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이야기 #027 - 안녕, 그리고 루앙남타.
라오스 이야기 - 안녕, 그리고 루앙남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Vieng Phou Ka에 있는 작은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게 된 시각은
오후 세시 무렵이었다. 아침에도 카오삐약이었는데, 점심에도 역시 선택의 여지 없이 카오삐약이구나.
이러다가 집에 가서도 카오삐약 먹는거 아냐? 면식수행이 따로 없다.
세상에 이렇게 맛없는 국수는 무앙씽이후로 처음이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멈출 기세도 없이 30분이 넘게 내 갈길을 가로막는다.
라오스를 여행하며 좋았던 건, 소나기가 지나간 후에 무지개를 볼 수 있다는 건데,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보기도 힘든 무지개나 실컷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가는 방향이 해를 등지고 가니까 아마도 보게 된다면 눈 앞에 있을텐데...
비가 그치고나서 이름이 예쁘니까! 라는 이유로 가보고 싶었던 Na Lae를 향해 간다.
그나마 포장된 길을 따라 가다가 옆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 곳을 지나
다시 루앙남타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금방 가겠지. 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나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이 오프로드를 보자마자 생각을 바꿨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순간 핸들을 돌려 다시 왔던길을 거슬러 루앙남타로 돌아왔어야 했던 것이다.
Vieng Phou Ka에서 Na Lae가는 길은 방비엥의 오프로드 따위는 비교도 안되는 험한 길에
산길까지 더해져 있다. 그 것은, 해가 금방 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랫동네와는 비교도 안되게
추운 바람이 분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네시..다섯시...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길은 웅덩이 투성이었고, 흙탕길에 오토바이는 30km이상
절대 속도가 나지 않는다.
험한길을 달린 터라 연료소비가 심해진 탓에 기름도 넉넉지가 않을 것 같다.
이러다...조난?
여섯시.
지도에도 표기 되어있지 않은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마을을 가로지르고 흐르는 개울가 부근에 목욕을 하러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오토바이를 타고 씻으러 온 아저씨를 붙잡고 기름이 부족하다고 설명을 해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손짓 발짓 가지고 온 론리플래닛 뒷페이지를 뒤져봐도 그런 표현은 없다.
에잇! 영어 따위! (또다시 화살을 엉뚱한데 갖다 꽂아보기도 하고)
이 상태로 갔다간 GPS도 잡히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그냥 시동이 꺼지고...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 와중에 오토바이를 부여잡고...아 정말 상상하기 싫다.
우여곡절 끝에 연료를 구할 수 있었던 고산족마을...
동네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이 (그것도 동양인) 신기한지, 목욕하러 왔다는 본래의
목적은 잊은 채 삼삼오오 모여 쭈그리고 앉고 턱까지 괴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민망하니까 썬글라스를 써주었다. -_- 그 모습을 더 신기해 하기에 금새 다시 벗었어야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산꼭대기 마을에서 오토바이 연료를 채웠고, 그 길로 등뒤에 날아오는
뜨거운 시선을 외면한 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여섯시 반.
해가 지기 시작한다.
하늘 빛이 붉게 물들고 읽을 수 없는 도로의 안내판에는 무언가 50몇키로가 남았다고 한다.
저게 설마 Na Lae는 아니겠지, 하고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며 달리고는 있지만, 왠지 불안하다.
일곱시가 넘었다.
어느새 영문표기로 바뀐 안내판은 Na Lae 30km ... 불안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이 속도라면 한시간은 족히 더 가야한다는 얘긴데.
헤드라이트가 없이는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주변이 어두워졌다.
집에...가고 싶다. 그게 루앙남타의 깨끗한 시트가 있는 게스트하우스건,
우리 고양이 미스티가 뒹굴뒹굴 하고 있을 내 방 이불 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 춥다.
헤드라이트에 달려드는 날벌레들 때문에 주기적으로 껐다 켰다를 반복하다가,
작게 반짝이는 익숙한 불빛을 보았다.
얇은 날벌레의 날개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사되는 그런 순간적인 빛이 아닌
지속적으로 반짝이는 작은 불빛. 라오스에서 나를 끝없이 행복하게 했던 반딧불이.
