가던 사람이, 두 사람 사이에 꼬물거리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지게에 지고 간다는 이야기를 띄엄띄엄 들려주었다.
다시 헤아려보니 ‘화수분’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 아닐까 싶다. 최빈국 라오스에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화수분이 있는 것처럼, 내일을 걱정하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부모의 사랑이 아이를 살리는 ‘화수분’ 부부처럼, 내 마음에도 사랑이 마르지 않는 ‘화수분’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