태어나서 반딧불이를 라오스에와서 처음 보았는데, 그 작은 빛이 어찌나 예쁘던지,
영화 속의 장면으로 묘사되곤 하는 반딧불이의 향연을 한번 쯤 보았으면, 했는데...
혹시? 하고 오토바이의 시동을 잠시 끄고 그 자리에 내려 보았다.
Na Lae 까지는 25km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 흔한 가로등하나 없는 말도 안되는 산길에서 내가 본 것은, 크리스마스트리.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반딧불이가 작고 예쁜 빛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온 산을 밝히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위를 둘러 볼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일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어마어마한 풍경 안에 내가 있다.
내 주위를 맴도는 빛들, 내가 지나온 길들을 밝히는 작은 빛.
빛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드니 하늘에는 쏟아질 것 같은 별들.
하늘을 날고 있는 작은 빛들이 마치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 아래까지 천천히 깜빡거리는 빛들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춥고 힘들고 내가 여기 왜 와있는지 알수도 없어진 상황이지만,
왠지 이 빛들에 의해 내가 위로 받고 있음을 느낀다.
아침에 파랑새를 보았지.
그리고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는 고산족 할아버지를 만났어.
소나기가 그친 뒤의 무지개는 나와 약속이라도 한 듯 눈 앞에 나타났고,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너무 힘든 상황에 내가 평생에 걸쳐 가장 보고 싶어했던
풍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건 우연의 선물 치고는 너무나 기가 막힌 타이밍.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추운 탓에 끝없이 현실감각을 잊지 않는다.
오후 여덟시 반.
Na Lae에 도착했다.
굳어버릴 것 같은 손발에 이 곳에서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깨끗한 시트에 누워서 자야겠단 생각이 더 강하다.
지도를 잘못 읽었는지 이 곳에서 루앙남타까지는 50km정도라 생각했는데,
마을을 나서고 보니 Luang Nam Tha 79km. 좋은거 다 봤으니 이제 신이 나를 버릴 차례인가...
솔직히 차로 달리면 한시간도 안되서 도착할 거리지만, 도로는 비포장이고 가로등은 하나도 없고...
속도는 30km이상 절대 내지 못하니 집에 도착하면 열한시...더 늦어지면 열두시는 되겠다.
오후 대여섯시면 집에 도착해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어야 정상인데, 저녁도 못챙겨 먹고...
이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서둘러 길을 나선다.
1km,1km 줄어드는 거리를 보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마을에서 멀어지니 또다시
불을 밝혀주는 반딧불이들에게 위안을 얻는다.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각.
또다시 오토바이 연료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때마침 나타난 지도에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병에 넣어 파는 가솔린을 사서 채워넣는다.
아홉시만 되면 온 나라가 정적에 휩싸일 만큼 밤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라오스인데,
어째서 이 늦은 시각까지 가게 문을 열어 둔걸까? 신기하기까지 하다.
미지의 무언가로부터 응원을 받는 기분이다. 힘내서 집에 돌아가, 편히 쉬고 싶으면 그렇게 해!
랄까. 영화를 너무 많이 본걸까? 아님 비슷한 장르의 책을 너무 많이 읽었는지도 모르지.
열한시.
저 멀리서 도시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의 능선 뒤로 후광처럼 밝혀진 인공의 빛들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포장도로에 접어든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에 정신나간 여자처럼 신나게 웃어 재끼고,
30분쯤 더 달리고 나니 내가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했던 루앙남타의 집 앞에 서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손발은 차갑게 식어 굳기 일보 직전이고, 거울을 보니 입술은 새파랗고
엉덩이는 이미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가게문 닫기 일보 직전의 국수집에 가서 카오삐약을
포장해 와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친 뒤 흡입하듯 들이킨다.
하루 세끼 카오삐약 먹는 거 아니야? 라고 농담삼아 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너무나 긴 하루가 이렇게 끝났다.
아마 깨어나면,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 없던 현실적인 하루.
내일은...푹 쉬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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